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하와이 오아후섬의 진주만은 고요했다. 태평양 함대 소속 전함들이 정박해 있던 이른 아침, 미국 해군 장병들은 평화로운 주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전 6시 10분, 두 명의 미국 육군 레이더 조작원이 북쪽에서 접근하는 대규모 비행기 편대를 포착했다. 그러나 당직 장교는 이를 본토에서 도착 예정인 B-17 폭격기로 오인하고 무시했다. 오전 7시 48분, 후치다 미쓰오 중령이 이끄는 제1차 공격대 183대가 진주만 상공에 도착했다. 그는 "토라, 토라, 토라"라는 무전을 보냈다. 기습에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북쪽 하늘에서 나타난 일본 항공기들이 이 평온을 산산이 부수며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기습 공격 중 하나를 개시했다. 이 공격은 단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켰고,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진주만 공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의 극적인 변화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고,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독일령이었던 태평양 도서들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일본은 서방 열강과 협력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내부에서는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공황이 세계를 강타하자 일본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률이 치솟고 농촌은 파탄에 빠졌다. 이러한 경제적 곤경 속에서 군부와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했다. 관동군 소속 장교들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인의 소행으로 위장한 뒤, 이를 빌미로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이것은 도쿄 정부의 승인 없이 현지 군부가 독단으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놀랍게도 일본 정부는 이를 사후 승인했다. 책임 있는 장교들을 처벌하기는커녕, 1932년 2월까지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3월 1일에는 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으로 앉혔지만, 실질적 통치권은 일본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격렬했다.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고, 1932년 10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말고 만주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권고했다. 일본의 대응은 단호했다. 1933년 2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적 열기를 고조시켰다.
만주 점령은 일본 군부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시켰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암살했다. 범인들은 군사재판에서 가벼운 처벌만 받았고, 일부는 영웅으로 추앙받기까지 했다. 이후 내각에서 육군 장관과 해군 장관은 현역 장성만이 맡을 수 있다는 규정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내각을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장관직을 사임시키고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으면 내각이 성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6년 2월 26일에는 더욱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이토 마코토 전 수상,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등 여러 중신들을 암살했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후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민간 정치인들은 군부를 두려워했고, 군부의 요구에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작은 사건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빌미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시작했다. 3주 만에 베이징을 점령했고, 8월에는 상하이를 공격했다. 1937년 12월 난징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그곳에서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를 저질렀다. 6주간 지속된 난징 대학살에서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과 포로들이 살해되었고, 2만 명 이상의 여성이 강간당했다. 국제사회는 경악했지만, 일본은 멈추지 않았다. 1938년 10월 우한을 점령하고, 1939년에는 해난도까지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고 계속 저항했다. 일본은 예상과 달리 중국을 신속하게 굴복시키지 못했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일본 경제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다. 중국 침략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석유, 철, 고무 등 전략 자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원이 부족한 일본은 이러한 물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다. 특히 석유의 80퍼센트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미국의 대응은 점진적이었지만 점점 더 강력해졌다. 1930년대 초반 미국은 고립주의 정서가 강했고, 유럽과 아시아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의회는 일련의 중립법을 통과시켜 교전국에 대한 무기 판매를 금지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특히 난징 대학살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 여론이 변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7년 10월 시카고에서 유명한 "격리 연설"을 했다. 그는 침략국들을 전염병에 비유하며 이들을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여전히 전쟁 개입에 반대했고, 루스벨트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중립법을 수정하여 "현금지불-자국운송" 원칙 하에 교전국에 대한 무기 판매를 허용했다. 이는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를 돕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압박이 강화되었다. 1940년 7월, 미국은 일본에 대한 항공 연료와 고철 수출을 금지했다. 같은 달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로 진출했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틈을 타 베트남을 점령한 것이다. 9월에는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세계를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 이탈리아가 지배하는 지중해·아프리카, 일본이 지배하는 아시아·태평양으로 분할하는 협정이었다. 미국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었다. 1941년 4월 일본과 소련은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북쪽의 위협 없이 남방으로 팽창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점령했다. 이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향한 명백한 위협이었다. 루스벨트의 대응은 결정적이었다. 7월 26일, 미국은 일본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도 이에 동참했다. 이른바 ABCD 포위망(America, Britain, China, Dutch)이 완성된 것이다.
