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평등이라는 이상에 매달려왔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몫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 불평등 그 자체가 제거되어야 할 악이라는 신념, 그리고 평등한 사회가 곧 정의로운 사회라는 확신이 마치 자명한 진리인 양 받아들여졌다. 프랑스혁명 이래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평등은 자유와 함께 근대 사회의 양대 기둥으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프린스턴대학교의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가 제기한 물음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전제들을 뿌리째 흔든다. 평등은 과연 도덕적 선인가? 아니, 더 나아가 우리가 평등에 집착하는 동안 정작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랭크퍼트의 논증은 극단적인 사고실험으로 시작한다. 지구상에 열 명만 남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 자원은 1인당 5단위인데 전체 자원은 40단위뿐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상황에서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면 모든 사람이 4단위씩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열 명 모두가 죽는다. 반면 여덟 명에게 5단위씩 주면 적어도 여덟 명은 살아남는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하다. 평등한 분배가 언제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선택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는 평등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유희가 아니다. 실제로 역사는 평등을 절대시한 사회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보여준다. 소련의 집단농장은 모두에게 동등한 토지를 분배하려다 수백만 명을 굶겨 죽였고,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은 평등한 공동식당 제도를 강제하며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초래했다.
이 사고실험이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 핵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딜레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소득 격차에 분노하는가? 흔히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많이 가졌다"는 상대적 비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랭크퍼트는 이것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를 진정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가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충분한 것조차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불평등 그 자체가 아니라 절대적 빈곤이다. 이 구분은 단지 개념적 미묘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문제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법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구분은 단순한 개념적 유희가 아니다. 현실에서 막대한 함의를 지닌다. 만약 우리가 평등을 절대적 목표로 삼는다면, 부유한 사람의 부를 감소시키는 것만으로도 불평등이 줄어들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설령 가난한 사람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두가 가난해져서 평등해지는 상황조차 평등주의의 관점에서는 개선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이 평등주의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평등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발터 샤이델의 연구가 보여주듯, 인류 역사에서 불평등이 실질적으로 감소한 시기는 대규모 전쟁, 혁명, 국가 붕괴, 전염병이라는 네 가지 폭력적 재앙의 시기였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했고, 두 차례 세계대전은 엘리트 계층의 부를 파괴하며 평등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평등을 우리가 원하는가? 평화적 수단으로 평등을 추구한 사례들은 대부분 실패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반면 충분성의 원칙은 다르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것을 가지는지 여부다. 누군가 억만장자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사회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지점은 타인이 가진 부의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중 일부가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에 필요한 최소한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차이가 아니다. 평등을 목표로 하는 정책과 충분성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전자는 상위 1퍼센트가 전체 부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에 집착하는 반면, 후자는 빈곤선 이하 인구가 몇 명이고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물론 이 논증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프랭크퍼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극심한 부의 불평등은 정치적 권력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선거와 정책 결정 과정에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 미국에서 슈퍼 PAC(정치활동위원회)을 통한 무제한 정치 자금 기부가 가능해진 이후, 소수 부유층의 정치적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의 본질은 불평등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평등을 침해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경제적 평등이 아니라 정치적 평등이며, 만약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평등을 위협한다면 그 범위 내에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평등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가치인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구분은 정책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평등을 목표로 삼는 정책은 종종 재분배 그 자체에 집착한다. 누가 얼마나 가졌는지, 소득 상위 1퍼센트가 전체 부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에 몰두한다. 이러한 접근은 때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2019년 한국의 최저임금 급격한 인상은 평등의 이름으로 시행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영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반면 충분성을 목표로 삼는 정책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적절한 주거, 의료, 교육을 누리지 못하는가? 빈곤선 이하의 인구는 얼마나 되는가? 이들에게 필요한 구체적 지원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수사적 차이가 아니다. 전혀 다른 정책적 개입을 요구한다. 소득 분배 지표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는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남들보다 덜 가진 것에 분노하고, 타인의 성공을 나의 실패로 받아들인다. 학벌, 직업, 소득, 심지어 자녀의 성적까지 모든 것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우리 아이가 강남 애들보다 뒤처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동창은 집을 샀는데 나는 전세살이"라는 자괴감, "같은 회사 동기가 승진했는데 나는 그대로"라는 좌절감. 이러한 비교 문화는 평등주의적 사고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강박, 차이 그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심성이 우리를 끊임없는 경쟁으로 내몬다. 그러나 프랭크퍼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잘못된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나 자신이 충분한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만큼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나의 자녀는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충분히 얻는가? 이런 질문으로 초점을 바꿀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성공을 위협이 아닌 영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충분함"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프랭크퍼트도 이를 인정한다. 평등의 이론이 충분성의 이론보다 훨씬 단순하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몫을 주면 된다는 계산은 명확하다. 반면 각자에게 무엇이 충분한지 판단하는 일은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사람들의 필요는 다르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의료 지원이 필요하고, 재능 있는 예술가는 교육과 창작 기회가 필요하며, 홀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육아 지원이 필요하다. 게다가 무엇이 괜찮은 삶인지에 대한 기준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한다. 1950년대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도 괜찮았지만, 오늘날 그런 주거환경은 최소 기준에 미달한다. 그러나 쉽다고 해서 올바른 것은 아니다. 평등주의는 단순한 만큼 현실의 복잡성을 놓친다. 이러한 복잡성을 인정하고 다루는 것이 어렵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충분성의 기준을 정하는 과정은 민주적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요구한다. 이는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지만,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함께 결정하게 된다.
