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97일차의 기록
며칠 전, 춘천에 사는 처형 내외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전에서 가족 모임을 하려는데 내가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생각해보면 가족이라고 해봐야 장모님과 형님, 처형 그리고 아내까지, 네 사람뿐이다.
하지만 서로가 제 삶을 감당하느라 바쁘게 살아온 세월 탓인지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다. 투병 직전에도 한 번 대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했고,
모두가 걱정과 불안으로 울먹이며 내 완치를 빌어주었다.
그날의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말보다 더 깊이 전해지는 눈물의 힘 같은 것이 있었다.
치료가 끝난 뒤 그들은 대구까지 내려와 나를 보겠다고 했지만, 미각도 돌아오지 않았고 체력도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누군가를 맞이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몸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고, 거울 속 내 얼굴도 예전처럼 살이 붙어 아픈 사람의 흔적이 조금 덜해 보였다. 그래서 이번만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투병을 시작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따뜻한 마음들을 누가 더 많고 적다고 셀 수 있을까. 그럼에도 유독 가슴 깊이 남는 사람은 아내의 언니, 그러니까 내게는 처형이었다.
아내와 연애를 시작한 게 37년 전이니, 처형과의 인연도 그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처형은 나에게 친누나 같은 사람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나아진 내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나도, 처형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수능을 끝내고 잠시 백수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막내와 아내와 함께 이른 점심을 먹고 대전으로 향했다. 그전에 먼저 들른 곳은 동생이 잠들어 있는 대전현충원이었다.
언제 와도 현충원의 공기는 조용하고 또렷하다. 바람에도 규칙이 있는 듯한 정적이 맴도는 곳이다. 그 속에서 나는 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동생을 만났다.
잘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 완치까지 함께해달라는 나의 욕심, 조카가 성인이 되는 시간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 어머니와 아내의 건강까지.
생각해보면 나는 동생을 찾을 때마다 늘 부탁만 하고 돌아선다. 언제쯤이면 “이제 다 괜찮다”는 기쁜 소식을 먼저 들고 올 수 있을까.
돌아서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형님 댁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처형 내외가 도착해 있었다. 투병 후 처음 만나는 자리라 분위기가 무겁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실제 순간은 예상보다 훨씬 벅찼다.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처형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동안 참아온 것이 한순간 무너지는 듯, 처형의 울음이 터졌고 그 모습을 본 아내도, 나도 눈물이 차올라 결국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인사를 나눴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시선도 보이지 않았다.
슬픔과 아픔 그리고 안도와 기쁨이 섞인
묘한 감정이 섞인 포옹이었다.
우리가 같이 지나온 시간, 우리가 함께 견뎌낸 마음이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흘러나온 듯했다.
잠시 감정을 추슬러 장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장모님은 내 얼굴을 한참 보시더니
“그래도 생각보다 수척하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하셨다.
내 모습 하나에 누군가가 이렇게 안도하고 미소를 지어주는 순간은 투병 이후 처음 느끼는 따뜻함이었다.
짧지만 깊었던 슬픔의 시간 뒤에 남은 것은 안도의 한숨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들이었다. 회복되고 있다는 현실이 가족들의 얼굴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장모님 댁으로 이동해 간단한 주류와 함께 늦은 저녁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에 늦은 밤까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투병 이후 이런 시간이 거의 없었다. 몸이 먼저 지쳐버리니 사람을 만나도 오래 앉아 있기 어려웠고,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체력이 바닥나 말문이 닫히곤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람과의 만남을 조금씩 미루고, 말수를 줄이고, 조용한 쪽으로 숨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비록 나는 무알콜의 음료였지만 함께 잔을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서로가 안도하는 표정이 번졌다.
그 안도는 건강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다시 돌아온 일상의 온기를 확인하는
마음에 가까웠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긴 숨처럼 느껴졌지만 돌아보면 마음을 다독여주는 순간들로 조용히 채워진 하루였다.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