이 조치는 일본에게 치명적이었다. 일본은 석유 비축량이 2년분밖에 되지 않았고, 중국에서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석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일본 지도부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하나의 선택지는 중국에서 철수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은 협상에서 일본에게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 삼국동맹 폐기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 군부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었다. 1937년 이후 중국 전선에서 수십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만주국 수립 이후 일본은 막대한 자본을 만주 개발에 투자했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포기는 군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국내 정치적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선택지는 전쟁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는 풍부한 석유가 있었고, 영국령 말레이에는 고무와 주석이 있었다. 이들을 무력으로 점령하면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했다.
여기서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대담한 계획을 제시했다. 야마모토는 일본 해군에서 가장 미국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주미 일본 대사관 해군 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미국의 압도적인 산업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40년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일본의 12배였고, 조선 능력은 10배 이상이었다. 석유 생산량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야마모토는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나는 6개월에서 1년은 거침없이 싸울 수 있다. 그러나 2년, 3년이 된다면 전혀 자신이 없다." 그는 장기전이 되면 일본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명확했다. 개전 초기에 결정타를 날려 미국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고, 그 사이 빠르게 동남아시아 자원 지대를 확보한 뒤,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미국의 반격을 막는다. 장기간의 소모전으로 미국의 전쟁 의지를 꺾고, 결국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이었다.
진주만은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1941년 1월부터 야마모토와 그의 참모 겐다 미노루, 작전 계획의 실무 책임자인 후치다 미쓰오 중령은 공격 계획을 세밀하게 준비했다. 영감은 1940년 11월 영국 해군의 타란토 항구 기습에서 왔다.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호에서 발진한 소드피시 복엽기 21대가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이 정박해 있던 타란토 항구를 야간 기습하여 전함 3척을 침몰시키거나 대파시켰다. 이 작전은 항공모함 항공기만으로 적 함대를 무력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진주만은 타란토보다 훨씬 어려운 목표였다. 진주만의 수심은 12미터로 타란토의 20미터보다 얕았다. 기존의 항공 어뢰는 수심 30미터 이상에서만 작동했다. 일본 기술자들은 몇 개월간의 연구 끝에 나무 날개를 부착하여 어뢰의 진입 각도를 얕게 만드는 개조를 완성했다. 또한 전함의 두꺼운 장갑을 뚫을 수 있도록 40센티미터 철갑탄을 개조하여 폭탄으로 만들었다.
훈련은 가혹했다. 공격대는 연합함대의 정예 조종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규슈 남부 가고시마만에서 수개월간 반복 훈련을 했는데, 이곳의 지형이 진주만과 유사했다. 어뢰 투하, 급강하 폭격, 수평 폭격 등 모든 전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훈련이 계속되었다. 어뢰폭격기 조종사들은 고도 20미터에서 시속 200킬로미터로 비행하며 정확한 지점에 어뢰를 투하하는 기술을 익혔다. 급강하폭격기 조종사들은 4,000미터 상공에서 거의 수직으로 급강하하여 600미터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한 후 기체를 끌어올리는 위험한 기동을 반복했다. 9월에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해군 연습이 실시되었고, 진주만 공격 계획은 최종 승인을 받았다. 10월 중순 도조 히데키가 새로운 수상이 되면서 전쟁 준비가 가속화되었다. 도조는 육군 대장 출신으로 강경파의 대표였다.
11월 중순, 워싱턴에서는 마지막 외교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특사 구루수 사부로와 노무라 기치사부로 대사는 미국 측과 협상했다. 11월 20일 일본은 최종 제안을 내놓았다.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는 대신 미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해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11월 26일 이른바 "헐 노트"를 제시했다.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완전 철수, 중국 괴뢰 정권 불승인, 삼국동맹 실질적 폐기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이를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11월 26일 같은 날, 이미 출항 준비를 마친 일본 기동부대가 쿠릴 열도 히토카푸만을 출발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것이다.
