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린 어려도 너무 어렸고 몰라도 한참 몰랐다
선희: 마곡나루역 도착, 나 빨리 왔네^^;
희선: 서울식물원 들어갈 거지? 먼저 들어가. 11시 30분에 보자며, 뭐 이렇게 빨리 옴?
도착하고 보니 선희는 약속 시간보다 50분이나 먼저 왔다는 걸 알았다. 보통 약속 시간을 겨우 맞추거나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며 상대에게 미리 미안한 연락을 보내곤 했던 선희는 자신의 이 부지런함이 조금 낯설다. 익숙지 않은 기분인 거다. 그러나 왠지 기분 좋은 미소가 그녀 얼굴에 번진다.
마곡나루역은 아주 오랜만이다. 한때 이곳을 자주 들렀다. 선희가 서울식물원으로 식물을 배우러 다닐 때였다. 한참 식물에 빠져 식물 분류학과 나무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첫째가 10살이 되자 가능한 일이었다. 선희의 모든 시간은 아이들에게 맞춰 있었는데 그해 처음으로 딸의 귀가 시간과 겹치는 것을 감안하고도 딸에게 양해를 구해 큰마음먹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왕복 2시간을 할애했더랬다. 무더운 여름날 마스크를 끼고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섰던 찰나, 코로나가 들끓어 가정 돌봄으로 그 꿈은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이제 첫째는 혼자서도 잘 있는 13살이 되었고, 마스크도 식물을 향한 꿈도 완전히 벗어난 후였다.
선희는 13년 차 전업주부다. 하루 중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데, 그렇다고 온종일 집안일만 하는 것도 아닌데, 바로 그렇기에 집이 편하지만 않다. 선희에게 집은 일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으며 쉰다 해도 아이를 위한 대기시간이나 다음 할 일을 위한 징검다리 같은 것이지 온전히 그녀의 시간이 아님을 알았다. 스스로 할 일을 코앞에 두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그런 선희에게 오늘 희선과의 약속은 너무도 특별하다.
“희선아, 너 마곡나루역으로 올 거지?
그럼 우리 만나서 같이 들어가자.
나 식물원 방문자센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희선은 그녀의 오랜 친구다. 둘은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같은 방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다. 4명이 함께 지냈는데 기숙사 문을 열면 방은 딱 반으로 갈라졌다. 양쪽 벽을 따라 2층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책상과 락커 두 개씩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왼쪽은 언제 봐도 깔끔하고 반듯한 반면, 오른쪽은 언제 봐도 지저분하고 정신이 없었다. 이불은 구겨져 있고 책상 위는 책과 가방 먹다 만 과자 봉지 갈아입은 옷가지에 이어폰 줄까지 뒤엉켜있고, 두 락커 문 중 하나는 꼭 헤벌레 열려있곤 했다. 유감스럽게도 선희와 희선이 오른쪽 애들이었다. 그 정신없는 둘이 번갈아 가며 제일 늦게 일어나고 밥도 느리게 먹고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시간도 비슷해 자주 마주쳤다. 이름도 순서만 바꿔 같은 한자를 썼다. 아마 그때 이미 서로를 알아봤을 것이다. 나랑 비슷한 것 같은 느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 그냥 쟤랑 잘 통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적인 느낌으로’ 둘은 벌써 24년 지기 친구다.
선희와 희선은 기숙사를 나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며 대학을 졸업했고 각자의 길을 가다 27살에 다시 만났다. 포부가 컸던 건지 낭만에 눈이 멀었는지 서울에서 한강이 보이는 제일 낡은 아파트를 구해 동거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때 둘은 참 어려도 너무 어렸고 몰라도 한참 몰랐다. 선희가 결혼하기 전까지 그렇게 쭉 같이 살았다. 선희는 희선의 살냄새를 기억한다. 희선 특유의 그 냄새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왕구리 NO. 5’라는 애칭을 붙여가며 좋아했다. 가끔 ‘왕구리 NO. 5’가 생각났다.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희선과의 추억을 따라 선희의 지난날도 함께. 뭣도 모르고 꿈꾸고 열정만 가득했던 철없던 그 어린 시절을 말이다. 선희는 희선을 기다리며 그 모든 걸 회상한다.
