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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09화

도덕의 행운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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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평소보다 10분 늦게 집을 나선 어느 월요일 아침을 상상해보자. 지하철을 놓쳐 급하게 택시를 탔고,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한다. 운전기사에게 "조금만 빨리 가주세요"라고 부탁한 것이다. 기사는 당신의 다급함을 알아차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속도를 낸다. 그리고 그 '조금'이 모든 것을 바꾼다.

첫 번째 시나리오: 당신은 무사히 회사에 도착하고, 그날을 평범하게 보낸다. 택시 기사도, 당신도, 그 누구도 그 아침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두 번째 시나리오: 같은 상황, 같은 속도, 하지만 한 아이가 예상치 못하게 횡단보도에 뛰어든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평소 속도였다면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시나리오에서 당신의 행동과 의도는 동일했다.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그 아이가 언제 길을 건넜느냐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회는, 법은, 그리고 당신 자신마저도 두 번째 당신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판단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도덕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다.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이 체계화한 '도덕의 행운'은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네 개의 층위로 작동한다. 이들은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의 도덕적 운명을 결정한다.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해서..."라는 말을 한 번쯤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당신이 그 급한 성격을 선택했는가?

공격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과 온화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똑같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전자가 폭언을 하고 후자가 침묵을 지킨다면, 우리는 당연히 전자를 비난한다. 하지만 그 성격적 차이는 누구의 '공'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 호르몬, 뇌구조의 복합적 결과물이다.

더 섬뜩한 것은 우리가 이런 타고난 차이를 바탕으로 도덕적 위계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저 사람은 원래 착해", "쟤는 성격이 나빠"라며 마치 그것이 개인의 선택이나 노력의 결과인 양 평가한다. 이것이 바로 구성적 행운이다.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백인과 2020년대 서울에서 태어난 당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순히 시공간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도덕적 우주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전자에게는 인종분리가 '정상'이었고, 후자에게는 그것이 '야만'이다. 만약 당신이 그 시대, 그 곳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지금의 도덕적 기준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강남과 지방 소도시, 의사 집안과 일용직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전혀 다른 도덕적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이것을 환경적 행운이라고 한다.

스물다섯 살의 A와 B가 있다. A는 어릴 때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고,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을 만나 '누군가를 돕는 것의 기쁨'을 처음 경험했다. B는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았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같은 상황에서 A는 타인을 도우려 하고, B는 의심부터 한다. 우리는 A를 '좋은 사람', B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판단이 과연 공정한가?

더 복잡한 것은 이런 과거의 경험들이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좋은 경험을 한 사람은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상처받은 사람은 더 상처받는 관계에 빠지기 쉽다. 운이 운을 부르고, 불운이 불운을 낳는다. 이것이 선행적 행운이다.

같은 정도로 준비를 소홀히 한 두 학생이 있다. 한 명은 운 좋게 자신이 공부한 부분에서 문제가 나와 좋은 점수를 받고, 다른 한 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나 낙제한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면 그저 우연이겠지만, 인생은 이런 순간들의 연속이다. 작은 우연들이 쌓여 커다란 운명의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사회는 이 결과들을 보고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을 판단한다. 이것이 결과적 행운이다.


도덕의 행운이 진정한 딜레마가 되는 이유는 우리 내면에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신념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정함을 추구한다. 만약 어떤 결과가 순전히 운에 의한 것이라면, 그 결과로 인해 처벌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낀다.

결과 중심 판단: 동시에 우리는 결과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살인 미수와 살인 기수를 같게 처벌하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문제는 이 두 직관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통제 원칙을 받아들이면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고, 결과 중심으로 가면 불공정한 처벌이 정당화된다.


"결과가 아니라 의도를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의도 역시 순수하게 개인의 것일까? 좋은 의도를 갖는 것 자체가 좋은 교육, 안정된 환경, 타고난 공감 능력의 산물이라면, 의도주의 역시 도덕의 행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완전한 책임도, 완전한 무책임도 아닌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접근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운의 영향 70%, 개인의 기여 30%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있을까?