기동부대는 항공모함 6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을 중심으로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보급함 3척, 잠수함 8척 등 총 67척으로 구성되었다. 항공모함들에는 총 414대의 항공기가 탑재되어 있었다. 지휘관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었다. 나구모는 수뢰전 전문가였지 항공전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서열상 그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기동부대는 엄격한 무선 침묵을 유지하며 북태평양의 험한 해역을 가로질렀다. 11월과 12월의 북태평양은 날씨가 매우 나빴지만, 이것이 오히려 은폐에 도움이 되었다. 짙은 안개와 거친 파도는 기동부대의 이동을 감추는 천연의 장막이었다. 상선들이 다니는 항로를 피해 북쪽으로 우회했기 때문에 발각될 가능성이 낮았다. 12월 2일, 도쿄에서 "니이타카야마노보레(새高山登れ, 니타카산을 올라라)"라는 암호 전문이 발신되었다. 12월 8일(현지 시각 12월 7일) 공격을 실행하라는 명령이었다. 12월 6일 오후 6시, 기동부대는 오아후섬 북쪽 약 370킬로미터 지점에 도달했다. 최종 공격 위치였다.
한편 미국 측에서도 전쟁의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일본의 외교 암호 "퍼플"을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워싱턴과 도쿄 사이의 통신을 가로채고 있었다. 11월 하순부터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11월 27일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과 해군 작전부장 해롤드 스타크는 태평양 지역 사령관들에게 전쟁 경고를 발송했다. 메시지에는 "일본과의 교섭이 중단되었다. 일본이 공격적 행동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경고는 모호했다. 일본의 공격 목표가 어디인지, 언제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없었다. 대부분의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일본이 필리핀, 태국, 말레이 등 동남아시아를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진주만이 공격받으리라고는 거의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와이는 본토에서 3,800킬로미터나 떨어진 대양 한가운데에 있었다. 일본 함대가 발각되지 않고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과 하와이 주둔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은 전쟁 경고를 받았지만 적절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 쇼트는 파괴 공작에 대비하여 항공기들을 한곳에 밀집 배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감시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공중 공격에는 완벽한 표적이 되는 배치였다. 킴멜은 정찰 활동을 강화했지만, 북서쪽 방향에 대한 정찰은 충분하지 않았다. 레이더도 새로 설치되었지만 훈련이 부족했고, 오전 7시 이후에는 가동을 중단하는 관행이 있었다. 12월 6일 저녁, 워싱턴에서는 일본의 외교 전문 해독이 완료되었다. 일본이 미국과의 외교 관계 단절을 통보할 것이며, 그 시각이 워싱턴 시각으로 12월 7일 오후 1시(하와이 시각 오전 7시 30분)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공격 개시 시각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료주의적 지연과 주말의 인력 부족으로 이 중요한 정보가 하와이로 신속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마셜 참모총장은 12월 7일 아침이 되어서야 킴멜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진주만에 도착한 것은 공격이 이미 시작된 후였다.
12월 7일 새벽 3시 42분, 미국 소해정 콘도르호가 진주만 입구에서 잠망경으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하고 구축함 워드호에 알렸다. 오전 6시 37분, 워드호는 진주만 입구에서 일본 소형 잠수함을 발견하고 포격하여 격침시켰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발사한 최초의 포탄이었다. 워드호의 함장은 즉시 상부에 보고했지만, 메시지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귀중한 시간이 흘렀다. 새벽 6시, 제1차 공격대 183대가 항공모함에서 이륙했다. 수평폭격기 49대, 급강하폭격기 51대, 어뢰폭격기 40대, 전투기 43대였다. 그들은 오아후섬을 향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갔다. 오전 7시 2분, 오파나 레이더 기지의 조지 엘리엇 일병과 조셉 록카드 일병은 북쪽 210킬로미터 지점에서 접근하는 대규모 편대를 포착했다. 이것은 미국 레이더가 포착한 최대 규모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를 받은 커미트 타일러 중위는 이를 캘리포니아에서 도착 예정인 B-17 편대로 판단하고 "걱정하지 말라(Don't worry about it)"고 답했다.