평등의 배신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진짜 문제를 외면해왔다. 상대적 격차에 집착하는 동안 절대적 결핍은 방치되었다.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내세우며, 정작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 대안은 미루어왔다. 평등은 우리에게 도덕적 만족감을 주었지만, 그 만족감은 실제 삶의 개선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사회의 지니계수가 개선되었다"는 통계는 여전히 쪽방에 사는 노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소득 5분위 배율이 줄었다"는 수치는 내일 끼니를 걱정하는 아동에게 무슨 위안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평등이 우리를 배신한 방식이다. 우리는 숫자를 개선하는 데 집중했고, 사람을 개선하는 것은 잊었다.
프랭크퍼트의 주장이 불평등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극심한 빈곤과 소외를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그 이유가 불평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충분히 갖지 못해서 고통받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불평등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더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사회 정의로 나아가는 길이다. 빈곤 가정 아동에게 필요한 것은 부자 아이와 똑같은 사교육비가 아니라, 안정적인 주거, 균형 잡힌 영양, 양질의 공교육,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이런 것들이 충족될 때, 그 아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부자 집 아이와 정확히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역사가 보여주듯, 평등을 절대적 목표로 삼은 실험들은 종종 재앙으로 끝났다. 경제적 평등을 강제하려던 시도들은 자유를 억압하고 효율을 파괴했으며, 때로는 평등을 외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특권과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소련에서는 모든 사람이 프롤레타리아로 평등하다고 선언되었지만, 당 간부들은 특별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별장을 소유했다. 중국 문화대혁명은 지식인과 부유층을 타도하며 평등을 외쳤지만, 결과는 수백만 명의 죽음과 10년간의 문화적 황폐화였다. 반면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집중한 사회들은, 비록 완벽한 평등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구성원 대다수가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흔히 북유럽을 평등한 사회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충분성의 원칙에 더 가깝다. 스웨덴과 덴마크의 자산 불평등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부의 분배만 놓고 보면 짐바브웨와 비슷할 정도다. 그럼에도 이 나라들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가 똑같이 가지지는 않지만, 누구도 기본적인 것들을 박탈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업자도 재교육을 받을 수 있고, 환자는 치료받을 수 있으며, 아이는 부모의 경제력과 무관하게 양질의 교육을 받는다. 기업가가 큰 성공을 거두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것을 막지 않되, 실패한 사람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한다. 이것이 충분성의 보편화다. 평등이 아니라 충분함을 모두에게.
평등의 배신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가 충분히 갖지 못했는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미묘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추구하는 해법이 달라지고, 그 해법이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느냐 아니면 통계 수치만 조정하느냐가 결정된다. 평등을 추구하는 정책은 "어떻게 부자의 세금을 더 걷을까"를 고민하지만, 충분성을 추구하는 정책은 "노숙자에게 어떤 지원이 가장 효과적인가", "한부모 가정이 안정적으로 생활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장애인이 사회에 완전히 참여하려면 어떤 장벽을 제거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후자의 질문들은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며, 실행 가능한 답을 요구한다.
평등이라는 이상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평등은 수단이 될 수 있어도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모든 사람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를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필요한 것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 마이클 월저가 말했듯, "평등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사회적 지배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배우지 못하고,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평등의 배신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200년 넘게 평등이라는 깃발 아래 행진해왔다. 이제 그 깃발을 내려놓고, 더 정직한 질문을 던질 때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똑같이 가난한 사회인가, 아니면 모두가 충분히 가진 사회인가? 답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도 명확해진다. 평등이 아니라 충분성. 격차의 축소가 아니라 빈곤의 해소. 상대적 지위의 평준화가 아니라 절대적 존엄의 보장. 이것이 평등의 배신을 넘어서는 길이고,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