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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11화

기게스의 반지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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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어난 일이다. 평소 모범적이던 한 대학생이 익명성에 기댄 채 동급생들의 사생활을 악의적으로 폭로하고 조롱했다. 신원이 밝혀지자 그는 "평소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절망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짜 그였을까? 2400년 전 플라톤이 던진 질문이 디지털 시대에 다시 살아난 순간이었다.

양치기 기게스가 마법의 반지로 투명해져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살해했다는 이야기. 이 고전적 사상실험이 오늘날에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단순한 도덕 판단을 넘어서 인간 본성의 가장 은밀한 진실을 파헤치기 때문이다. 기게스의 반지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어온 선과 정의는 진짜일까,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정교한 환상일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아라", "정직하라", "남을 도우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왜 모든 사회가, 모든 부모가, 모든 교육기관이 그토록 열심히 이런 가치들을 '가르쳐야' 할까? 만약 선과 정의가 인간의 본성이라면, 굳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체계적으로 학습시킬 필요가 있을까?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6개월 된 아기도 도움을 주는 인형과 방해하는 인형 중 도움을 주는 인형을 선호한다. 이를 근거로 도덕성이 타고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기가 선호하는 것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대상이다. 이는 도덕적 직관이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것을 식별하는 진화적 능력의 발현이다.

실제로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구체적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사회적 맥락에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에 대한 절대 복종이 최고의 덕목이었지만, 현대에는 개인의 자율성이 더 중시된다.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적 정의가, 동양 사회에서는 집단주의적 정의가 강조된다. 만약 정의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면, 이런 차이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진실은 이렇다. 우리가 정의라고 믿는 것들은 특정 사회가 집단 생존과 질서 유지를 위해 개인에게 체계적으로 프로그래밍한 행동 규범이다. 이는 조작이나 억압이 아니라, 수천 년간 인류가 발견한 집단 생존의 정교한 지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학습된 규범을 마치 천부적 진리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게스의 반지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투명해지는 마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반지를 끼는 순간 기게스는 더 이상 '리디아 왕국의 신하', '동료 양치기들과 관계 맺는 사회인', '평판을 관리해야 하는 개인'이 아니다. 그는 순수한 개체로 돌아간다.

이런 상태에서 그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플라톤 시대에는 이를 설명할 과학적 도구가 없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안다. 그것은 수백만 년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에 각인된 생물학적 프로그램들이다.

생존을 위한 자원 확보 욕구, 번식을 위한 성적 충동, 위험으로부터의 도피 반응, 사회적 위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려는 지배욕. 이런 것들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내장된 '하드웨어'다. 신생아가 젖을 찾고, 유아가 애착 대상을 추구하고, 청소년이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으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게스가 왕비와 간통한 것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번식 성공을 위한 진화적 프로그램의 발현이다. 가장 매력적이고 지위 높은 여성과의 교배는 생물학적으로 최적의 선택이다.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 역시 자원과 권력을 독점하려는 지배욕의 표출이다. 사회적 제재가 없다면 이보다 효율적인 전략은 없다.

충격적이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사회적 감시와 처벌의 위험이 제거되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학습된 도덕이 아니라 진화가 새겨놓은 원시적 욕망들이다.


이론적 추론만으로는 부족하다면, 현실의 증거들을 보자.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권력을 가진 독재자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놀라운 패턴이 발견된다. 로마 황제 칼리굴라는 근친상간을 저질렀고, 스탈린은 수백만 명을 학살했으며, 현대의 독재자들은 예외 없이 권력을 이용해 성적 쾌락과 물질적 탐욕을 무제한 추구한다. 이들이 원래 악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이들은 절대권력이라는 '현실의 기게스 반지'를 얻은 순간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해진 것뿐이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익명성도 마찬가지다. 평소 점잖던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악플을 달고,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2021년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익명성이 보장될 때 사람들의 공격성은 평균 340% 증가한다. 이는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사회적 제재에서 벗어난 순간 나타나는 본능적 반응이다.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평범한 시민들이 약탈과 폭력을 저지른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물론 일본은 상대적으로 질서를 유지했지만), 평소의 도덕적 규범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도덕과 정의는 완전히 무의미한 허상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도덕적 규범들이 사회적 학습의 산물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가장 위대한 성취를 보여준다.