오전 7시 48분, 진주만은 평화로웠다. 많은 승조원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었고, 일부는 교회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판 당직자들은 일요일 아침의 나른함 속에서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포드 섬 동쪽의 전함 로우(Battleship Row)에는 전함 8척이 두 줄로 정박해 있었다. 바깥쪽 줄에는 네바다, 애리조나, 테네시, 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가 있었고, 안쪽 줄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가 있었다. 펜실베이니아는 건식 독에서 수리 중이었다. 7시 49분, 후치다 중령의 명령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후치다는 "토, 토, 토"라는 신호를 발신했다. "토츠게키(突撃, 돌격)"의 약자였다. 그리고 1분 후 "토라, 토라, 토라"를 발신했다. "타이거, 타이거, 타이거"라는 의미로, 기습에 완전히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첫 번째 폭탄은 휠러 육군 비행장에 떨어졌다. 거의 동시에 진주만 전역에서 폭발이 시작되었다. 케이트(B5N) 어뢰폭격기들은 고도 20미터로 낮게 날아와 전함들을 향해 어뢰를 투하했다. 발(Val) 급강하폭격기들은 사이렌 같은 굉음을 내며 거의 수직으로 급강하하여 폭탄을 떨어뜨렸다. 제로(A6M) 전투기들은 기총소사로 지상의 항공기들과 인원들을 공격했다. 하늘은 순식간에 일본 비행기로 가득 찼다. 포탄이 터지고, 기관총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뒤섞였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웨스트버지니아호는 7시 52분 첫 어뢰를 맞았다. 이어서 5분 안에 총 6발의 어뢰와 2발의 폭탄을 맞았다. 함장 머빈 베니언 대령은 파편에 복부를 관통당해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함교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계속 명령을 내리다가 전사했다. 부함장 에드워드 데이비슨 소령은 즉각 대응 침수(counter-flooding)를 명령했다.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반대편 구획에 물을 채워 균형을 잡은 것이다. 덕분에 웨스트버지니아호는 뒤집히지 않고 똑바로 선 채로 천천히 침몰했다. 이 결정은 나중에 배를 인양하고 수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오클라호마호는 더 비극적이었다. 7시 50분부터 8시 사이에 5발의 어뢰를 맞았다. 배는 빠르게 좌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대응 침수를 명령할 시간도 없었다. 승조원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기울어지는 배 안에서 탈출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8시 8분, 배는 150도 기울어 완전히 뒤집혔다. 선체가 물 밖으로 드러났다. 429명이 배 안에 갇혔다. 그 중 32명은 선체를 두드리며 구조를 요청했고, 구조대는 선체를 절단하여 그들을 구출하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드리는 소리는 하나둘씩 사라졌다. 마지막 생존자가 구조된 것은 12월 8일이었다.
애리조나호의 운명은 가장 극적이었다. 7시 55분경, 일본 수평폭격기가 투하한 800킬로그램짜리 개조 철갑탄이 2번 포탑 근처 갑판을 관통했다. 폭탄은 전방 탄약고 바로 위에서 폭발했다. 순간 거대한 화염구가 치솟았다. 탄약고에 저장된 수백 톤의 흑색화약이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폭발의 위력은 엄청나서 1,100톤짜리 전방 포탑이 공중으로 날아갔고, 배의 전반부가 산산조각 났다. 선체가 들썩거리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불과 9분 만에 애리조나호는 침몰했다. 1,177명의 승조원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이는 진주만 공습 전체 사망자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오늘날까지도 애리조나호의 선체에서는 하루에 약 9리터의 연료유가 새어나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것은 "애리조나의 눈물"이라 불린다.
네바다호는 유일하게 출항을 시도한 전함이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깃발 게양식을 준비하던 네바다호는 첫 공격에서 어뢰 1발을 맞았다. 그러나 기관이 가동 중이었고, 고위 장교들이 모두 상륙한 상태에서 부함장 프랜시스 토머스 중령이 지휘권을 잡았다. 그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항구 입구로 향하여 탈출하기로 한 것이다. 8시 40분경, 네바다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주만의 좁은 수로를 따라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일본 조종사들은 놀라움과 동시에 이것을 기회로 보았다. 만약 네바다호가 항구 입구에서 침몰하면 진주만 전체가 봉쇄될 수 있었다. 제2차 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네바다호에 집중했다. 연이은 폭격으로 네바다호는 화염에 휩싸였지만 계속 전진했다. 미국 함대 사령부는 항구가 봉쇄될 것을 우려하여 네바다호에게 좌초를 명령했다. 네바다호는 Hospital Point 근처 얕은 곳에 의도적으로 좌초했다. 이 영웅적 시도로 60명이 전사했지만, 진주만 항구는 막히지 않았다.
