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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안에 고양이 1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하여

by 시 선


“딸아, 보리 어디 있니?”


‘엄마는 지금 보리 힐링이 필요해!’


보리는 자기 집도 있고 캣타워도 있지만 잘 곳을 딱히 고정하지 않는다. 때때마다 자기가 내키는 곳에서 잠을 자는 편이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니까 딱 한 곳에서만 잘 줄 알았던 건 나의 큰 오산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뻥 뚫린 거실 창 앞에 비싼 돈 들여 원목 캣타워를 설치했건만 보리는 처음 1년 정도만 열심히 쓰고는 지금은 거의 올라가 보지도 않는다.


보리는 딸의 이층 침대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딸의 겨울옷을 보관해 두는 박스 안에. 어떻게 된 건지 박스 뚜껑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딸의 노란색 카디건 위에 똬리를 틀고 발 하나를 삐쭉 내민 채 웅크려 자고 있던 모양이다. 아직 꺼내지도 않은 딸의 겨울옷들이 보리의 털로 뒤범벅이 되어 나는 제법 짜증이 날 만도 한데 그 내민 발 하나가 어찌나 귀여운지 사르르 내 마음을 녹인다.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딸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보리와 인사를 나누고 보리의 둥근 몸을 감싼다. 내 입은 보리가 내민 발을 맞추고 다시 코를 가져가 발 냄새를 훑는다. “꼬순내~ 꼬순내~” 하며 한 번 더 깊이 들여 마신다. 내가 봐도 참 이상하리만치 변태적이다. 꼬린내 나는 고양이 발을 그토록 사랑할 일인가 싶다. 이제 그 작고 귀여운 얼굴에 내 큰 얼굴을 붙인다. 고양이들은 대개 사람의 얼굴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데, 보리 역시 고개를 옆으로 젖혀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낸다. 가끔은 자기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올 때도 있고 황송하게도 핥아줄 때도 있긴 하다.


집사는 자기가 좋은 나머지 주인님이 싫든 말든 일단 들이댄다. 나도 모르게 고양이 얼굴에 사람 뽀뽀를 감행한다. 사람은 좋아하면 왜 입술이 먼저 가는 걸까. 보리가 그걸 알아주면 좋겠다며 공연한 생각을 한다. 보리 얼굴을 만진다. 어느새 시작된 보리의 *골골송이 내 심장마저 울린다. 보리는 눈을 감고 턱을 들어 올린다. 더 하라는 명(命)이시다. 지금 딱 느낌이 좋다는 뜻이다. 친한 고양이끼리 서로 핥아주는 것처럼 나는 보리의 이마, 눈꺼풀, 코, 입 주변, 턱, 목, 귀를 살살 긁기도 하며 문질러 준다. 집사의 능숙한 손길에 취한 보리는 더는 피할 도리가 없다. 세모난 얼굴을 내게 맡긴 채 계속하라는 듯 골골송은 더 크게 울려 퍼진다.


보리를 만지면 그냥 좋다! 마냥 부드럽고 따뜻해서 좋다! 보리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기꺼이 나를 받아주는 것 같아 마음이 절로 놓인다. 꼭 나를 다 알아주는 것만 같다. 내 닫힌 마음과 굳어 있던 감정이 모두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이다. 보리와 나 두 쫄보들이 이렇게 완전히 누군가에게 긴장을 풀기란 웬만해선 쉽지 않은데 그 순간만큼은 둘 다 그렇게 된다.


내게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런 다정한 순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


나는 눈을 감고 이 털북숭이 고양이에게 내 얼굴을 묻는다. 나보다 훨씬 훨씬 작은 녀석이라 내 이마 정도 겨우 가능한데 마음은 완전히 놓되 몸마저 놓아선 안 된다. 이 녀석은 당연하게도 내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녀석이 부담되지 않도록 나는 온 신경을 써서 버티고 앉아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어정쩡하고 불편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 품을 파고든다.


하이라이트는 다음 장면이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리 보리 사랑해”라고 말한다. 보리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마음을 다해 속삭인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고양이가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눈을 천천히 깜박이는 행동을 ‘고양이 눈 키스’라고 하는데, 이는 상대에게 공격 의사가 없음을 알리고 신뢰와 애정을 표현하는 신호이다) 나는 사람의 말과 고양이의 몸짓으로 내 사랑을 한껏 표현해 본다. 보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저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나의 보리 힐링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이제 침대 밑을 빠져나오는 내 모습은 왠지 더 우스울 것 같다. 그때 뒤돌아보면 녀석이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어쩌면 그 눈빛이 나를 다시 뒤돌아보게끔 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재채기가 나온다. 얼굴은 간지럽고 눈은 따갑다. 간혹 나타나는 보리 힐링의 부작용 혹은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얼른 화장실에 가 손을 닦고 눈을 씻고 얼굴에 붙은 보리의 털을 떼어내면 된다.


비염이 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이 있다 치더라도 보리 힐링을 자제하기란 웬만해선 어렵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지거나 어깨가 한없이 축 처지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특히 설거지하기 전에 나는 보리 힐링을 받고 싶어진다. 어딘가 자고 있을 고양이를 찾아 기어들어 가 스스로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설거지할 힘이 생긴다.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받는다. 다 괜찮다고 위안을 얻는다.


단순히 보리가 나를 받아주는 것으로,

우리가 서로 온기를 나누는 것으로,

함께 있는 그 순간만으로,

눈빛만으로.


보리와 나 사이에 말 이상의 어떤 것이 오고 감을 느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이런 순간들이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에는 곧잘 일어난다.

.

.

.


*골골송: 고양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성대 주변 근육이 진동해 나는 그르렁 소리로, 행복, 안정, 유대감, 스트레스 해소, 통증 완화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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