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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청 담그는 일

오래 묵은 햇살과 바람이 밤사이 새어 나오기라도 한 듯

by 시 선


모과가 이렇게 단단한 과일인지 몰랐다. 그저 노랗고 향이 좋은 줄만 알았다. 추운 겨울 모과가 감기에 좋다는 것도 얼핏 알고는 있었다. 언젠가 따뜻한 모과차를 마셔본 적이 있다.

어제 아들이 밖에서 모과를 주워 왔다. 한 5개쯤 되는 것 같다. 아들은 전화로 대뜸 “엄마, 모과 주워 갈까?”하고 물었다.


지난 주말엔 아들과 아파트 단지 안을 산책했다. 점심을 푸지게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아이들과 걷고 싶었다. 사춘기 딸은 먼저 집으로 들어갔고, 남편과 나는 양쪽에서 아들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들아, 너 혼자 엄마 아빠 손잡고 다니니까 꼭 외동아들이 된 것 같지 않니? 엄마 아빠 사랑 듬뿍 받고 말이야!”

독차지한 사랑이 어색한 걸까, 아들은 딴소리만 했다.


우리 아파트에는 나무가 참 많다. 특히 단지를 따라 난 둘레길은 여느 공원 못지않게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우리는 그 길로 향했다. 1m 정도 폭의 길이 셋이 나란히 걷기 적당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저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화려한 잎사귀들을 자랑했다. 꼭 우리가 내딛는 걸음보다 한 발 앞서 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밟으면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아들 얼굴보다 더 큰 낙엽도 주웠다. 길가에 낙엽을 담다 만 큰 자루와 빗자루가 있어 쓱쓱 낙엽 쓰는 시늉을 했다. 어설픈 나의 비질을 보더니 남편은 긴 빗자루를 잡고 쓰는 법을 직접 시범을 보이며 알려줬다. 아들은 아빠를 따라 놀이하듯 낙엽을 한 곳으로 모았다.


“단풍놀이를 따로 갈 필요가 없다니까!”

남편의 말에 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바람이 꽤 차가웠다. 점점 세게 불었다. 아들이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는 입고 있던 꽃무늬 누빔 잠바를 벗어 아들에게 입혀 줬다. 내게도 큼지막한 그걸 아들이 걸치니 무슨 꽃무늬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까지 내려와 다소 불편할 텐데도 아들은 왠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아들아, 따뜻하지?”

내겐 너무나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아들을 잠바로 꼭 싸매 내 옆에 딱 붙여서 걸었다.


순간 모과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에는 모과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입주한 지 얼마 안 돼 딸의 친구 삼 남매와 바구니 한가득 모과를 주워 담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아들아, 이 모과나무 좀 봐. 모과가 저렇게나 많이 달렸네. 너 혹시 기억나니? 어렸을 때 누나랑 강빈이 형 민이 형 은이 누나 손나 이모랑 여기서 모과 주웠었잖아. 현관 앞에 두고 한동안 감상했었는데, 그때 모과 향이 정말 좋았었어!”


아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지 강아지 같은 얼굴을 갸우뚱거렸다. 모과나무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혹시 떨어진 모과가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아직 모과 떨어질 때가 아닌가 봐.”





밖에서 놀다 들어온 아들은 득의양양하게 식탁 앞에 섰다. 오자마자 가방에서 모과를 하나씩 꺼내 보였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조금씩 다 달랐다. 흠집 없이 깨끗하고 예쁘지 않다는 것만 같다. 때가 되어 나무에서 절로 떨어져 상처가 나 있기 마련이었다. 손이 닿지도 않는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했을 모과들. 툭 떨어져 한번은 땅에 부딪혀 튀어 올랐을 그리고 여러 번 데굴데굴 굴렀을, 그러다 날카로운 돌에 부딪혀 찢겼을, 어쩌면 새들이 쪼다 말았을 그 흠집들이 어떤 무늬처럼 그려져 있었다.

“아들아, 엄마가 이걸로 모과청 만들어 줄게, 겨울 동안 다 같이 모과차 마시자.”