제2차 공격대 171대는 8시 50분경 도착했다. 첫 번째 공격이 혼란을 야기한 사이, 이제 미국 측의 대응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대공포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전투기들이 이륙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히캄 비행장, 휠러 비행장, 카네오헤 해군항공대, 에와 해병대 항공기지에서는 지상에 정렬되어 있던 항공기들이 파괴되었다. 총 188대의 미국 항공기가 파괴되고 159대가 손상되었다. 사보타주 방지를 위해 윙팁끼리 거의 닿을 정도로 밀집 배치되어 있던 항공기들은 일본 공격기들에게 완벽한 표적이었다. 한 발의 기총 소사나 폭탄이 여러 대를 한꺼번에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일본의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조종사들 중 일부는 용감하게 맞섰다.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는 휠러 비행장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 차를 몰아 할레이와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P-40 전투기를 타고 이륙하여 일본기와 교전했다. 웰치는 4대, 테일러는 2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그들은 탄약을 재장전한 후 다시 이륙하여 추가로 일본기를 격추했다. 두 사람 모두 훈장을 받았다. 대공포 사수들도 점차 정신을 차리고 반격했다. 일본은 제1차 공격에서 9대, 제2차 공격에서 20대, 총 29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64명의 조종사와 승무원이 전사했다. 미국의 손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일본 입장에서도 결코 가벼운 손실이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정예 조종사들이었고, 대체하기 어려운 인력이었다.
공격은 9시 45분경 종료되었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진주만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늘에서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전함들이 침몰하거나 불타고 있었고, 수면은 연료유로 뒤덮여 불타고 있었다. 두꺼운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철저한 파괴였다. 일본 조종사들이 항공모함으로 돌아갔을 때, 일부 지휘관들은 제3차 공격을 주장했다. 후치다 중령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진주만의 석유 저장 시설, 수리 시설, 잠수함 기지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들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고, 파괴한다면 미국 함대는 수개월간 진주만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 지휘관 나구모 중장은 거부했다. 일차적 목표인 전함 파괴는 달성했고,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더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오후 1시 30분, 일본 기동부대는 철수를 시작했다. 그들은 왔던 길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여 12월 23일 일본으로 귀환했다.
진주만에 남겨진 것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전함 4척(애리조나,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 웨스트버지니아)이 침몰했다. 전함 4척(네바다,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테네시)이 대파되었다. 순양함 3척(헬레나, 호놀룰루, 롤리)이 손상되었다. 구축함 3척(카신, 다운즈, 쇼)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손실은 인명이었다. 2,403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2,008명이 해군, 109명이 해병대, 218명이 육군, 68명이 민간인이었다. 1,178명이 부상당했다. 애리조나호의 1,177명, 오클라호마호의 429명을 합치면 전체 사망자의 3분의 2 이상이 이 두 배에서 나왔다. 많은 희생자들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일부는 침대에서, 일부는 식당에서, 일부는 갑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보면 일본의 승리는 불완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항공모함 3척이 모두 무사했다는 점이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웨이크섬으로 항공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공격 당일 진주만에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렉싱턴호는 미드웨이섬으로 항공기를 수송 중이었다. 사라토가호는 샌디에이고에서 수리 중이었다. 만약 이 항공모함들이 진주만에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진주만의 인프라가 거의 손상되지 않은 것도 중대한 실책이었다. 450만 배럴의 연료유가 저장된 거대한 탱크들은 지상에 그대로 있었다. 만약 이것들이 파괴되었다면 미국 함대는 최소 6개월에서 1년간 진주만을 기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리 시설인 건식 독과 기중기들도 온전히 남아 있어서, 손상된 함선들을 빠르게 수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침몰한 전함 8척 중 6척이 인양되어 수리된 후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캘리포니아호와 웨스트버지니아호는 1944년 레이테만 해전에 참가했다. 네바다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다.