희선은 현재 서울시청에서 일하는 6급 공무원이다. 언제나 바쁜 가운데 1년에 두 번, 상반기에 선희의 생일과 하반기에 자신의 생일 때 월차를 쓴다. 둘은 생일을 핑계로 얼굴을 본다. 서로 평소 카톡이나 전화 연락은 잘 안 한다. 둘 다 그런 쪽으로는 무심한 편이다. 다른 친구라면 서운할 일도 둘은 웬만하면 그냥 이해하고 넘긴다. 피차 비슷하기 때문일 거다.
희선이 마곡나루역이라는 연락을 받고 선희는 방문자센터를 나선다. 간밤에 내린 폭설로 서울식물원에 들어가는 길은 온통 하얀 세상이다. 어느새 햇볕에 녹은 눈이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눈을 털어낸 나뭇잎들은 보란 듯이 아직 빨갛고 노랗게 화려한 빛깔을 자랑했고 중간중간 우듬지가 한쪽으로 휘어진 나무도 보였다. 휘어지면 휘어진 채로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희선이 걸어온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늦게나 도착했다. 그녀는 오늘 녹색 어머니로서 딸의 학교 아이들의 등굣길을 안전하게 도와주고 오는 길이었다. 하필이면 11월 들어 가장 추운 오늘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계열로 입은 희선이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선희는 그녀를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먼저 알아본 희선이 모자를 벗자 까만 형체 위로 드러난 얼굴이 익숙하여 반갑다. 희선은 밤새 내린 눈 때문에 녹색 어머니의 깃발이 그 어느 때보다 그 힘을 발휘했다며 뿌듯해했다. 추운 줄도 모르고 기뻐하는 그녀였다.
둘은 곧바로 자박자박 눈길을 걸어 서울식물원 입구로 향했다. 오늘은 희선의 생일을 축하할 겸 1년에 두 번째 만나는 날이었고 서울식물원에 가기로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희선은 갑자기 배고프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선희도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실내 방문자센터에서 기다렸다지만 이 추위에 어쩔 수없이 따뜻한 국물과 밥이 당긴다. 그래도 둘은 서울식물원에 가려고 여기 마곡까지 왔다는 걸 잊지 않았다. 입구에 다 왔다. 이제 표만 끊으면 되는데, 배고 고파서 도저히 식물을 구경할 수 없겠다며 핑계를 댄다. 그래. 우선 배부터 채우고 보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 둘 다 타협이 너무도 쉬운 타입이다.
“점심 먹고 다시 오자.
일단 먹고 식물원에 가자.”
“정말?
우리 다시 오는 거지?
오늘 식물원 가는 거지?
우리 식물원 안 갈 것 같은데…?”
둘은 그저 웃는다. 밥을 먹고 식물원으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따뜻한 국물과 밥을 먹으면 다시 뜨겁고 향기로운 커피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선희는 희선의 팔짱을 낀다. 찬 바람이 세게 불어 마스크를 꺼내 쓰고 밥집을 찾아갈 것이다. 앞에 신호등이 17초가 남았다. 선희는 우리가 건널 수 있을까를 묻지만, 희선은 벌써 뛰고 있다. 선희는 희선을 따라 내 달음 친다. 1초를 남기고 건널목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건널목 뒤로 서울식물원과 하얀 눈과 노랗고 빨간 나무들이 반짝반짝 일렁인다. 꼭 ‘잘 가’하고 인사하는 것만 같다.
선희는 문득 식물원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생각한다. 지금 여기 희선과 함께 있다는 것. 만나서 지난 세월을 나누고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 거라는 것. 그러려고 여기 마곡까지 왔다는 것을 떠올린다. 선희도 기꺼운 인사를 전한다. 서울식물원과 하얀 눈과 노랗고 빨간 나무들에게.
"만나서 반가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