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아베로에스의 회의적인 시선부터 20세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냉철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며 수많은 사상가들을 잠 못 들게 한 질문이 있다. 바로 "전능한 존재가 자신도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언뜻 단순한 말장난처럼 들리는 이 질문 앞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신학대전》에서 이를 진지하게 탐구했을까? 그가 살던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이 만나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시대였다. 신의 완벽성과 전능함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던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 역설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의 근본적 관계를 묻는 핵심 문제였다.
만약 그런 돌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들 수 없어 전능하지 않고, 만들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역시 전능하지 않다. 이 완벽한 논리적 함정은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절대성'에 대한 착각과도 맞닿아 있다. 완벽한 계획, 완전한 시스템, 절대적 진리—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답은 명확하다. 이 역설이 인간 이성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과 그 한계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능의 역설은 혼자 서 있지 않는다. 모든 절대적 개념들이 동일한 논리적 함정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전지(全知)를 생각해보자. 라이프니츠가 제기한 예지의 역설이 있다: 신이 미래를 모두 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더 직접적으로는 "이 명제를 신은 모른다"라는 자기언급 문장의 문제가 있다. 이를 신이 알면 명제가 거짓이 되어 모순이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 있어 전지하지 않다.
19세기 말 칸토르가 발견한 집합론의 역설들도 같은 구조를 갖는다.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을 R이라 하자. R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가? 포함한다면 정의에 의해 포함하지 않아야 하고, 포함하지 않는다면 정의에 의해 포함해야 한다.
언어 자체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 문장이 참이라면 내용에 따라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면 내용과 반대로 참이 된다.
이런 역설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모두 자기언급과 절대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기술하려 할 때, 논리적 붕괴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처럼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한계의 징후들을 단순한 언어유희로 치부할 수 있을까?
20세기 들어 이런 철학적 직관이 수학적으로 증명되기 시작했다. 1931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충분히 강력한 수학 체계는 자기 자신의 일관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이는 전능의 역설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완전한 체계는 자기 완전성을 증명할 수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도 비슷하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자연의 근본 법칙이다. 완전한 관측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 컴퓨터과학의 정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프로그램이 멈출지 안 멈출지를 판단하는 범용 알고리즘은 존재할 수 없다. 튜링이 증명한 이 결과 역시 자기언급의 역설에 기반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한계들은 각 분야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괴델의 정리는 새로운 논리 체계들을 탄생시켰고,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의 토대가 되었으며, 정지 문제는 계산복잡도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반박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언어의 부정확성에서 비롯된 가짜 문제가 아닌가?"
이는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실제로 제기한 비판이다. 하지만 이 반박은 두 가지 이유로 설득력이 없다.
첫째, 이런 역설들이 순수하게 형식적인 수학 언어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칸토르의 역설이나 괴델의 정리는 일상 언어의 모호함과는 무관하게 순수 논리학적 구조에서 발생한다. 가장 정밀한 기호 체계 안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둘째, 이 역설들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실제로 새로운 수학적, 철학적 발견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 체르멜로-프렌켈 집합론, 직관주의 논리학—이 모든 것들이 역설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탄생했다. 만약 이것들이 단순한 언어 문제였다면, 이토록 풍부한 학문적 성과를 낳았을까?
이런 추상적 역설들이 우리 삶과 무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의 핵심적 딜레마들이 모두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의 "관용의 역설"을 생각해보자. 관용적인 사회는 비관용적인 사상도 관용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관용이 확산되어 관용적 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관용적이지 않게 된다. 현대 유럽의 극우 정당 문제, 혐오 표현의 법적 규제 논란 등이 모두 이 역설의 현실적 발현이다.
경제학의 "절약의 역설"도 있다. 모든 사람이 절약하면 소비가 줄어 경제가 침체된다.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절약이 집단적으로는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긴축정책과 부양정책 사이에서 고민한 것도 이 역설 때문이다.
현대 AI 윤리에서도 비슷한 문제들이 나타난다. "완전히 객관적인 AI"를 만들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편향을 숨기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의 특정 집단 배제, 알고리즘 설계자의 무의식적 선호 등이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은폐될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이 내리는 결정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완전한 객관성을 추구할수록 진짜 편향은 더 깊이 숨겨지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역사적으로 이런 역설들에 대한 해결 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각각은 나름의 통찰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한계를 드러낸다.
1. 논리적 전능론 (아퀴나스, 데카르트) 전능함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도 들 수 없는 돌"은 논리적 모순이므로 전능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마치 "사각형인 원"을 그릴 수 없다고 해서 전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이 해결책의 문제는 "논리적 가능성"의 경계를 누가 정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이 보여주듯, 논리 체계 자체도 다양할 수 있다.
2. 계층 이론 (러셀, 타르스키) 자기언급을 금지하여 역설을 차단한다. 집합들을 계층으로 나누어 상위 계층의 집합만이 하위 계층을 원소로 가질 수 있게 하거나, 진리 술어를 언어 계층으로 분리한다.
이는 수학에서는 효과적이지만, 일상 언어나 철학적 사유에서는 자기언급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의식, 자아, 성찰—인간 정신의 핵심적 활동들이 모두 자기언급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다가논리 접근 (루카시에비치, 클레이니) 참/거짓의 이분법을 포기하고 "미정" 같은 제3의 값을 도입한다. 거짓말쟁이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닌 "미정" 상태로 처리한다.
하지만 이 역시 미정 상태 자체에 대한 새로운 역설들을 낳을 수 있다. "이 문장은 미정이다"라는 문장의 진리값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모든 해결 시도가 실패했다는 말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역설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첫째, 지적 겸손의 필요성이다. 아무리 정교한 이론도 자신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확한 지식을 위해서는 현재 지식의 한계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수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뉴턴 역학이 무용해진 것은 아니다. 적용 범위를 명확히 알기에 더 유용해졌다.
둘째, 맥락적 사고의 중요성이다. 절대적 개념들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전능함"도 신학적 맥락과 논리학적 맥락에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맥락을 무시한 채 절대적 개념을 적용하려 할 때 역설이 발생한다.
셋째, 창조적 긴장의 활용이다. 역설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새로운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양자역학의 파동-입자 이중성, 현대 민주주의의 자유-평등 긴장 관계 모두 역설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역동적이고 발전적이다. 완전한 해결보다는 창조적 균형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전능한 존재가 자신도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정직한 답은 이것일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이성의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한 사유 능력을 지녔다. 절대적 개념을 상상하면서 동시에 그 개념이 품고 있는 논리적 불가능성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이 **'초월적 성찰'**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독특하고 위대한 특징이다.
전능한 존재가 만든 돌을 실제로 들어올릴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돌의 존재를 상상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지적 난제를 탐구하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완전한 답 대신, 더 날카롭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역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며, 인간 사유의 한계 속에서 피어나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미지 출처 http://ch-you.com/board_uYQO22/9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