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우리 집가장 어린 존재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by 마부자


금주 125일째, 5시 40분.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뜬 몸이 스스로 기지개를 켰다. 하루를 여는 시간은 언제나 같고 그 고요함 속에 변하지 않는 풍경처럼 창가로 향한 걸음은 아침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서서히 깨운다.


제목: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창문 너머 불어오는 바람이 겨울의 시셈인지 아니면 늦은 봄의 마지막 인사인지 헷갈릴 만큼 차가웠다. 그러나 덕분에 머릿속까지 맑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 평소처럼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나 오늘은 공룡이라도 다시 살아난 건 아닌지, 습관처럼 뉴스를 확인했다. 세상이 워낙 시끄럽고 복잡한 요즘.


6시를 앞두고 블로그를 확인했다. 이웃 여르미 작가가 예고했던 책 나눔 이벤트가 오늘이라는 건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알고 있었어도 새벽에 올라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무심코 클릭한 페이지, 스크롤을 내리기도 전에 딱 눈에 들어온 한 권. 유시민작가의 <청춘의 독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내가 읽고 싶어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었던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책들은 보지도 않고, 그 순간 손이 먼저 반응해서 댓글을 달았다. 페이지를 닫고 42년 만에 누군가에게 받은 어린이날 받은 책 한 권.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은 책린이로서는 이만큼 완벽한 선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 그렇게 뜻밖의 선물로 하루를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분명히 특별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이 일상속에 작은 기쁨 하나가 들어왔을 때 훨씬 더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상을 마친 뒤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은 조용한 아침 일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날짜는 유독 내게 의미 있는 날이다. 이른 새벽부터 받은 책 선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에겐 오늘이 조금 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기를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누군가의 생일이자 어린이날이기도 하다. 이제는 주민등록증까지 나온 어엿한 성인인 막내. 그런데도 우리 부부에게 그는 여전히 집에 남아 있는 마지막 어린이다.

막내의 생일은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18년째 다 큰 아이를 위해 어린이날을 준비해왔다.


이쯤 되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설마 어린이날을 노리고 계획하신 건 아니죠?” 마치 아기의 생일을 기간에 맞춰 의도한 듯한 의심을 받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피식 웃게 된다.


물론 셋째라 제왕절개를 해야 했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출산 가능한 일주일 중 하루를 고르라고 했던 건 사실이다. 그 주에 유일한 공휴일이 5월 5일이었을 뿐이다. 의도했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순 없겠지만 계획했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끄럽다.


다만 그날로 태어난 막내가 지금까지 우리 곁에 건강하게 자라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막내가 어릴 땐 생일과 어린이날을 한 번에 기념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한 번에 선물도 챙기고, 한 번에 외식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도 크게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녀석이 크고 나서는 좀 달라졌다. “생일 선물하고 어린이날 선물은 다르잖아요?”라고 따지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부부는 두 개의 이벤트를 준비해야 했다.


오늘도 역시 그렇다. 어느새 다 커버린 아이지만 막내라는 말만큼은 여전히 우리 부부의 입에 익숙하다. 그렇게 아침부터 나는 아이를 위한 아니 이미 성인이 된 막내를 위한 하루를 준비했다. 여전히 누군가를 위해 주방에 서는 이 시간이 익숙하고도 기쁘다.


그렇게 올해도 어김없이, 18년차 어린이날의 시작을 나는 주방에서 맞이했다. 어제 저녁에 미리 소고기를 다진 마늘과 참기름 그리고 후추에 밑 간을 해 두었다. 명상을 하기전에 미역을 꺼내 불에 불려두었다.


불린 미역을 씻어내고 냄비에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은 후 고기가 익으면 불린 미역을 함께 넣고 달달 볶아준다. 그리고 미역의 색깔이 변하고 나면 미역불린 물을 넣고 불을 올려 끓여주면 끝난다.


강불에 국이 끓기 시작하면 맛을 보며 국간장과 소금을 조금씩 넣어주고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주고 약 1시간 정도 더 끓여주면 완성된다.


사실 가장 맛있는 미역국은 하루 전날 끓여 둔 국이다. 밤 사이 냄비 속에서 재료들이 더 깊이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제 저녁, 하루를 조금 바쁘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마음만 있었지 손은 미처 가지 못했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아빠의 정성 하나,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난 생각했다.


