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 < Armageddon > 뮤직비디오 등을 작업한 성치영의 습작.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예술가를 완성시키는 건 수십 번 고쳐 쓴 습작이다. 뭐든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3월,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막막한 이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만한 동시대 창작자들의 습작을 엮었다. 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이번엔 에스파 < Armageddon > 뮤직비디오 등을 작업한 3D 그래픽 디자이너 성치영의 습작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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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잘 몰라서 마음대로 했던 순간이 제일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 @calllmechi
크리에이터들의 습작에 주목하는 이번 특집에 선뜻 참여해준 이유는요?
작업 비하인드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있지만, 프로세스 자체가 주제가 되는 기획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보통 3D 그래픽은 장면 하나를 작업하는 데 하루 이상이 걸리거든요. 그 장면 하나를 위해 수많은 습작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대부분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하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습작이라는 것이 그저 미완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게 쌓여서 저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번 주제가 흥미로웠어요.
패션을 전공했지만, 3D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어요. 3D 그래픽의 어떤 점에 매료되어 결정을 내렸을까요?
물리적인 한계가 없다는 점? 제가 사실 게으름이 많아요. 패션과를 다니면서 힘들었던 부분이 여러 도구를 사용해야 하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제가 원하는 원단을 사러 온 시장을 돌아다녀야 하는 점들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다른 게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당시에 색감이 강렬한 뮤직비디오나 알렉산더 왕이나 아바바브 등 몇몇 브랜드에서 3D 그래픽을 활용한 작업물을 올리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저거 뭐지, 저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학원을 알아봤죠. 꽤 비싼 비용을 들여 배웠는데, 코로나 시기여서 오래가진 못했어요. 결국에는 처음으로 돌아가 집에서 독학하며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죠.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들다가 얼떨결에 콘테스트에 나갔는데 덜컥 우승을 했어요.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었지만 어설프게나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표현했거든요. 그때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쳤죠. ‘어, 하고 싶은 걸 했는데 성과가 있네?’ 도파민이 확 돌더라고요.(웃음)
브랜드, K팝 아티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어요. 가장 흥미를 느끼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다른 작업도 재미를 느끼지만, K팝 아티스트 작업의 경우 조금 더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짜릿한 작업이긴 해요. 아티스트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 노래의 리듬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야 하니까요. 제 스타일을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기도 하고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모든 과정이 흥미로워요.
그중에서 에스파의 < Armageddon >은 특히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작업을 마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반응을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주변에서 빨리 보라며 제보가 들어오더라고요. 주접(?) 댓글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댓글도 많았고, 제가 의도한 부분을 정확하게 알아봐주시는 댓글도 많아서 놀라웠죠. 작업을 봐주시는 분들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걸 저장하기 시작했어요. 꽤 자극도 되고 힘을 얻게 되더라고요.
< Armageddon > 작업은 어떤 형태로 진행됐어요?
보여주신 기획안에 녹아 있는 세계관 자체가 방대하고 독특했어요. 비주얼 컷들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컷이 많았고요. 한편으로는 제 작품이 잘 어우러질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함께 작업한 윤승림 감독님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어서 서로를 믿어보자며 밀어붙인 것도 있어요. 매일 매일이 습작의 연속이었죠.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제가 가진 방법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디자인을 해야 하다 보니 매 과정마다 형태와 요소를 실시간으로 공유했거든요. 떠오르는 대로 요소들을 추가하면서 처음이랑 다른 방향의 엉뚱한 게 탄생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 디자인이 채택됐어요.
꽤 다양한 습작이 있더라고요. 손으로 그린 작업도 있고, 그래픽으로 구현된 작업도 있고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스케치를 했어요. 빠르게 작업이 필요할 땐 간소화하기도 했죠. 그런 습작도 있고, 어떤 프로젝트는 시간이 부족해 우선 그래픽 작업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요. 좀 더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요. 작업이 너무 힘들면 어떤 생각까지 하게 되는지 아세요? 화려한 장면 속에 제가 감춰져서 제가 작은 요소로만 남겨져 있는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나라도 나의 고생을 기억하자라는 취지로 습작들을 아카이빙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나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누가 알아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일종의 보상처럼요. 그런데 체계적인 과정은 없어서 아카이빙이라는 말이 거창한 것 같고, 간단하게 폴더를 만들어서 저장하는 형태죠. 패션과 때부터 이어져 온 저장병 같은 거예요. 보통 의상 작업을 할 때 원단 하나, 스케치 하나 다 수집해두곤 하거든요. 저 구찌 인턴 때 받았던 팸플릿도 아직 가지고 있어요.(웃음)
곧 온라인 클래스를 오픈해 디자이너 성치영의 노하우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다른 예비 창작자들과의 교류는 또 다른 영감을 줄 것 같아요. 이 인터뷰를 보고 있을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최근에는 저와 제 팀원 오하이오가 만든 KATIKØ가 저희의 이름을 걸고 SUPERPOP 2025 KOREA 페스티벌의 비주얼 쇼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의 작업보다 큰 역할이 주어져서 신경 쓸 부분이 정말 많아졌죠. 그래서 두렵기도 해요.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낯설기도 하고. 그렇지만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도전해보는 것이 중요하죠. 습작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우리가 걸작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잖아요? 그런 것이 은연중에 기준이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위축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거창하지 않아도 되고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못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보단 해보는 게 중요해요. 제 인스타그램 피드 내려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작업도 있거든요. 굳이 찾아보지 마세요.(웃음) 부끄럽긴 한데 그런 습작이 쌓여서 자기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잘 몰라서 마음대로 해보는 그런 순간이 제일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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