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노답론 21화

공정의 베일

by 레옹
John_Rawls_(1971_photo_portrait).jpg

당신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곧 어떤 사회에 태어날 것이지만, 그 사회에서 당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당신이 부유한 가정에 태어날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날지, 남성일지 여성일지, 건강한 몸을 가질지 장애를 가질지, 어떤 인종이나 종교를 가질지 모른다. 이러한 무지의 상태에서 당신은 어떤 사회적 원칙을 선택하겠는가? 1971년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공정으로서의 정의' 개념의 핵심인 이 사유 실험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고의 틀로 남아있다.


롤스는 이 가상적 상황을 '원초적 입장'이라 불렀고, 우리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모르는 상태를 '무지의 베일' 또는 '공정의 베일'이라 명명했다. 이 베일 뒤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특수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관점에서 사회의 기본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 롤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 하에서 합리적 개인들은 두 가지 핵심 원칙에 합의하게 된다. 첫째,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기본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고,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하에서 모든 이에게 개방된 직위와 연결될 때만 정당화된다.

이 두 번째 원칙, 특히 '차등의 원칙'으로 알려진 부분은 롤스 이론의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요소다. 그는 불평등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불평등이 사회 전체, 특히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된다면 정당하다고 보았다. 예컨대 의사나 과학자에게 더 높은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재능을 사회에 기여하도록 유인하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의 건강과 복지가 향상된다면, 그러한 불평등은 수용 가능하다. 하지만 핵심은 이러한 불평등이 최하층 사람들의 처지를 실제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장 작은 조각을 받는 사람의 몫이 절대적으로 커져야 한다.


이 논리의 설득력은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 깊이 공명한다. 공정의 베일 뒤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할 때, 우리는 극단적인 불평등이나 차별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자기이익의 계산이 아니라, 진정으로 공정한 관점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론적 장치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기득권과 경험에 갇혀 사회를 바라본다. 부유한 사람은 누진세를 불공정하다고 느끼고, 가난한 사람은 복지 확대를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공정의 베일은 이러한 편향을 제거하고, 우리가 정말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고려하는 입장에서 판단하도록 강제한다.