개인보다는 사회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도 있다. 이는 분명 중요한 관점이지만, 개인의 주체성을 지나치게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을 시스템의 문제로 돌리면 개인의 노력과 선택의 의미가 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시도해볼 수 있다. 기존의 '과정 대 결과'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한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이 똑같이 수학 시험에서 80점을 받았다고 하자. 학생 A는 이미 수학에 흥미가 있어서 쉽게 80점에 도달했다. 학생 B는 수학을 싫어했지만, 3개월 동안 매일 2시간씩 공부하며 자신만의 학습법을 개발하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기르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차근차근 접근하는 사고 과정을 체득했다.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학생 B가 얻은 진짜 '결과'는 80점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 '끈기를 발휘하는 과정',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과정' 자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보통 '최종 결과'라고 여기는 것들을 긴 과정의 한 단계로 볼 수도 있다.

2020년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의 실수로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기존 관점에서는 이것이 '최종 결과'다. 하지만 결과를 과정으로 본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병원은 의료진 교육 시스템을 전면 개편한다. 새로운 안전 점검 프로토콜이 도입되고, 의료진들 간의 소통 방식이 개선된다. 다른 병원들도 이 사례를 연구하며 자신들의 시스템을 점검한다. 10년 후, 이 개선된 시스템 덕분에 수백 명의 생명이 구해진다.

그 관점에서 보면, 2020년의 '사고'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과정'의 중요한 한 단계였던 것이다.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당한 한 학생이 성인이 되어 상담사가 되었다고 하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피해자들을 도우며, 학교 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관점이 결코 학교 폭력이나 어떤 형태의 폭력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고통은 그 자체로 부당하고 치유되어야 할 상처다.

하지만 이미 겪은 아픔을 어떻게 개인적, 사회적 성장의 계기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별개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피해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 부여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치유와 사회적 기여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도덕적 판단의 시간적 지평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우리는 더 이상 한 순간의 행동이나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 대신 그 개인과 사회 전체의 장기적 학습과 성장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철학적 논의가 우리 일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SNS에서 누군가의 실언을 보고 분노하기 전에,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까? 이것이 관용이나 면죄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위한 출발점이다.

조직 운영에서: 직장에서 동료의 실수를 볼 때, 그 실수가 순전히 개인의 무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과도한 업무량, 불충분한 교육, 개인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까? 후자의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형사정책에서도 도덕의 행운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결과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는 현재의 시스템이 과연 합리적인가? 더 나아가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적 요인들을 개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교육 기회의 확대, 사회적 안전망의 강화, 정신건강 지원 시스템의 개선 등이 더 큰 도덕적 성과를 낳을 수 있다.

학교 교육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학생들을 성적으로만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타고난 능력, 가정 환경, 과외 기회 등의 차이를 고려할 때, 결과 중심의 평가는 불공정한 면이 크다. 대신 개별 학생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평가, 협력을 통한 집단 성취를 중시하는 교육, 다양한 재능과 노력을 인정하는 다면적 평가 시스템이 필요하다.


도덕의 행운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겸손함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도덕적 판단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운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일이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순전히 내 공인가?" 이런 질문을 자주 해보자. 내 가치관, 내 성격, 내 능력들이 어떤 우연한 조건들의 산물인지 생각해보자.

타인에 대한 이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볼 때,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해보자. 그 사람이 어떤 아픔을 겪었을지, 어떤 한계 상황에 놓여 있었을지 생각해보자. 이것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한 진단과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위한 출발점이다. 병의 증상만 보고 약을 처방하는 의사보다, 근본 원인을 파악하려는 의사가 더 좋은 의사인 것처럼.

도덕의 행운을 이해하면, 개인의 성공과 실패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에 기여한 사회적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도덕의 행운 딜레마는 아마도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운과 선택, 환경과 의지, 과정과 결과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완전한 정의, 완벽한 공정함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정의와 공정함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도덕의 행운이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운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누군가의 선함도, 누군가의 악함도 완전히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 하고, 비난하기 전에 도우려 하고, 처벌하기 전에 예방하려 하게 만든다.

결국 도덕의 행운 딜레마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에게 더욱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 이 깨달음에서 진정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운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 조건의 일부라면, 그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도덕적 실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을 통해 우리는 운이 아닌 선택으로, 우연이 아닌 의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314689092734011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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