13년간의 회사생활을 끝낸 날, 예상과는 달리 무덤덤했던 감정과 동료들과의 마지막 자리. 퇴사 후의 안도와 불안을 솔직하게 담아낸 이야기
#1. 40세, 무심하게 사직서를 내밀었던 그날
사직서를 내던 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흔히 퇴사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결정적 순간' 같은 긴장감도,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주 전, 모니터 앞에서 내 입사 동기가 보낸 사직서 양식을 받던 순간엔 어쩌면 조금의 떨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서류를 작성하고 발송 버튼을 클릭했던 순간, 마치 늘 해오던 업무 하나를 마치듯 익숙하고 평온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다.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 몇 통의 이메일을 보내고, 몇 가지 업무를 마무리한 후에, 예정된 시간이 되자 상사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짧은 인사말 뒤로 스쳐 지나가는 상사의 얼굴엔 놀라움보다 피곤함이 먼저 배어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 바빠 내 퇴사조차 큰 이슈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2.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자리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둘러봤다. 익숙했던 풍경들, 낡아가는 회의실 의자, 탕비실의 커피 머신, 그리고 늘 반복되던 풍경 속에서 무심히 스쳐 갔던 동료들. 몇몇은 바쁜 업무를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남은 사람들만이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작은 케이크와 종이컵에 따른 커피 한 잔이 준비된 테이블에서 우리는 둘러앉았다.
그날 대화는 나의 퇴사와는 상관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어제 저녁에 본 드라마가 어땠는지”, “이 근처에 새로 생긴 맛집이 어디인지” 같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마치 내 퇴사는 그저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라는 듯. 그런 가벼운 대화 속에서 나는 이 시간이 내게도, 그들에게도 일종의 작은 쉼표처럼 느껴졌다.
축하인지, 위로인지 모를 인사 속에서 나는 그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주었고, 또 누군가는 부러움 반 걱정 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축하해요, 좋은 선택 하신 것 같아요.” 그 말들이 진심일 수도, 아니면 사무적인 인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내 퇴사는 결국 내 선택이고,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었다.
#3. 오래 기다려왔던 해방감
사실, 퇴사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결심이었다. 출근길마다 문득 찾아오던 생각들. "이 길이 정말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맞을까?" 회사를 처음 들어왔을 때 느꼈던 설렘은 어느새 의무감과 생존 본능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월급 명세서를 받아들며 안도하는 동시에, 그 안도감이 나를 점점 더 옭아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직서를 제출하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는 감정이 들었다. 마치 매일 나를 짓누르던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듯했다. 하지만 그 해방감 뒤에는 막연한 두려움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 삶의 주인이 오롯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4. 새로운 시작을 향한 첫걸음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도시의 불빛은 눈부셨고, 거리의 소음조차 활기차게 들렸다.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 친구를 기다리며 텅빈 운동장에 홀로있던 초초함과 기대감처럼, 나는 그날이 사무치게 기억이 난다.
13년간의 회사생활은 끝났지만, 그 13년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붙인 이야기를 써내려가자고. 무심하게 사직서를 내밀었던 그날, 사실은 내가 오래 기다려왔던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