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노답론 13화

영원의 회귀

by 레옹
d025fafd9afe24d6e96795916800cdf1.jpg

프리드리히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1절에서 하나의 가정을 제시한다: "만약 어떤 악마가 어느 날 밤 당신의 가장 적적한 고독 속으로 몰래 들어와서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이 지금 살고 있고 살아온 이 삶을, 당신은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많이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같은 기쁨과 고통, 같은 선택과 후회, 심지어 이 순간 이 글을 읽는 행위까지도 영원히 되풀이되어야 한다면? 니체는 이를 "가장 무거운 추(das grösste Schwergewicht)"라고 명명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이를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간다, 모든 것이 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이 사상적 실험은 단순한 철학적 유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혁명적 관점의 출발점이다.

영원의 회귀(Ewige Wiederkunft)는 표면적으로는 절망적 숙명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체의 진정한 의도는 정반대였다. 이는 인간을 신의 그림자에서 해방시키고, 삶에 대한 궁극적 긍정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철학적 도구였던 것이다.


영원의 회귀 개념은 니체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시간의 순환성에 매혹되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우주가 주기적으로 소멸과 재생을 반복한다고 믿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순환 속에서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보았다.

힌두교의 칼파(Kalpa) 개념에서도 우주는 무한한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겪는다. 불교의 윤회사상 역시 존재의 반복적 순환구조를 전제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고전적 순환 사상들이 니체에게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니체의 영원의 회귀는 이전의 모든 순환론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고대의 순환론이 대개 우주적 필연성이나 신적 섭리를 전제했다면, 니체의 회귀는 철저히 인간중심적이며 실존적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교리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 즉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


19세기 유럽은 급진적 전환기였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며 전통적 종교관이 해체되고,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니체는 이 시대를 "신의 죽음"으로 진단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믿음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와 의미의 근거가 상실된 상황을 가리킨다.

신이 죽은 세계에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허무주의(니힐리즘)에 빠져 절망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가치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니체는 후자의 길을 택했고, 영원의 회귀는 바로 이 가치창조의 핵심 도구가 된다.

전통적 종교에서 삶의 의미는 내세나 영원한 구원에서 찾아졌다. 현재의 고통은 미래의 보상으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영원의 회귀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러한 초월적 위안은 불가능해진다. 삶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야 하며, 현재 순간의 가치는 미래의 보상이 아닌 그 자체의 긍정에서 찾아져야 한다.


니체가 제시한 영원의 회귀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운명애다. 아무것도 다르게 원하지 말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 전체에 걸쳐서도."

이는 단순한 체념이나 수동적 수용이 아니다. 운명애는 자신의 삶 전체를, 고통과 기쁨을 포함한 모든 순간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사랑하는 태도다. 독일의 니체 연구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를 "실존적 자기긍정의 극한 형태"라고 분석했다.

여기서 핵심은 "선택적 긍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영원의 회귀에서는 삶의 일부만을 선택할 수 없다. 행복한 순간만 반복되기를 원할 수는 없으며, 고통스러운 기억만 지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다. 따라서 진정한 긍정은 전체적 긍정, 무조건적 긍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전체적 긍정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최대의 자유를 부여한다. 외부의 권위나 초월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삶을 긍정할 때,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의 핵심이다.


영원의 회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를 니체는 "초인(Übermensch)"이라고 불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다."

초인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새로운 종족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전환된 인간상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라고 해석했다. 초인은 더 이상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형성해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 개념이다. 이는 정치적 지배나 물리적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의 니체 연구자 월터 카우프만의 분석에 따르면, 권력에의 의지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시키려는 근본적 충동, 창조와 형성에 대한 의지다. 영원의 회귀를 긍정할 수 있는 힘도 바로 이 권력에의 의지에서 나온다.

초인은 영원의 회귀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존재다. 이는 단순한 반복에 대한 수용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적극적 긍정과 창조적 의지의 표현이다. 매 순간을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초인의 삶의 태도다.