진주만 공습의 소식은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 본토에서는 일요일 오후,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듣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뉴스 속보가 나왔다. CBS 라디오의 존 찰스 데일리는 오후 2시 22분(동부 표준시) 긴급 뉴스를 발표했다. "일본이 하와이와 필리핀을 공격했습니다." 충격과 분노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일요일 오후가 전쟁의 공포로 바뀐 것이다. 12월 8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가 되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치욕 속에 영원히 기억될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 해군과 공군의 계획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루스벨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진주만뿐 아니라 일본이 거의 동시에 필리핀, 괌, 웨이크섬, 말레이, 홍콩, 태국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국 국민은 이미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우리의 영토와 이익에 대한 위협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습 공격에 대한 필연적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연설은 6분 30초 동안 계속되었고, 의회는 33분 만에 대일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상원은 만장일치, 하원은 388대 1로 찬성했다.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사람은 몬태나주 하원의원 지넷 랜킨이었다. 그녀는 평화주의자이자 평생 전쟁 반대 운동가였다. "여성으로서 나는 전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 찬성표를 던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는 전쟁 개입 문제로 깊이 분열되어 있었다. 1940년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88퍼센트가 유럽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 우선 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는 8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강력한 고립주의 단체였고, 찰스 린드버그 같은 유명 인사들이 참전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진주만은 모든 것을 바꿨다. 하룻밤 사이에 미국은 하나로 뭉쳤다. 고립주의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기억하라, 진주만을(Remember Pearl Harbor)!"이라는 구호가 전국에 퍼졌다. 이것은 포스터, 노래, 연설, 그리고 일상 대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진주만은 단순한 군사 공격이 아니라, 미국의 자존심과 정의감을 공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요일 아침에 기습했다는 사실은 "비겁한 공격", "배신 행위"로 규정되었고, 일본에 대한 분노는 전쟁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미국의 전쟁 동원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다. 진주만 공습 직후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징병 사무소 앞에 줄을 섰다. 1941년 12월 현재 약 180만 명이던 미군 병력은 1945년 8월에는 1,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산업 생산은 전쟁 경제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자동차 공장은 탱크와 항공기를 만들었고, 조선소는 24시간 가동되었다. 1941년 미국은 항공기 19,433대를 생산했다. 1944년에는 96,318대를 생산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총 30만 대 이상의 항공기를 생산했다. 조선 분야는 더욱 놀라웠다. 헨리 카이저가 개발한 리버티 함선은 대량 생산 기법으로 평균 42일 만에 건조되었다. 가장 빠른 기록은 4일 15시간 30분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항공모함 141척, 전함 10척, 순양함 48척, 구축함 355척, 잠수함 203척을 건조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항공모함 17척, 전함 2척을 건조하는 데 그쳤다. 산업력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히틀러는 삼국동맹조약에 따라 일본을 지지한다며 선전포고를 했지만, 이것은 그의 가장 큰 전략적 실책 중 하나였다. 미국은 이제 공식적으로 양면 전쟁에 돌입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유럽 우선(Europe First)" 전략에 합의했다.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이므로 먼저 격파한 후 일본을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도 일본의 진격을 막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1942년 초반 일본의 공세는 파죽지세였다. 12월 10일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와 레퍼스호가 말레이 해상에서 일본 항공기에게 격침당했다. 12월 23일 웨이크섬이 함락되었다. 12월 25일 홍콩이 항복했다.
1942년 1월 2일 마닐라가 함락되었다. 2월 15일 싱가포르가 함락되면서 8만 명의 영국군이 항복했다. 처칠은 이것을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고 불렀다. 3월 8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랑군이 함락되었다. 5월 6일 필리핀의 코레히도르 요새가 함락되면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철수했다. 그는 "나는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2년 5월 7-8일 산호해 해전에서 미국과 일본 항공모함이 최초로 맞붙었다. 양측 모두 항공모함 1척을 잃었지만,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침공은 저지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진격이 멈춘 첫 번째 전투였다. 그리고 한 달 후 미드웨이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왔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여 미국 항공모함을 유인한 뒤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여 공격을 미리 알고 있었다. 6월 4일부터 7일까지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은 일본 항공모함 4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을 격침시켰다. 이 4척은 모두 진주만 공격에 참가했던 주력 항공모함들이었다. 일본은 또한 숙련된 조종사 수백 명을 잃었다. 이것은 일본 해군에게 치명타였다. 미드웨이 이후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8월 7일 미국은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첫 반격을 시작했다. 6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섬에서 철수했다. 이후 미국은 "개구리 뛰기(island hopping)" 전략으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했다. 1943년 11월 타라와, 1944년 2월 콰잘린, 6월 사이판, 7월 괌, 10월 레이테를 점령했다. 레이테만 해전(1944년 10월 23-26일)에서 일본 해군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큰 해전이었고, 일본은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11척을 잃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4월 오키나와가 함락되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고, 일본군 10만 명, 미군 1만 2천 명, 오키나와 민간인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가미카제 특공 공격을 사용했다. 이는 일본이 얼마나 절망적 상황에 빠졌는지를 보여주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침공했다.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했다.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갑판에서 공식 항복 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연합국 대표로 서명을 받았다. 일본 대표는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와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였다. 3년 8개월 26일간의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진주만에서 시작된 전쟁이 진주만의 복수로 끝난 것이다.
