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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26화

배신의 의무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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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생 충성을 미덕으로 배운다. 조직에 대한 헌신, 관계에 대한 성실함, 신념에 대한 일관성이 도덕적 인간의 표지라고 교육받는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류의 진보는 언제나 배신자들의 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갈릴레오는 교회의 우주관을 배신했고,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리를 배신했으며, 에밀 졸라는 프랑스 군부의 명예를 배신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 배신을 통해 진실에 다가갔다. 배신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때로는 더 높은 차원의 충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감을 추구한다. 부족, 국가, 종교, 이념은 우리에게 정체성을 제공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틀을 준다. 문제는 이러한 소속이 사고를 경직시킬 때 발생한다. 집단은 구성원에게 특정한 세계관을 요구하며, 그 틀을 벗어난 질문은 불온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중세 유럽에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과학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질서에 도전하는 신성모독이었다. 20세기 전체주의 국가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인민의 적이 되는 행위였다. 집단은 구성원의 충성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유지하며, 그 대가로 이단자를 제거한다.


그렇다면 배신은 언제 정당화되는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며 악의 평범성을 목격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조직에 충성하고 명령에 복종한 평범한 관료였다. 그의 범죄는 악한 의도가 아니라 사유의 포기에서 비롯되었다. 아렌트는 이를 통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부도덕한 체제에 대한 충성은 미덕인가, 아니면 공범인가? 나치 독일에서 양심적인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행위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며 군인의 맹세를 깼지만, 그 배신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다. 그의 배신은 더 근본적인 충성, 즉 인류에 대한 책임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일상의 작은 선택에도 적용된다. 직장에서 부정을 목격했을 때, 가족의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의 자기파괴적 행동을 봤을 때, 우리는 충성과 정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침묵은 편안하다. 침묵은 관계를 유지하고 소속을 보장한다. 하지만 침묵은 공모이기도 하다. 내부 고발자들은 종종 배신자로 낙인찍히며 사회적 죽음을 맞는다. 그들은 조직의 신뢰를 저버렸고, 동료를 팔았으며, 은혜를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을 다르게 기록한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국가안보국의 기밀을 폭로하며 반역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시민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가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선택을 내렸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배신의 의무는 맹목적 충성보다 사유를 요구한다. 우리가 충성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 충성이 어떤 가치를 지키고 어떤 가치를 침해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죄목은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한 일은 사람들에게 질문하도록 가르친 것뿐이었다. "너는 왜 그것을 믿는가? 그것은 정말로 옳은가?" 이러한 질문은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된다. 사유하는 시민은 순종적인 신민보다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을 존중했지만, 진리에 대한 충성을 더 우선시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그의 죽음은 배신이 아니라 가장 깊은 형태의 충성, 즉 진실에 대한 충성이었다.


현대 사회는 복잡한 충성의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동시에 가족의 구성원이자, 조직의 일원이며, 국가의 시민이고, 인류의 일부다. 이 정체성들은 때로 충돌한다. 다국적 기업의 직원이 자국의 이익과 글로벌 정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의사가 환자의 비밀과 공공의 안전 사이에서 결정해야 할 때, 언론인이 출처 보호와 진실 보도 사이에서 고민할 때, 어떤 충성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간단한 답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조건적 충성이 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충성은 조건부여야 하며, 그 조건은 더 보편적인 도덕적 원칙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문학은 이러한 딜레마를 탐구하는 강력한 도구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주인공은 국가의 법과 신의 법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크레온 왕은 반역자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안티고네는 오빠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를 따른다. 그녀의 선택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지만, 더 높은 정의에 대한 충성이다. 이 비극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울림을 주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크고 작은 안티고네의 순간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부당한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양심을 따를 것인가?