20세기에 들어 영원의 회귀는 새로운 해석을 받게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의 사상을 인간 실존의 근본 조건에 대한 통찰로 받아들였다.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나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개념은 모두 영원의 회귀가 제기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도 영원의 회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무의식 속에서 반복되는 원형(archetype)들, 그리고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에서 겪는 순환적 경험들은 영원의 회귀와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현대 심리치료에서도 "자기 수용"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니체의 운명애와 깊은 연관이 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태도는 정신건강의 핵심 요소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영원의 회귀 사상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이것이 논리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가정이라는 점이다. 과학적 세계관에서 볼 때 무한한 시간과 유한한 물질의 조합으로부터 동일한 상황의 반복을 연역하는 니체의 논리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다. 영원의 회귀를 받아들인다면 도덕적 개선의 동기가 약화될 수 있다는 비판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반복된다면 악한 행동도 결국 용인되는 것 아닌가? 독일의 철학자 칼 뢰비트(Karl Löwith)는 이를 "숙명론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했으며, 영국의 윤리학자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영원의 회귀가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을 오히려 마비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니체 철학 내에서는 더욱 정교한 반박이 가능하다.

첫째, 도덕적 개선의 동기 약화 문제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논리가 성립한다. 만약 내가 지금 내리는 악한 선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무한히 증가한다. 한 번의 실수가 영원한 실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

둘째, 니체의 권력의지 개념과 연결해보면, 영원의 회귀는 자기극복의 의지를 극대화하는 장치다. 현재의 자신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자신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지적했듯이, 영원의 회귀는 "존재의 의지"를 최고조로 긴장시키는 사상적 도구인 것이다.

셋째, 숙명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가 답을 제공한다. 이는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능동적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이 분석했듯이, 니체에게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영원의 회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체 자신도 이를 문자 그대로의 우주론적 사실이 아니라 "사상적 실험"으로 제시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실제 반복 여부가 아니라, 그러한 가능성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영원의 회귀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는 결코 추상적인 철학적 사변에 그치지 않는다. 매일의 선택과 행동에서 실천될 수 있는 삶의 원리다.

첫째, 영원의 회귀는 현재 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준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 순간을 더욱 진지하게 대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과거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책임감의 무게가 달라진다. 내가 지금 내리는 선택과 행동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영원히 져야 한다. 이는 경솔한 결정을 방지하고, 더욱 신중하고 진정성 있는 삶을 살도록 촉진한다.

셋째, 타인에 대한 관계도 새로운 차원을 갖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가 무한히 반복된다면, 그 행위의 의미와 무게는 전혀 달라진다. 이는 더욱 깊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추구하게 만든다.


니체에게 삶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영원의 회귀는 이러한 삶의 미학적 관점을 극대화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지듯이,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다. 니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타일을 주는 것"을 위대한 예술이라고 했다. 영원의 회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스타일로 형성해나간다. 모순과 갈등, 고통과 기쁨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적 조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창조적 삶은 기존의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기대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대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고, 그에 따라 일관된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의 구체적 모습이다.


21세기 현재, 영원의 회귀 사상은 새로운 현실성을 갖는다. 글로벌화와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반복성과 무의미함을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종종 "쳇바퀴 도는 삶"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의 회귀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반복 자체가 아니라 그 반복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영원의 회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일상의 반복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매일의 루틴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 루틴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습관적으로 행하던 일들도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


영원의 회귀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 모든 것의 종료로 여겨졌다. 하지만 영원의 회귀에서 죽음은 새로운 시작의 전주곡이 된다. 죽음 후에는 다시 탄생이 이어지고, 같은 삶이 반복된다.

이러한 관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이는 동시에, 삶에 대한 책임감을 증대시킨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할 때와 달리, 모든 행위와 선택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더욱 신중해진다.

또한 영원의 회귀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선형적 시간관에서 벗어나 순환적 시간을 체험할 때, 우리는 영원성을 현재 순간에서 느낄 수 있게 된다. 매 순간이 영원의 축약이자 표현이 되는 것이다.


영원의 회귀는 처음에는 절망적이고 무거운 사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최대의 자유를 얻게 된다. 외부의 권위나 초월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이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기존 가치관의 전복, 그리고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 즉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니체의 영원의 회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도전이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창조하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영원의 회귀는 이 모든 실존적 과제들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완벽한 해답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를 더 깊은 사유와 더 진실한 삶으로 이끄는 강력한 사상적 도구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영원의 회귀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것인지 여부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해봄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다. "만약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이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결국 영원의 회귀란, 신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신이 되는 길이자,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운명을 창조하는 의지의 승리다. 니체가 우리에게 던진 이 "가장 무거운 추" 앞에서 굽히지 않고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자유의 모습인 것이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2화꿈 속의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