전쟁의 대가는 막대했다. 일본은 군인 230만 명, 민간인 80만 명 등 총 310만 명이 사망했다. 중국은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군인 41만 명이 전사했다. 그 중 태평양 전쟁에서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1945년 3월 9-10일 도쿄 대공습에서는 하룻밤에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는 즉시 21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후 방사능 피해로 수십만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 진주만 공습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의회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10개월간 조사를 실시했다. 킴멜 제독과 쇼트 중장은 직무 태만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적절한 경계 태세를 갖추지 못했고,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두 사람은 강등되고 군에서 퇴역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의 정보기관들도 중요한 정보를 제때 전달하지 못했고, 일본의 기습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이 어딘가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주만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루스벨트가 의도적으로 진주만을 희생시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신빙성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진실은 더 단순하고 교훈적이다. 정보의 실패, 관료주의적 비효율, 평화 시기의 안일함, 그리고 "여기서는 일어날 리 없다"는 위험한 믿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진주만 공습은 정보 실패의 전형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미국은 많은 경고 신호를 포착했지만, 이를 제대로 연결하고 해석하지 못했다. 일본 외교 암호를 해독하여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공격 목표가 어디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관이 진주만의 함선 배치 상황을 도쿄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것이 공격 준비를 의미한다고 판단하지 못했다. 일본 함대가 히토카푸만에 집결했다는 정보도 있었지만, 그것이 진주만을 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더가 대규모 편대를 포착했지만, B-17 폭격기로 오인했다. 진주만 입구에서 소형 잠수함이 격침되었지만,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각각의 정보는 그 자체로는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모두 합치면 명백한 경고였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들이 서로 다른 부서와 기관에 흩어져 있었고, 이를 통합하여 분석하는 시스템이 없었다는 점이다. 육군과 해군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고, 워싱턴과 하와이 사이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훈은 전후 미국 정보 체계 개편으로 이어졌다. 1947년 중앙정보국(CIA)이 설립되었고,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국가정보국장(DNI)이 설치되어 정보 기관들을 통합 조정하게 되었다.
진주만은 또한 군사 기술의 혁명을 보여주었다. 항공모함과 항공기가 전함을 대체하는 새로운 해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전함은 해군력의 상징이었다. 두꺼운 장갑과 거대한 포는 무적의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주만은 항공기가 전함을 무력화할 수 있음을 극적으로 입증했다. 수백만 달러를 들여 건조한 전함들이 몇만 달러짜리 항공기에 의해 불과 몇 분 만에 파괴되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의 주요 해전들—산호해, 미드웨이, 필리핀해, 레이테만—은 모두 항공모함 간의 대결이었다. 전함들은 점차 보조적 역할로 밀려났고, 대공 지원이나 상륙작전 화력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야마토, 무사시 같은 일본의 거대 전함들도 결국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 전함의 시대는 끝났고, 항공모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이 전환을 입증했지만, 결국 같은 무기로 패배했다.