롤스의 이론은 공리주의와 대조적이다. 벤담과 밀로 대표되는 고전적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이는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소수의 희생을 통해 다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노예제가 노예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공리주의는 이를 정당화할 수 있다. 롤스는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각 개인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며, 어떤 사람도 타인의 더 큰 선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정의 베일 뒤에서 합리적 개인들은 자신이 소수자가 될 위험을 고려하여, 기본적 자유와 최소 수혜자 보호를 우선시하는 원칙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롤스의 이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로버트 노직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롤스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노직은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재분배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공정성은 결과의 패턴이 아니라 취득과 이전의 과정에 있다. 한편 페미니스트 철학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스의 원초적 입장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실제로 특정한 공동체와 관계 속에서 형성된 존재이며, 이러한 맥락을 완전히 제거한 채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한지, 또 바람직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아마르티아 센은 더욱 근본적인 비판을 제시했다. 그는 롤스의 이론이 '제도의 정의'에 집중하여,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려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센은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불완전한 현실 사회들을 비교하고, 덜 부정의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지침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롤스의 차등의 원칙은 재화의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 재화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소득을 가졌더라도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실질적 자유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의 베일이 제공하는 통찰은 여전히 강력하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사유 실험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회 정책과 제도를 평가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료 보장 제도를 설계할 때 우리는 묻는다. "만약 내가 어떤 건강 상태로 태어날지 모른다면, 어떤 의료 시스템을 원하겠는가?"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보편적 의료 보장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이 중병에 걸리거나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가정에 태어날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 정책도 마찬가지다. 공정의 베일 뒤에서라면, 우리는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선택할 것이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바라볼 때도 이 개념은 유용하다.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부와 기회는 출생의 우연에 크게 좌우된다.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지역에서 태어났는가가 개인의 삶의 궤적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공정의 베일은 이러한 현실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만약 우리가 어디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를 설계한다면, 출생의 우연이 인생의 기회를 좌우하는 시스템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재분배를 넘어, 기회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들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공정의 베일은 또한 세대 간 정의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는 미래 세대에게 막대한 부담을 지운다. 만약 우리가 어느 세대에 태어날지 모른다면, 현재의 편익을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정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속 가능성과 세대 간 형평성을 정의의 핵심 요소로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롤스 자신도 『정의론』의 후속 논의에서 저축의 원칙을 통해 세대 간 정의를 다루었지만, 이는 그의 이론 체계에서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국제적 맥락에서 공정의 베일의 적용은 더욱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롤스 자신은 『만민법』에서 그의 정의론을 국제 관계에 확장하려 했지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원초적 입장을 개인이 아닌 '민족들'의 대표자들 사이에 설정했는데, 이는 국가 간 불평등을 개인 간 불평등만큼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만약 진정으로 전 지구적 공정의 베일을 상정한다면, 즉 우리가 어느 나라에 태어날지 모른다면, 극심한 국가 간 부의 격차와 개발도상국의 빈곤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이는 토마스 포게와 같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전 지구적 분배 정의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공정의 베일이 모든 윤리적 질문에 답을 주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 개념은 우리가 이미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살아가며 형성된 의무와 관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특별한 의무, 국가가 자국민에게 갖는 우선적 책임,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보상 같은 문제들은 공정의 베일이라는 탈맥락적 관점만으로는 충분히 다루기 어렵다. 또한 문화적 다양성과 가치의 다원성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공정의 베일 뒤에서 도출된 보편적 원칙과 특정 공동체의 고유한 가치 사이에 긴장이 생길 때, 우리는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정의 베일은 도덕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강력한 도구다. 이는 우리에게 "만약 내가 타인의 입장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을 체계적으로 던지게 한다. 이 질문은 공감의 본질이며, 공정성의 출발점이다. 일상적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중심적 편향에 빠진다. 자신의 고통은 크게 느껴지고 타인의 고통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의 노력은 과대평가하고 타인의 노력은 과소평가한다. 공정의 베일은 이러한 편향을 교정하는 인지적 장치로 기능한다.

정책 입안자들과 시민들이 공정의 베일의 관점을 내면화한다면, 사회적 논쟁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세금 정책을 논할 때, 단순히 "내가 얼마나 부담하는가"가 아니라 "만약 내가 어느 소득 계층에 속할지 모른다면 어떤 세금 체계를 원하겠는가"를 물을 수 있다. 형사 사법 제도를 논할 때,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뿐 아니라 "만약 내가 무고하게 기소되거나, 재활 가능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면 어떤 사법 체계를 원하겠는가"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처벌 중심에서 회복과 재통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촉진한다.


물론 공정의 베일을 적용하는 것이 항상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합리적인 사람들도 위험에 대한 태도나 가치의 우선순위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최소 수혜자의 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안전 지향적 선택을 할 것이고, 다른 이는 더 높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평균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쟁이 자기 이익이 아닌 공정성의 기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롤스의 공정의 베일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재능, 건강, 가정환경, 태어난 시대와 장소—은 우리의 노력이나 선택과 무관한 도덕적 자의성의 결과다. 공정의 베일은 이 자의성을 직시하게 하고,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 운이 나빴던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요청임을 일깨운다. 이는 동정이 아닌 상호성에 기초한 연대의 원리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기술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격차를 만들어내고, 전 지구화는 국경을 넘나드는 정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는 노동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기후 위기는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공정의 베일이 제공하는 사고의 틀은 여전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유효하다. 우리가 설계하는 미래 사회에서 누구의 입장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는 상상은, 더욱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결국 공정의 베일은 완벽한 정의의 공식이 아니라 지속적인 질문과 성찰을 위한 초대다. 이는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물음을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도덕적 물음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공정성을 추구하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공정의 베일이 여전히 정치철학의 중심에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 가정이 아닌, 우리의 도덕적 역량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일 뒤에 선 우리는 더 나은 버전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B%A1%A4%EC%8A%A4)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0화철학의 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