1차로 국을 끓이고 자리에 앉아 어제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정리했다. 가볍게 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마음은 자꾸 어딘가에 머물렀다. 소년 산티아고의 여정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나 역시 나만의 '보물'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걸어왔고 또 여전히 걷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책 속 여운을 뒤로하고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30분, 오늘의 주인공을 깨울 시간이었다.


막내의 생일. 그러나 더 이상 막내라 부르기엔 조금 어색한 나이가 되어버린 우리 아이. 오늘 친구들과 함께 부산 사직야구장에 가기로 했다고 한다. SSG와 롯데의 경기, 어린이날 경기라 입장권 구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알고 보니 누나가 생일선물로 예매해준 티켓이란다.


누나가 해준 선물이라는 말에 나는 괜스레 뭉클해졌다. 그렇게 속 깊은 아이로 자라줘서 고마웠다.


막내가 준비하는 동안 아내도 일어나 함께 식사를 했다. 아내는 생일 아침마다 해온 익숙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이렇게 커다란 녀석을 낳느라 고생했어.”


매년 같지만 매년 다른 그 인사의 무게는 오늘 유독 다르게 다가왔다. 이 아이가 처음 우리 앞에 선 날부터 어느새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결심 끝에 어렵사리 얻은 아이. 기쁨이었고, 위로였고, 때론 삶의 중심을 다시 바로잡아준 존재였다.


식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막내가 툭 던진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다음 달 대통령선거에 저도 투표할 수 있어요.” 그 한마디에 이제 정말 어엿한 성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가 아니라 성인. 은행 통장도 만들 수 있고 운전면허도 딸 수 있고 무엇보다 나라의 미래에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럼 첫 투표는 아빠랑 같이 가자.”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막내는 씩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대답 한마디에,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렀는지를 절감했다.

막내의 생일이자, 이제는 어린이날이라 부르기엔 조금 무거워진 오늘은 우리 집의 가장 어린 존재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다.

18년 전 어린이날에 그렇게 세상에 선물처럼 찾아왔던 아이가 올해 어린이날엔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막내’란 호칭조차 조금은 덜 익숙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막내가 외출 준비를 마친 후 서재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무심한 듯 큰 소리로 “저 갈게요” 하고 말했지만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않았다.


마치 뭔가 빠뜨린 사람처럼 아니 정확히는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의무적 통과의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장난스럽게 “응, 잘 다녀와”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막내의 얼굴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 표정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이 집의 막내로서 아직 내가 받아야 할 게 남아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결국 나는 웃으며 지갑을 열었다. “이게 있어야 진짜 인사지?” 하고는 오늘의 교통비와 간식 값이라는 이름의 용돈을 챙겨주었다.


한 손으로 용돈을 받아 든 막내에게 “오늘 원정 응원이잖아. 괜히 흥분해서 상대 팬하고 부딪히거나 하지 말고 그냥 박수만 치고 오렴” 하고 말을 건넸다.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올게요”라는 말과 함께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거실. 문득 그 뒷모습이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듯해 마음 한편이 시렸다. 그러나 그 속엔 분명 든든함도 함께 있었다. 부모로서의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하루 그저 지켜보는 일만이 남아가는 하루였다.


다시 돌아온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일정한 루틴 안에서 조용히 흘러갔다. 아내는 오후 햇살을 맞으며 짧은 산책을 다녀왔고 나는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집 안은 평소처럼 조용했고 거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겨우내 굳어 있던 집 안의 공기를 조금씩 움직여주고 있었다.


막내의 생일파티는 친구들과 한다고 저녁 무렵 연락이 왔다. 당연한 일이다. 18살이라는 나이는 가족보다 친구와의 시간이 더 특별하고 더 중요한 때다.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조용히 웃었고 그렇게 저녁 식사는 둘이서 준비했다.


케이크는 없었지만 아내가 꺼낸 무 알콜 캔맥주 하나로 조용한 축하를 대신했다. 생일 초를 밝히고 축하노래를 부르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 아이가 무사히 18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하 받을 자격이 있었다.


야구 결과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부산 팬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그 아이가 오늘 친구들과의 웃음 속에서 자신의 생일을 잘 보냈기를 그리고 돌아오는 길 무사히 집으로 오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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