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독서를 마친 후 창밖에서 밀려든 초여름 햇살과 방 안에 들어온 바람을 느끼며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이 맑고 깊었다. 오후의 햇살은 읽고 있던 책의 따뜻한 여운을 서재 안으로 계속 밀어 넣고 있었다.
이번주 체중감량이라는 단기 목표보다는 몸의 방향을 새로 잡아주는 감각에 집중하며 저강도의 페달을 반복했다.
귀로 들은 책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밥 프록터의 <부의 확신>이었다. 오늘따라 그 목소리가 한결 명료하게 들렸다. 그중에서도 내 생각을 붙잡은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이 진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과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상형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상’이라는 건 내가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린 바로 그 생각을 말합니다. 이상은 손에 닿지 않는 개념이 아닙니다. 성공은 가치 있는 그 ‘이상’을 계속해서 ‘현실’로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하와이 대저택 제공
이상.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단어였지만 동시에 손에 닿지 않는 단어였다. 우리는 흔히 이상을 ‘이룰 수 없는 무언가’로 여긴다.
그래서 때로는 포기해도 괜찮은 꿈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밀어내기도 한다. 혹은 현실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막연한 동경이나 환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 단어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상이라는 말을 마치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포장해왔다.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인간, 이상적인 관계라는 표현은 언뜻 고귀해 보이지만, 정작 그것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상’이라는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 행동의 동기가 되기보다는, 손 닿을 수 없는 관념처럼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우리는 그 단어를 말하는 순간, 곧바로 현실과의 괴리를 의심받고, 가능성보다는 환상이라는 인식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이상을 사랑하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 속에서 과연 이상을 현실의 과정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그 질문에 ‘가능하다’고 답하고 싶다. 단, 그 이상이 남이 정해준 기준이 아닌, 나만이 붙들고 싶은 가치라면 말이다.
이상은 도달해야 할 성취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척도다. 이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환상이 아니라 연습이다.
그러니 이상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더 손에 잡힐 듯해야 한다. 나를 진심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향. 나를 기꺼이 사랑하게 만드는 가치. 그런 것이 이상이어야 한다.
이상은 어떤 외부의 기준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만이 선택하고, 나만이 향할 수 있는 좌표다. 이상이 멀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만큼 내가 나와 충분히 대화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생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상이란 결국 ‘지향’이 아니라 ‘확신’에서 출발한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싶은지, 왜 그 길을 선택하는지를 매일같이 점검할 수 있다면, 이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오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만의 이상을 생각했다. 단단하지 않아도 좋았다. 명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그것이 나를 설레게 하고, 내가 하루를 시작할 이유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상은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깨 달았다. 이상은 언젠가 이루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은 언젠가 이루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내는 어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