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방법원에 한 남자가 방탄유리 부스 안에 앉아 있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대학살의 핵심 조직자 중 한 명. 세계는 그의 입에서 악마적 광기와 증오의 언어가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법정에 나타난 것은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관료적이며, 놀랍도록 진부했다. 재판을 참관하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광경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를 발견했다. 악은 괴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을 변호하며 거듭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단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무원이었다고 강조했다. 그의 언어는 관료적 전문용어와 클리셰로 가득했다. 그는 수백만 명의 죽음을 "특별 처리", "이송", "최종 해결"과 같은 완곡어법으로 표현했다. 아렌트가 포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사유하기를 거부한 평범한 인간이었고, 바로 그 평범함이 그를 거대한 악의 톱니바퀴로 만들었다.
이 통찰은 불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악을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 같은 이름을 떠올리며, 그들을 인간의 범주 바깥에 있는 괴물로 규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낀다. 악은 저 멀리 있는 것이고,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렌트가 보여준 것은 정반대였다. 20세기 최악의 범죄는 악마적 천재들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아이히만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다.
스탠리 밀그램의 1961년 실험은 이 통찰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밀그램은 예일대학교에서 피험자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실제로는 전기충격이 흐르지 않았지만, 피험자들은 그것을 몰랐다. 권위 있는 실험자가 계속하라고 지시하자, 65%의 참가자들이 치명적일 수 있는 450볼트까지 전기충격을 가했다. 이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뉴헤이븐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교사, 우편배달부, 세일즈맨들이었다. 그들은 고통스러워했고, 땀을 흘렸으며, 항의했다. 하지만 권위가 말하자 복종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더 나아갔다. 1971년, 심리적으로 건강한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간수와 죄수 역할에 배정했다. 불과 며칠 만에 '간수'들은 잔인해졌고, '죄수'들은 무기력해졌다. 실험은 예정보다 일찍 중단되어야 했다. 역할이 사람을 변화시켰다. 제도가 인간을 재구성했다. 평범한 청년들이 학대자가 되는 데는 단 6일이면 충분했다.
이 실험들이 보여주는 것은 악이 개인의 성품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는 도덕을 개인의 내면에 있는 고정된 특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있고, 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게 행동하며, 악한 사람은 언제나 악하게 행동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들은 반대를 가리킨다.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올바른 조건만 갖춰지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르완다 대학살은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약 100일 동안 80만 명이 살해되었다. 하루 평균 8,000명이 죽었다. 이것은 나치 학살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런데 이 학살의 가해자 대부분은 전문 군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농부, 교사, 공무원이었다. 이웃이 이웃을 죽였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동에 따랐고, 정부의 지시를 받았으며, 동료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학살 이전, 그들은 희생자들과 함께 살았고, 시장에서 거래했으며, 아이들을 같은 학교에 보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악의 실행자로 만드는가?
첫째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위계질서 속에서 생존해왔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이 본능은 현대 사회에서 재앙이 될 수 있다. 합법적으로 보이는 권위가 비도덕적 명령을 내릴 때,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다. 밀그램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실험자가 책임진다"는 보장을 받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책임이 분산되면 양심이 침묵한다.
둘째는 점진적 단계화다. 거대한 악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작은 양보에서 시작한다. 나치는 처음부터 가스실을 만들지 않았다. 먼저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고, 그다음 상점에 표시를 붙이게 했으며, 게토에 격리했고, 이송했고, 마침내 살해했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보다 조금만 더 나빴다. 그리고 이미 한 발을 내디딘 사람들은 두 번째 발을 내딛기가 더 쉬웠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문전박대 기법'이라고 부른다. 작은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은 큰 요구도 받아들이기 쉽다.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욕구가 도덕적 저항을 압도한다.
셋째는 비인간화다. 사람을 죽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람을 사물로 만들면 쉬워진다. 나치는 유대인을 '해충'이라고 불렀다. 르완다에서 투치족은 '바퀴벌레'였다. 이라크 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는 '부수적 피해'였다. 언어가 인식을 바꾼다. 살아있는 인간을 추상적 범주로 환원하면, 공감이 사라진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숫자로만 보았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송되어야 할 화물이었고, 처리되어야 할 문제였다.
