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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14화

정의의 저울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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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양쪽 다 일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가? 정의를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그 진부한 결론을.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균형을 맞춰야 한다", "절충안을 찾아보자."

이 모든 말들의 배후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있다. 정의란 저울과 같아서, 양쪽에 무게를 재어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비유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 정치철학과 윤리학에서 정의는 주로 세 가지 갈등 구조로 논의된다.

첫째, 절차적 정의와 결과적 정의의 대립이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공정한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 절차가 때로 불평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딜레마를 인정했다. 둘째,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긴장이다. 로버트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와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셋째,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 중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이러한 딜레마들은 모두 저울의 비유에 기반한다. 한쪽에는 A, 다른 쪽에는 B를 놓고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어떻게 균형을 맞출지를 고민하는 구조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자체에 근본적 한계가 있지 않을까?



첫째, "공정한 절차를 따랐지만 불공정한 결과가 나왔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이 명제가 성립하려면 절차와 결과가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진정한 공정성이란 과정과 결과를 통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일관되게 불공정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절차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개별 사건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시스템 차원에서는 결과가 절차의 진정한 공정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현실에서는 완벽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가용한 정보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과를 통해 우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것은 딜레마가 아니라 학습 과정이다.


둘째, 개인과 사회를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존재로 보는 관점을 재검토해보자. 이러한 관점은 개인을 사회와 분리된 원자적 존재로 전제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다.

생물학적 비유를 들어보자. 인체에서 각 기관은 고유한 기능을 가지면서도 전체의 건강을 위해 협력한다. 심장이 "개인의 자유"를 내세워 혈액 공급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개체 전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악성 종양이나 기능 장애도 있다. 부패한 권력이나 사회 병리 현상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건강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 아니라,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봐야 한다. 이를 개인 대 사회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셋째,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응보와 회복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정의를 특정한 행위나 결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는 그 자체로 행위가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다. 정의롭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다. 응보적 접근이든 회복적 접근이든, 이들은 모두 그 판단에 따른 구체적 방법론일 뿐이다.

상황에 따라 때로는 엄정한 처벌이, 때로는 화해와 회복이 정의로운 선택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론을 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 상황에서 옳은 것인가를 명확히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위 '정의의 딜레마'라는 것들 중 상당수가 잘못 설정된 문제들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대립을 만들어내고, 그 허상의 갈등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진정한 정의는 복잡한 저울질이 아니라 명확한 판단이다. 그 판단은 때로 어려울 수 있고,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매함과 상대주의로 도피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것도, 예수가 보여준 것도, 붓다가 깨달은 것도 결국 명확함이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며 회피하지 않았다.


정의를 저울이 아니라 나침반으로 생각해보자. 나침반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 방향을 가리킬 뿐이다. 그 방향이 때로는 험난한 길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외로운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나침반은 무엇을 기준으로 방향을 가리키는가?

첫째, 인간 존엄성이라는 자북이다. 모든 인간이 단순히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 예수가 십자가를 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둘째, 약자 보호라는 자침이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밟는 것을 막는 것이다. 붓다가 카스트 제도를 거부했던 이유, 링컨이 노예제 폐지를 위해 내전도 불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결과에 대한 합리적 예측이라는 나침반 눈금이다. 어떤 판단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냉철하게 계산하는 것이다.

이제 저울의 역할은 명확해진다.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킨 후, 그 길을 가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측정하는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다. 저울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혐오 발언 처벌 문제를 생각해보자. 저울 접근법이라면 "표현의 자유 vs 피해자 보호"의 균형점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나침반 접근법은 다르다. 먼저 묻는다.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발언을 방치하는 것이 옳은가?" 답이 "아니다"라면, 그 다음에야 저울을 꺼내어 적절한 처벌 수위를 고민한다.

세금 정책도 마찬가지다. "부자 증세 vs 경제 성장"이라는 저울질 대신, "현재의 불평등이 인간 존엄성과 사회 안정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다. 방향이 정해진 후에야 구체적 세율을 계산한다.

법정에서 판사는 "양쪽 다 일리가 있으니 절반씩 나누자"고 하지 않는다. 증거와 법리에 따라 명확한 판결을 내린다. 의사는 "암세포도 몸의 일부니까 보존하자"고 하지 않는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치료를 한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상황의 복잡함을 인정하되, 그것을 핑계로 명확한 판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복잡할수록 더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2천 년이 넘는 서구 철학사에서 정의에 대한 논의는 점점 복잡해져 왔다. 하지만 복잡함이 항상 깊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단순함 속에 더 깊은 진실이 있다.

우리는 '균형'이라는 미명 아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책임을 회피해왔다. 하지만 정의는 양쪽의 무게를 재는 복잡한 저울질이 아니라, 모든 혼란을 뚫고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가?"

그 질문 앞에서 많은 가짜 딜레마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명확하고 실천 가능한 길이다.

정의는 저울이 아니라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을 따라 걸어가는 용기야말로, 진정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다.


(이미지 출처 https://ecofile.kr/24/?bmode=view&idx=16018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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