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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끝은 (feat. 『다 이루어질지니』)

사이코패스 기가영의 일상은 룰과 루틴으로 큰 탈 없이 굴러간다.

by 시 선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않을 생각이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나는 어젯밤 새벽 2시를 훌쩍 넘기며 기어코 그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보고 잤다. <다 이루어질지니> 말이다. 드라마에는 지니가 나온다. 맞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지니. 램프를 문지르면 주인님! 하고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램프의 요정 지니. 그러나 드라마에서 지니는 요정이 아니라 사탄으로 그려진다. 이 세상의 모든 천지를 창조한 그분이 연기 없는 불꽃으로 만든 존재가 지니이고, 그가 바로 사탄이며, 이 사탄은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로서 타락할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들에게 세 가지 소원을 이뤄준다는 설정이다.




지난 추석 긴 연휴 끝에 우연히 보기 시작한 것이 매력 넘치는 두 주인공과 드라마로서는 신선한 소재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들의 케미가 하도 흥미진진하고 유쾌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4일 만에 13부작의 드라마를 단숨에 완주해 버렸다. 어젯밤엔 최종화까지 총 3편을 한꺼번에 보느라 늦게까지 자지 않은 거였다. 내가 원래 이렇게 정주행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희한하게 이 드라마는 적당히 끊지를 못하고 계속 보게 됐다. 그만큼 재미가 있어서일 수도 있고, 그만큼 내가 타락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지니는 인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게 하면 인간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인간의 욕망이 드러난다고 했다. 보통 첫 번째 소원은 인간이 평소에 품고 있던 욕망에 따라 그 자리에서 바로 빌고, 두 번째 소원은 첫 번째 소원을 뒷수습하기 위해 쓴다고 한다.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은 대개 오랜 시간을 들여 심사숙고 끝에 비는데 그 가능성과 희망 때문에 제때 소원을 빌지 못하는 인간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니는 왜, 인간이 소원을 이루면 타락한다고 확신한 걸까?




간밤에 드라마는 내게 지니이고 사탄이었다. 드라마는 나의 욕망을 부추겼다. 지금 당장 드라마 전편을 모두 끝내고 싶어 하는 욕망이었다. 내가 룰을 정해놓고 그에 따라 드라마를 완주했더라면 오늘처럼 나의 일과가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였다. 룰에 따르는 건 욕망이 아니다. 그보다는 재밌는 걸 보고 싶고, 이야기의 끝이 알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가깝다. 이 욕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욕망과는 다르다.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건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조절한다는 의미다. 조절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인간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욕망했다. 지금 당장 다 보겠다고 욕망했다. 다음 날 나의 소중한 일과가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난 나의 욕구를 컨트롤하지 못한 거였다. 그 결과 이처럼 나의 일상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기어코 타락하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도서관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느릿느릿 겨우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어서 나는 잠이나 자야겠다고 드러누웠다. 솔직히 내가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도 아니니 무방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일 테다. 내겐 오전에 도서관에 가는 우선순위의 루틴이 있고 그동안 웬만해선 빼먹지 않고 지켜왔기 때문이다. 고로 난 내 욕망으로 인해 타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 스스로 루틴을 어기고 게으름을 피웠다.