넷째는 집단 압력이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보다 집단 속에 있을 때 더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집단은 책임을 희석시킨다. "모두가 하니까"라는 생각이 개인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르완다에서 많은 가해자들이 "거부하면 나도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집단의 압력은 강력했고, 저항의 비용은 높아 보였다.
다섯째는 사유의 부재다. 이것이 아렌트가 가장 강조한 지점이다. 아이히만은 칸트를 읽었다고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나치의 충성 원리로 왜곡했다. 그는 자기 행동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클리셰로 말했고, 관료적 언어로 생각했으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곧 의무라고 믿었다. 그에게 사유는 불편한 것이었고, 피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악의 도구가 되었다.
아렌트는 사유가 악을 막는 유일한 방어선이라고 주장했다. 사유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내가 이 행동을 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쉽게 악에 협력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다수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한 사람에게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범한 악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첫째, 우리는 권위를 의심해야 한다. 복종은 미덕일 수 있지만, 맹목적 복종은 악의 온상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확립한 원칙은 명확하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 권위가 비도덕적 명령을 내릴 때, 우리는 거부할 의무가 있다.
둘째, 우리는 작은 타협에 주의해야 한다. 거대한 악은 작은 양보에서 자란다. "이번 한 번만", "별로 중요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다 해"라는 생각이 도덕적 나선의 시작이다. 선을 명확히 긋고, 처음부터 지켜야 한다. 작은 불의를 목격했을 때 침묵하면, 큰 불의에 맞서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셋째, 우리는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통계는 마비시킨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는 스탈린의 냉소적 발언은 불행히도 심리적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는 구체적인 얼굴, 이름, 이야기에 공감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추상을 구체로 되돌려야 한다. '난민'이 아니라 아흐메드다.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마리아다. '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다.
넷째, 우리는 비동조의 용기를 길러야 한다. 집단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홀로 서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 사람의 저항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는 것이다. 로자 파크스는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 한 사람의 행동이 민권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밀그램 실험에서도, 다른 사람이 거부하는 것을 본 피험자들은 자신도 거부하기가 더 쉬웠다. 저항은 전염된다.
다섯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우리는 사유해야 한다.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사유는 고급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하고 있는가? 이것이 옳은가? 이 질문들을 던지는 습관이 우리를 지킨다. 사유는 불편하다. 그것은 우리가 클리셰 뒤에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지막 말에서 그는 여전히 클리셰를 반복했다. "곧 신사 여러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끝까지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고, 평범한 사람으로 죽었다. 하지만 그의 평범함이 수백만을 죽였다.
악의 평범성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 악은 저 멀리에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올바른 압력, 올바른 상황, 올바른 권위가 주어지면, 우리도 복종할 수 있다. 우리도 타협할 수 있다. 우리도 생각하기를 멈출 수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경계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르완다 이후에도 보스니아가 있었고, 다르푸르가 있었고, 미얀마가 있었다. 21세기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악을 실행한다. 소셜미디어는 비인간화를 더 쉽게 만들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필터 버블에 가두고, 다른 사람들을 추상으로 만든다. 관료제는 더욱 복잡해져서, 책임은 더욱 분산된다. 권위는 새로운 형태를 띤다. 기업, 알고리즘, '전문가'의 의견. 우리는 여전히 복종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아렌트가 보여준 것은 절망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악이 평범하다면, 선도 평범할 수 있다. 영웅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 작은 저항이면 충분하다. 생각하기. 질문하기. 거부하기. 한 사람의 얼굴을 보기. 자기 자신과 대화하기. 이런 평범한 행위들이 우리를 지킨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은 결국 희망의 메시지다. 악이 예외적이라면, 우리는 무력하다. 괴물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악이 평범하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평범함은 우리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한다. 생각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선을 지킬 것인가.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함께 살 수 있는가? 이것이 모든 도덕의 시작이다. 거울 속 자신을 볼 수 있는가? 밤에 잠들 수 있는가?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불편해야 한다. 때로는 홀로 서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악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82%98_%EC%95%84%EB%A0%8C%ED%8A%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