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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17화

프로타고라스의 재판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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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법정에서 벌어진 한 재판은 2천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는 단순한 소송 사건이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가 맞붙은 이 재판은 논리 그 자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실험실이 되었고, 인간 이성의 자기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울이 되었다. 프로타고라스와 에우아틀루스의 대결은 승자를 가릴 수 없는 완벽한 균형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논리와 정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프로타고라스는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명제는 그리스 철학사에 상대주의의 물결을 일으켰고, 페리클레스와 같은 권력자들이 그의 지혜를 구했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특히 변론술에서 그의 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가르치는 수사학과 논리학은 아테네 민주정의 법정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무기였고, 그 대가로 그가 요구하는 수업료는 천문학적이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의 가격이 아니라, 권력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값이었다.


여기에 에우아틀루스라는 야심찬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의 제자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거액의 수업료가 문제였다. 두 사람은 독특한 계약을 체결했다. 에우아틀루스는 수업료의 절반을 먼저 지불하고, 나머지 절반은 첫 번째 재판에서 승소한 후에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프로타고라스의 교육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라면 반드시 첫 재판에서 이길 것이고, 그렇다면 수업료는 자연스럽게 회수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에우아틀루스는 교육을 마친 후 법정 변론가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정치의 길을 택했고, 어떠한 재판도 맡지 않았다. 프로타고라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계약 위반이었다. 제자는 배움을 얻었으되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도 에우아틀루스가 법정에 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프로타고라스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제자를 상대로 수업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법정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펼친 논리는 완벽해 보였다. "자네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네. 만약 이 재판에서 자네가 패소한다면, 법원의 판결에 따라 나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네. 만약 자네가 승소한다면, 그것이 자네의 첫 번째 재판 승리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원래 계약에 따라 나에게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네." 이는 논리학에서 말하는 완벽한 딜레마였다. 두 가지 가능한 결과 모두 프로타고라스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우아틀루스는 스승에게 배운 논리의 칼날을 그대로 스승에게 돌렸다. "선생님의 논리를 따르자면, 저는 어떤 경우에도 수업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제가 이 재판에서 승소한다면, 법원의 판결에 따라 저는 선생님께 돈을 지불할 의무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패소한다면, 저는 아직 첫 번째 재판에서 이기지 못한 것이므로, 원래 계약에 따라 수업료를 지불할 의무가 없습니다." 제자의 반론은 스승의 논리를 완벽하게 모방하면서도 정확히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순간 법정은 논리의 미궁에 빠졌다. 판사와 배심원들은 전례 없는 난제에 직면했다. 어느 쪽으로 판결을 내려도 그 판결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프로타고라스의 손을 들어준다면, 에우아틀루스는 첫 재판에서 패소한 것이 되고, 따라서 계약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그의 주장이 정당화된다. 반대로 에우아틀루스의 승소를 선언한다면, 그는 첫 재판에서 이긴 것이 되므로 계약에 따라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힘을 얻는다.


아울루스 겔리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배심원들은 결국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사건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는 패배가 아니라 지혜로운 후퇴였다. 그들은 논리의 자기 모순 앞에서 법정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직한 대답은 침묵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 침묵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 체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겸손한 고백이었다.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누가 이기고 졌느냐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는 논리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낸다. 프로타고라스와 에우아틀루스는 각각 완벽하게 타당한 논증을 펼쳤으나, 두 논증은 서로를 완전히 부정한다. 이는 형식 논리만으로는 실제 세계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법은 논리적 일관성만이 아니라 정의, 공정성, 사회적 합의라는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역설의 핵심이 계약 자체의 모순적 구조에 있다는 점이다. 프로타고라스와 에우아틀루스가 맺은 계약은 미래의 법적 판결을 계약 이행 조건으로 삼았다. 이는 법 체계의 자기 참조적 순환을 만들어냈다. 계약의 이행 여부가 재판 결과에 달려 있고, 재판 결과가 다시 계약의 해석에 달려 있는 이 구조는 논리적으로 안정적인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마치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고전적 자기지시 역설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현대 법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계약법의 근본 원칙에 대한 도전이다. 계약의 자유는 모든 법치 사회의 기초이지만,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자기모순적이거나 공공질서에 반하는 계약은 무효다. 프로타고라스와 에우아틀루스의 계약은 바로 이러한 자기모순의 전형적 사례다. 만약 현대 법원이 이 사건을 다룬다면, 계약 자체를 무효로 선언하고 다른 법 원칙, 예컨대 부당이득반환이나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역설이 가진 철학적 의미는 법적 해결을 넘어선다.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상대주의적 입장은 이 재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다. 만약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고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면, 법적 판단 역시 절대적 기준을 가질 수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 만들어낸 논리적 미로에 스스로 갇힌 셈이다. 그의 제자 에우아틀루스는 단순히 스승의 논리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 논리가 가진 근본적 한계까지 체득한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교육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프로타고라스는 에우아틀루스에게 논리와 수사학을 가르쳤고, 제자는 그것을 완벽하게 습득했다. 어쩌면 너무나 완벽하게. 에우아틀루스가 스승의 논리를 스승에게 되돌려준 순간, 교육은 완성되었다. 진정한 배움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학생이 스승을 넘어서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프로타고라스는 돈을 받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교육은 성공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패배가 그의 승리를 증명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고대의 역설은 여전히 생생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종종 논리와 규칙, 법과 계약에 절대적 신뢰를 둔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은 형식적 시스템이 아무리 정교해도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는 20세기 쿠르트 괴델이 증명한 불완전성 정리와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충분히 복잡한 형식 체계는 그 내부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명제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프로타고라스와 에우아틀루스의 사건은 이러한 원리의 법적, 실존적 표현이다.

결국 이 재판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논리는 완벽한가? 법은 모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가? 계약의 자유에는 어떤 한계가 있어야 하는가? 진리는 논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2천5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아테네의 배심원들이 판결을 무기한 연기한 것처럼, 이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도 영원히 보류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은 단순한 법적 분쟁이나 논리 퍼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야심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는 논리로 세계를 이해하고 질서를 부여하려 하지만, 논리 그 자체가 때로는 우리를 미궁으로 인도한다. 이 역설의 진정한 교훈은 겸손함이다. 우리의 사고 도구가 아무리 정교해도, 현실의 복잡성을 완전히 포착할 수는 없다. 때로는 침묵과 보류가 거짓 확신보다 더 지혜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들이 보여준 것은 패배가 아니라 현명함이었다. 그들은 논리의 한계 앞에서, 인간적인 겸손함을 택했다.


(이미지 출처 https://figsinwinter.medium.com/protagoras-should-we-re-evaluate-the-sophists-ad1c23112f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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