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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27화

죽음의 공포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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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다른 생명체들이 본능적으로 생존을 추구하고 위험을 회피하는 동안, 우리만이 자신의 소멸을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찾아올 것임을 안다. 이 앎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인간을 철학자로 만들었고, 예술가로 만들었으며, 종교를 창조하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공포를 심어놓았다. 죽음의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좌우하며, 때로는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하는 실존적 불안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를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했고, 미라 제작에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연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면죄부를 샀고, 동양의 철학자들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을 추구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노화 방지 산업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고, 냉동인간 보존 기술에 투자하며, 영생을 약속하는 과학 연구에 열광한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지연시키거나, 초월하려는 시도다. 문화와 시대를 넘어 인류는 죽음 앞에서 동일한 불안을 느껴왔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렇다면 죽음의 공포는 정확히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표면적으로는 육체적 고통,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미완성된 꿈들에 대한 아쉬움 같은 구체적인 요소들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죽음의 공포는 근본적으로 무(無)에 대한 공포다.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전환, 의식의 완전한 소멸,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다.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이 지적했듯이, 죽음이 두려운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경험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도, 기쁨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 즉 완전한 부재의 상태다.


이 공포의 역설은 우리가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의 무수한 세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죽음 이후의 비존재는 그토록 두려운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한 주장이지만, 이것이 죽음의 공포를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비롯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이 공포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낸다. 어니스트 베커는 그의 퓰리처상 수상작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 문명 전체가 죽음의 공포를 관리하고 부정하기 위한 거대한 방어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신이 특별하고, 영속적이며, 의미 있는 존재라고 믿음으로써 죽음의 공포에 대처한다. 우리는 자녀를 낳고, 업적을 쌓고, 작품을 창조하며, 기억될 무언가를 남기려 한다. 종교는 영혼의 불멸을 약속하고, 예술은 작품을 통한 상징적 불멸을 제공하며, 과학은 인류의 진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 우리를 위치시킨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계속된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러한 방어 메커니즘을 약화시키는 독특한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전통적 종교의 쇠퇴는 많은 이들에게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을 앗아갔다. 핵가족화와 도시화는 공동체적 의미 구조를 해체시켰다. 의료 기술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더욱 가시화했다. 과거에는 노인들이 집에서 가족에 둘러싸여 죽었지만, 이제 죽음은 병원의 무균실에서 일어나는 의료적 사건이 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일상에서 격리시켰지만, 그것이 죽음의 공포를 줄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터부시하고 회피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현대의 개인주의는 죽음의 공포를 증폭시킨다. 자아가 모든 경험과 의미의 중심이 될 때, 그 자아의 소멸은 전우주의 소멸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내가 사라지면 나에게 세계는 끝나고, 나의 모든 기억과 관계와 경험은 무의미해진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생각이다. 반면 공동체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는 개인이 더 큰 집단의 일부로 여겨졌고, 죽음 이후에도 그 집단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고 믿었다. 조상숭배, 가문의식, 집단적 기억은 모두 개인의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의 공포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역사를 통틀어 인류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왔다.

첫째는 부정과 회피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삶에서 격리시키며,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흔한 대처 방식이지만, 가장 취약한 방식이기도 하다. 죽음의 현실은 결국 우리를 찾아오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더 큰 공포와 절망에 빠진다.

둘째는 초월과 승화다. 종교적 믿음, 철학적 체계, 예술적 창조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인류에게 위안을 제공해왔지만, 현대의 회의주의는 이러한 해결책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셋째는 수용과 직면이다.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한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최근의 심리학 연구들은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오히려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게 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하며, 현재를 더욱 충실히 살게 만든다. 말기 환자들을 연구한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앞둔 많은 이들이 깊은 평화와 수용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죽음의 공포가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오히려 그것을 직면하고 통합할 때, 우리는 더 진정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통찰을 더욱 발전시켰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 조건을 강조하면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본래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정한 가능성을 실현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 죽음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모든 선택은 연기될 수 있고, 모든 결정은 가역적이며, 따라서 아무것도 진정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죽음은 우리 삶에 한계를 부여하고,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의 공포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통합해야 할 삶의 일부다. 우리는 공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아마도 제거해서도 안 된다. 죽음에 대한 적절한 불안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삶을 소중히 여기게 하며,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문제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마비시키고 삶을 제한할 때다. 건강한 태도는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현재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실용적 차원에서, 이것은 몇 가지 구체적인 함의를 갖는다.

첫째, 우리는 죽음에 대해 더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침묵과 터부는 공포를 키울 뿐이다. 가족과 친구들과 죽음에 대해 솔직히 대화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사별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죽음이 불가피하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다. 관계를 돌보고, 가치를 실현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기여하는 삶은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는다.

셋째, 우리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죽음은 미래에 있지만,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 매 순간을 완전히 경험하고, 감사하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각각의 순간이 소중해진다. 우리가 언젠가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의미 있어진다. 우리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쓸지 신중히 선택한다. 죽음은 삶의 배경이자 맥락이며, 그것 없이는 삶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이 어둠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삶은 죽음 없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결국 죽음의 공포는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에게 철학과 예술과 종교를 선물했고,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했다. 우리는 이 공포를 완전히 정복할 수 없고, 아마도 정복해서도 안 된다. 대신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을 부정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수천 년 동안 현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지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산다. 그리고 바로 그 짧고 소중한 시간이, 공포에도 불구하고 또는 공포 때문에, 우리가 가진 전부이자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A3%BD%EC%9D%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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