생각해보라. 각자의 생물학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개체들의 집합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무제한적 성적 경쟁은 사회를 파괴하고, 끝없는 자원 쟁탈은 공멸로 이어진다.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달리 거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개체의 즉각적 욕망을 집단의 장기적 이익에 맞춰 조율하는 시스템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성적 질투와 경쟁을 최소화하여 사회적 안정성을 확보한다. 사유재산제는 약탈 충동을 억제하고 생산적 활동을 장려한다. 진실 말하기는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고 정보 공유를 원활하게 한다. 이런 규범들은 개인의 생물학적 욕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더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충족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기술'이다.

도덕과 정의는 인간의 생물학적 하드웨어 위에서 작동하는 문명의 소프트웨어다. 이 소프트웨어가 잘 작동할 때 개인은 자신의 욕구를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실현하고, 동시에 집단은 모든 구성원의 협력을 통해 더 큰 번영을 이룬다.


오늘날 우리는 플라톤이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의 '기게스의 반지'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익명성, 암호화폐의 추적 불가능성, 가상현실의 대리만족, 인공지능이 만든 딥페이크까지. 현대 기술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수준의 사회적 연결 차단과 책임 회피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결과는 어떤가? 사이버 불링, 온라인 사기, 디지털 성범죄, 가짜뉴스의 확산. 이런 현상들은 단순한 기술의 부작용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 새로운 환경에서 발현되는 필연적 결과다. 우리의 뇌는 여전히 수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 적응된 상태인데, 디지털 기술은 그 뇌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그 충돌의 결과가 바로 현대 사회의 도덕적 혼란이다.

하지만 이는 절망적 상황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더 효과적인 사회적 조율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들이 가능할까?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와 행동을 투명하게 기록함으로써 '사회적 감시'를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직자의 모든 재정 거래가 블록체인에 기록된다면 부패의 여지는 현저히 줄어든다. AI 행동 분석은 개인의 디지털 발자국을 분석해 반사회적 행동의 징후를 조기에 발견하고, 맞춤형 도덕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이미 일부 플랫폼에서는 AI가 혐오 발언을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경고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게임화(Gamification) 기술은 인간의 경쟁 욕구와 보상 추구 본능을 도덕적 행동으로 유도한다.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이 논란이 많지만, 선행을 점수화하고 보상하는 시스템 자체는 흥미로운 실험이다. 더 민주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설계된다면, 개인의 이기적 동기를 사회적 선으로 연결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가상현실(VR) 기술은 극단적 상황을 안전하게 체험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시뮬레이션 훈련을 가능하게 한다. 의사가 VR로 수술을 연습하듯, 일반인도 VR로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반복 경험하며 올바른 판단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VR에서 다른 인종의 아바타로 생활한 사람들의 편견이 현실에서도 현저히 줄어든다고 한다.

이런 기술들은 모두 강제나 처벌이 아닌,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스마트한 도덕 기술'이다.


기게스의 반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은 불편하다. 우리가 선하다고 믿었던 것들 중 상당수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며, 그 학습이 무력화되면 우리 안의 원시적 욕망들이 고개를 든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이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의 시작이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도, 악하게 태어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복잡한 생물학적 프로그램과 사회적 학습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이 이해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첫째, 겸손이다. 우리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만해서는 안 된다. 적절한 상황과 조건이 주어지면 누구나 기게스가 될 수 있다. 이는 타인의 실수와 범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경계심을 갖게 해준다.

둘째, 가능성이다. 인간의 행동이 고정된 본성의 결과가 아니라 환경과 학습의 산물이라면, 더 나은 환경과 시스템을 설계함으로써 더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의지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접근을 통해 집단적 도덕성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게스의 반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답해야 한다. "나는 생물학적 욕망과 사회적 지혜가 만나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해가는 존재다." 이 창조의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더 성숙해지고, 사회로서 더 현명해질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2400년 전 플라톤이 던진 질문에 대한 21세기의 답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pxfuel.com/ko/desktop-wallpaper-ssg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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