욕망이란 무엇이기에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것일까? 욕망은 ‘부족을 느끼고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탐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것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어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 심리 상태를 넘어 남의 것에 대한 질투와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내포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지니는 인간이 소원을 비는 순간 그의 욕망이 발현될 것으로 믿었고, 그 욕망이 결국 인간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악한 본성, 즉 타락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는 지니는 온갖 달콤하고 황홀한 것으로 인간을 현혹하는 사탄과도 같은 존재다.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이루어내야 하는 그 소원을, 그래서 그 인간이 할 수 있고 그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실현되는 소원을, 지니는 말만 하면 ‘다~ 이루어질지니~’ 약속하고, 자체 발광하며 ‘다~ 이루어졌어!’ 한 마디로 그 자리에서 모두 일순에 들어준다. 이런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인간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렇게 인간의 타락을 증명하지 못해 안달인 지니가 거의 천년 만에 만난 주인님 인간은 바로 여주인공, 기가영. 선천적으로 사이코패스로 태어나 부모에게 마저 버림받은 아이, 기가영을 외할머니가 지극 정성 사랑으로 키우고 마을 사람들이 넉넉한 보살핌과 희망으로 품어준다. 기가영에게 할머니는 신과 같은 존재고, 할머니가 정해준 룰과 자신이 만든 루틴으로 기가영의 일상은 큰 탈 없이 굴러간다. 인격적 결함을 지녔으나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여 돈도 많은 기가영은 할머니의 우려와는 달리 할머니의 바람대로 나쁜 짓 한 번 하지 않고 번듯하게 살아간다. 그런 기가영에게 지니가 나타났고 지니는 그녀 또한 타락할 것을 장담하고 있다.


스스로 –1, 신발 속 돌멩이라 여기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이코’라며 손가락질도 받지만, 기가영은 그 모든 것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욕망하지 않았다. 흔히들 욕망하는 돈조차 기가영은 자기의 능력으로 쌓은 부(富)로 충분히 만족하는 듯했다. 그녀에게 부족한 건 오직 한 가지, 바로 감정, 보통의 인간성이다. 기가영이 아주아주 이기적인 소원이라며 지니에게 마지막으로 빈 소원은 ‘하루만 자신에게 온전한 인간성을 갖게 해 달라’는 거였다. 할머니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과 고통을 자기도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가영은 철저히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소원을 빌었지만, 지니는 결국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다. (오래전에 지니는 타락하지 않고 이타적인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그분과 약조한 바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두가 비난하고 경멸하는 사이코패스인 기가영이 오히려 멀쩡한 사람들보다 욕망하지 않고 이타적 소원을 비는 모습은 왠지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드라마에는 사탄인 지니와 그를 견제하는 천사가 나오는데, 자기 욕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의도치 않게 선행을 베푸는 순수한 모습의 지니와 자타공인 선행을 베풀며 날개를 단 천사가 그분의 명을 앞세워 지니의 목을 치려는 욕망에 휩싸인 위선적인 모습의 천사와 비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선이든 악이든, 우리는 모두 사탄이나 천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닐까? 불현듯 하늘 위에서 사탄과 천사가 치열하게 대적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건 어쩌면 우리 내면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선(천사)과 악(지니)의 갈등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어떤 것(천사는 선을 따르고 사탄은 악을 따른다)이 반드시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 이루어질지니>를 완주한 지금 내게 남은 한 단어는 바로 ‘욕망’이다. 드라마의 중심엔 인간의 욕망이 자리 잡고, 그 욕망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했다. 더불어 당장 전편을 다 보고 말겠다는 내 안에 욕망까지 이끌어냈다. 그것으로 욕망의 끝을 증명했다. 욕망의 끝은 결국 타락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것 이상을 얻고자 탐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 욕망을 잠재우는 일, 어느새 밀려드는 욕구를 적당히 조절하고 절제하는 일. 내 안의 사탄과 천사가 함께 공존함을 알고 오만하게 굴지 않는 일. 특히 언제나 매혹 그 자체인 지니를 제대로 길들이는 일이 우리 인간의 고유한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고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P.S

이 글을 쓰던 어느 날, 우연히도 아들은 제게 대뜸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지니가 나타나면 무슨 소원을 빌 거야?”

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되물었습니다.

“나는 우선 우리 가족 다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 거야. 다음엔 내게 행운을 많이 가져와 달라고 할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빌 거야.”

아들은 그 자리에서 거침없이 세 가지 소원을 모두 빌었어요.

'과연 아들이 이 소원을 다 이룬다면, 우리 아홉 살 아들도 타락하게 될까?

아들의 소원에는 얼마만큼의 욕망이 들어있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지니가 나타난다면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쓸데없이 진중한 편)


이 참에 독자님도 한 번 고민해 보시면 어떨까요?

(혹시 또 모르잖아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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