갑자기 이 말이 튀어나왔다. 어쩔 도리 없이 엄마는 아들에게 감동하고 말았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온 집안이 은은히 모과 향으로 가득했다. 아들이 주워 온 건 모과만이 아니었다. 모과 속에 품고 있던 오래 묵은 햇살과 바람이 밤사이 새어 나오기라도 한 듯 집안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한껏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제는 내가 아들에게 보답할 차례다. 모과차를 마시려면 먼저 모과청을 만들어야 한다. 모과청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선, 유리병을 열탕 소독하고 말려둔다. 모과는 베이킹소다와 굵은소금으로 박박 긁어 이중 세척 하고 깨끗한 물로 헹궈 물기를 제거한다. 그리고 모과를 껍질째 얇게 썰고 채를 쳐 설탕과 1:1 비율로 섞은 후 유리병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설탕을 듬뿍 덮어 밀폐한 다음 2주간 숙성시키면 된다.


모과를 늘 눈으로만 봤지, 직접 다뤄보는 건 처음이었다. 모과 껍질은 왁스를 얇게 바른 것처럼 광이 돌지만 만져보면 매끈한 듯하면서도 투박했다. 울퉁불퉁한 생김새가 왠지 정이 간다. 막상 들어보면 딱딱하고 묵직하긴 했다.

모과를 자르려는데, 그 안에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대충 사과를 떠올리며 칼을 댔다. 그런데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라? 한 번 더 힘을 줬지만 무리였다. 칼을 큰 것으로 바꾸자 겨우 모과에 꽂을 수 있었다. 앞뒤로 밀면서 조금씩 잘랐다. 모과 과육이 이토록 단단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한쪽을 자르고 다른 쪽도 자르다가 씨까지 베어버렸다. 모과씨를 처음 봤다. 씨방 안에 작은 붉은 고동색 씨앗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나무는 대개 이 씨앗으로 번식한다. 열매를 맺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 씨앗을 보호하고 퍼뜨리기 위함이다. 나무는 맛있는 열매를 내어주고 새나 동물이 열매를 먹고 다른 데서 배출해 주거나, 털에 붙어서 멀리멀리 이동시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과는 그 빛과 향으로 새와 동물을 유혹하기 충분하다. 그런데 과육이 이렇게 단단하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지금껏 어떤 새와 동물이 모과의 번식을 도울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까지 하다.

모과를 하나 채치고 나니 손목이 나가는 것 같다. 그만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안 할 수가 없다. 엄마의 이 노고를 알아줄까 엄살을 부려 보지만, 엄마는 결국 해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들에 대한 사랑이자 고마움의 표시이자 참된 가정교육이 될 것이었다. 꾸역꾸역 3개를 마칠 때쯤 남편이 저녁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나보다 힘이 좋을 남편에게 슬며시 모과를 넘겼다. 남편 역시 처음엔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힘껏 자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얇게 슬라이스 하라고 잔소리할라치면 ‘그럴 거면 네가 하라’는 식으로 대응하면서도 남편이 끝까지 마무리를 했다. 자기가 제일 큰 모과를 잘랐다며 생색을 냈다. 어느새 남편의 손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과 다섯 개를 다 자르니 양이 꽤 많다. 거의 1kg이나 된다. 두 차례로 나눠 채 썬 모과와 설탕을 골고루 버무린다. 벌써 단내가 향긋하다. 이제 유리병에 담아 실내에서 2주 숙성하면 된다. 그리고 냉장고에 보관해 겨울 내내 모과차를 즐기면 된다. 따뜻한 물에 이 모과 청을 적당히 섞어 마시면 될 것이다. 아들은 언제 모과차를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보기 바빠 연실 주방을 왔다 갔다 한다. 2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몇 번을 일러줬건만 아들은 재차 물어온다.

“잰 남 말을 귀담아 안 듣는다니까.”


모과를 집게로 집어 유리병에 쏙쏙 넣는다. 잘 담아지지 않아 모과를 수저로 눌러가며 차곡차곡 쌓는다. 끝으로 맨 위에 설탕만 듬뿍 더 얹는다. 이렇게 4병을 꽉 채워 담았다.

시작할 때만 해도 단단한 모과에 놀라 과연 모과청을 완성할 수 있을까 망설였는데, 결국엔 해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남은 건 2주를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달력에 ‘모과차 마시는 날’을 표시한다. 다들 아들 못지않게 그날을 고대할 것이다.

문득, 우리는 ‘2주 뒤’ 같은 날을 기약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틀림없이 도래하는 그날이 오늘을 설레게 하고 내일을 기대하게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 그날이 오고야 만다. 알고 보면 모과청 담그는 일은 우리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다.

2주 뒤,

따뜻하고 향긋한 모과차 마시는 우리를 상상한다.

흩날리는 첫눈과 함께라면 더없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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