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젯밤 잠들었던 사람과 오늘 아침 깨어난 사람이 동일한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언뜻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의식의 연속성이라는 철학적 난제의 핵심을 관통한다. 우리는 매일 밤 의식을 잃고, 매일 아침 다시 깨어난다. 그 사이의 공백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이 깨어난 존재를 어제의 나와 동일하게 만드는가?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는 인간정체성론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육체나 영혼의 동일성이 아니라 의식의 연속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로크에 따르면,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우리를 동일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실체'로서의 영혼을 강조했던 시대에, 로크는 기억과 의식의 연결이야말로 정체성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로크의 이론은 곧 심각한 반론에 직면했다. 18세기의 토머스 리드는 '용감한 장교의 역설'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한 소년이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고, 나중에 용감한 장교가 되어 전투에서 깃발을 탈취했으며, 늙어서는 장군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장교는 소년 시절을 기억하고, 장군은 장교 시절을 기억하지만 소년 시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로크의 이론에 따르면 장교는 소년과 동일인이고, 장군은 장교와 동일인이지만, 장군은 소년과 동일인이 아니다. 이는 동일성의 추이성을 위반하는 논리적 모순이다. A가 B와 같고 B가 C와 같다면 A는 C와 같아야 하는데, 기억 기반 이론은 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세기의 철학자들은 더욱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시드니 슈메이커는 '준기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준기억은 실제로 자신이 경험했든 아니든,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과 같은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기억의 인과적 연결을 강조하면서도 직접적인 기억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데릭 파핏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심리적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정체성은 기억뿐만 아니라 욕구, 의도, 성격, 가치관 등 모든 심리적 특성들의 연결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심리적 특성들이 적절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면, 직접적인 기억이 없더라도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핏의 이론은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유와 인격'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실제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엄격한 의미의 동일성이 아니라 심리적 연속성과 연결성이라는 것이다. 파핏은 극단적인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만약 당신의 뇌를 스캔하여 화성에 있는 다른 몸에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지구의 당신은 파괴된다면, 화성의 존재는 당신인가? 파핏은 이것이 죽음만큼 나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심리적 연속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당신의 의식을 두 개의 몸에 분리하여 이식할 수도 있다고 상상한다. 이 경우 두 사람 모두 당신의 기억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진짜 당신인가? 파핏의 답은 충격적이다. 둘 다 당신이 아니지만, 둘 다 당신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는 현대 신경과학의 발견과 만나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신경세포들은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오래된 연결을 제거한다. 기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회상될 때마다 재구성된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연구는 거짓 기억이 얼마나 쉽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 기억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정체성이 기억에 기반한다면, 그리고 그 기억이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 역시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분리뇌 환자들의 사례다. 심한 간질을 치료하기 위해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을 절단한 환자들은 놀라운 현상을 보인다. 로저 스페리와 마이클 가자니가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마치 하나의 두개골 안에 두 개의 독립적인 의식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좌뇌는 언어를 담당하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우뇌는 왼쪽 시야에 제시된 정보만 처리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한 실험에서 환자의 왼쪽 시야에만 '걸어라'라는 단어를 보여주자, 환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하지만 왜 그랬냐고 묻자 (이는 좌뇌에 묻는 것이다) 환자는 "물을 마시러 가려고요"라고 답했다. 좌뇌는 우뇌가 본 지시를 알지 못했지만,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의식적 경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만약 하나의 뇌가 둘로 나뉘어 두 개의 의식을 만들 수 있다면, 의식의 통일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정상적인 뇌를 가진 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통일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뇌가 만들어내는 편리한 착각인가? 대니얼 데닛은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에서 의식의 통일성이 실제로는 '다중 초안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뇌는 동시에 여러 처리 과정을 수행하고, 이것이 마치 하나의 일관된 서사처럼 경험되는 것은 사후적인 편집의 결과라는 것이다.
동양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불교의 무아론은 고정된 자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온(색수상행식)의 집합일 뿐이며, 영구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서양 철학이 의식의 연속성을 확립하려는 노력과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불교의 관점은 현대 인지과학의 발견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토마스 메칭거는 '자아는 환상인가'에서 통일되고 지속적인 자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실제로는 뇌의 정보처리 과정이 만들어내는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의식의 연속성에 대한 논의는 실천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법적 책임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현재 처벌한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심각한 기억상실이나 성격 변화를 겪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80년대 미국에서는 존 힌클리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을 때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정신적 연속성의 단절이 형사책임을 면제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나 변하는데, 언제 그 변화가 정체성의 단절이 되는가?
의료 윤리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기억과 인격을 잃어가는 과정은 의식의 연속성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사례다. 환자가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했을 때와 현재의 환자는 동일한 사람인가? 만약 과거의 그가 생명 연장 치료를 거부했지만 현재의 그는 (기억을 잃었음에도) 행복해 보인다면, 우리는 누구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가? 철학자 레베카 드레서는 이를 '자율성의 도전'이라고 불렀다.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이 더 권위를 가지는가?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사변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같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은 인간의 의식을 직접 조작할 가능성을 열고 있다. 만약 우리가 기억을 다운로드하거나 업로드할 수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의식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에서 인간 의식의 디지털 업로드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한다. 만약 당신의 뇌를 완벽하게 스캔하여 컴퓨터에 구현할 수 있다면, 그 디지털 존재는 당신인가? 그것은 의식을 가지는가? 그리고 만약 여러 복사본을 만들 수 있다면,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질문들이 수렴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과 마주한다. 의식의 연속성이란 객관적 사실인가, 아니면 주관적 경험인가? 파핏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자신의 연속성은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를 건드린다. 내일 아침 깨어날 사람이 나라는 확신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존재론적 확신이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그 환상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의식의 연속성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논리와 직관 사이의, 과학과 경험 사이의,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우리는 개념적으로는 자아의 유동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는 여전히 지속되는 자아를 살아낸다. 이 역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하게 질문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기억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답이 없을지라도, 그 자체로 우리를 더 깊이 사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유의 과정이야말로 아마도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그리고 연속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