역사는 배신자들에게 가혹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통해 진보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배신이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가져왔다. 미국 독립은 영국 왕실에 대한 배신이었지만, 민주주의의 실험을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에 대한 배신이었지만, 자유·평등·박애의 이상을 선언했다. 물론 모든 혁명이 성공한 것은 아니며, 많은 경우 새로운 억압을 낳았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되었다. 완벽한 체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시스템은 자기 보존의 본능을 가진다. 진보는 그 시스템의 내부에서 나온 비판자들, 즉 배신자들의 용기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배신의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첫 번째 신호는 인지부조화다. 내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내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이 불편함을 억압하는 것이 순응이다. 조직이 비윤리적인 일을 하지만 월급을 받아야 하니 눈감는다. 가족이 잘못된 행동을 하지만 관계가 깨질까 봐 말하지 않는다. 사회가 부정의하지만 내 삶이 편안하니 외면한다. 이러한 선택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영혼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른다.

두 번째 신호는 정당화의 과잉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이나 체제를 지나치게 변호해야 한다고 느낄 때,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다. "모든 조직이 다 이래", "시스템이 원래 그래", "개인이 뭘 할 수 있겠어"와 같은 말들은 무력감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책임 회피의 수단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유는 이러한 변명을 거부하고 "나는 이것에 동의하는가?"라는 단순하지만 위험한 질문을 던진다.


배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외롭다. 집단에서 이탈하는 사람은 두 세계 사이에서 표류한다. 더 이상 과거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지만, 아직 새로운 공동체를 찾지 못했다. 이 고독은 배신의 가장 큰 대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추방은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형벌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용기는 흔하지 않으며, 순교자는 예외적이다. 우리는 모두 안전을 원하고, 사랑받기를 바라며, 소속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배신의 순간은 가장 깊은 연결의 기회이기도 하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표면적 조화를 깨지만,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을 연다. 거짓 위에 세워진 평화는 언젠가 무너지지만, 정직 위에 세워진 갈등은 성장의 기회가 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우리의 삶은 우리가 침묵하기 시작한 날 끝난다"고 말했다. 침묵은 안전을 주지만, 존엄을 앗아간다. 말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자유를 준다.


21세기는 충성과 배신의 경계가 더욱 흐려지는 시대다. 정보는 국경을 넘어 흐르고, 개인은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며, 전통적 권위는 도전받는다. 소셜 미디어는 내부 고발을 쉽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마녀사냥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고발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타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배신의 의무는 더욱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비판이 정당한 것은 아니며, 모든 폭로가 용기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배신은 개인적 이익이나 복수가 아니라, 더 큰 선을 위한 희생이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배신의 의무는 자율적 인간의 책임이다. 칸트는 계몽을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미성년 상태란 타인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우리가 집단의 판단을 무조건 받아들일 때, 권위의 명령을 질문 없이 따를 때, 우리는 스스로를 미성년자로 만든다. 성숙은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능력이다. 때로 그 판단은 우리가 속한 집단과 충돌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편안한 순응인가, 고독한 진실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오늘날 우리가 영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에 배신자였다. 미래 세대는 우리 시대의 순응자와 배신자를 어떻게 판단할까? 기후 위기 앞에서 침묵한 사람들, 불평등을 목격하고 외면한 사람들, 부정의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협력한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반대로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고 진실을 말한 사람들, 불편한 질문을 던진 사람들, 잘못된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될까?


배신의 의무는 도덕적 절대주의가 아니다. 모든 상황에서 저항하라는 것이 아니며, 모든 전통을 거부하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속적인 성찰의 요구다. 내가 충성하는 대상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가? 내 침묵이 누군가의 고통을 유지하는가? 내 순응이 부정의한 시스템을 강화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통해 세계를 만들며, 침묵 또한 하나의 선택이다.


결국 배신의 의무는 사랑의 표현이다. 진정으로 어떤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그 결함을 외면할 수 없다. 진정으로 어떤 이념을 믿는다면, 그것이 배반될 때 침묵할 수 없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아낀다면, 그들의 자기파괴를 방관할 수 없다. 배신은 종종 가장 깊은 형태의 충성이며, 비판은 때로 가장 진실한 형태의 사랑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세계에 산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성장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종종 배신처럼 느껴지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B0%B0%EC%8B%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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