진주만 공습은 국제법과 전쟁 윤리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선전포고 없는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었다. 1907년 헤이그 협약 제3조는 "적대 행위의 개시는 이유를 명시한 선전포고 또는 조건부 선전포고를 포함하는 최후통첩에 의하지 않고는 개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미국에 최후통첩을 전달할 계획이었다. 14부로 된 긴 전문을 작성했고, 마지막 14부는 외교 관계 단절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워싱턴 시각 12월 7일 오후 1시(하와이 시각 오전 7시 30분)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공격 개시 30분 전에 통보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선전포고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암호 해독과 타이핑 작업이 지연되었다. 일요일 아침에 출근한 직원들이 부족했고, 영문 타이핑이 느렸다. 결국 노무라 대사와 구루수 특사가 코델 헐 국무장관을 만난 것은 오후 2시 20분이었다. 이미 진주만 공격이 시작된 지 2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헐 국무장관은 전문을 읽은 후 격노하여 말했다.
"나는 50년간 공직 생활을 해왔지만, 이렇게 거짓말과 왜곡으로 가득 찬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기습 공격", "배신 행위", "비열한 공격"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심지어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독일 외교관들조차 이러한 방식에 당혹감을 표했다. 히틀러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을 환영했지만,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라는 방식에는 비판적이었다. 전후 도쿄 재판에서 진주만 공습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상징하는 핵심 증거로 제시되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들은 평화에 대한 죄로 기소되었고, 그 중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재판에서 진주만 공습이 자위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재판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43년 4월 18일 부겐빌섬 상공에서 미국 전투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여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 하에 암살 작전을 실행했다. 진주만의 복수였다.
진주만 공습의 인간적 차원은 수천 개의 개인적 비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리조나호의 밴드 멤버 21명은 함께 전사했다. 그들은 8시에 예정된 깃발 게양식을 위해 갑판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오클라호마호에서는 제임스 워드 선임 일등병이 탈출구를 찾아 동료들을 안내하다가 자신은 배에 남아 익사했다. 그의 유해는 2019년에야 신원이 확인되었다. 웨스트버지니아호의 도리스 밀러는 흑인 급사였다. 인종 차별이 심하던 당시 해군에서 흑인들은 전투 병과에 배치되지 못했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자 밀러는 부상당한 함장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훈련받지 않은 대공포를 조작하여 일본기 1대 이상을 격추했다. 그는 최초로 해군 십자 훈장을 받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다. 밀러는 1943년 리스컴베이호가 일본 잠수함에 격침되었을 때 전사했다. 그는 27세였다.
쌍둥이 형제들의 이야기도 비극적이다. USS 애리조나호에는 63쌍의 형제들이 승선하고 있었고, 그 중 23쌍이 함께 전사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5형제가 모두 전사한 설리번 가족이다. 그들은 USS 주노호에 함께 승선했다가 1942년 11월 과달카날 전투에서 배가 격침되면서 모두 전사했다. 이 비극을 계기로 미국은 "유일 생존자 정책(Sole Survivor Policy)"을 도입하여, 한 가족의 여러 형제가 같은 부대나 함선에 배치되지 않도록 했다. 진주만에는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들은 전날 밤 아내와 다툰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았고, 어떤 이들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생존자들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왜 자신은 살고 전우는 죽었는가?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전후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일본을 점령했고,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의 재건을 이끌었다. 미국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 아시아의 동맹국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이 발효되었고, 일본은 전쟁 포기를 선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게 되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일본은 경제 기적을 이루었고, 1968년 국민총생산(GNP)에서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양국의 화해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미국인들에게 진주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고,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분노도 컸다. 일본에서는 원폭 피해와 전쟁 패배의 트라우마가 깊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고, 경제적 상호의존이 깊어졌다. 1975년 히로히토 천황이 미국을 방문했고, 포드 대통령과 만났다. 1991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미야자와 총리와 함께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하려 했지만, 진주만 생존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16년 12월 27일,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진주만의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했다. 아베는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공식 사과는 아니었지만, 위령과 화해의 의미가 담긴 방문이었다. 이에 앞서 2016년 5월 오바마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는 원폭 희생자들을 추도하며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진주만과 히로시마, 두 비극의 현장을 양국 정상이 함께 방문함으로써 역사적 화해의 상징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진주만은 여러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되었다. 매년 150만 명 이상이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한다.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 위에 세워진 하얀 기념관은 수면 위에 떠 있는 듯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건축가 알프레드 프라이스가 설계했다. 기념관 중앙의 전시실에는 그날 전사한 1,177명의 이름이 대리석 벽에 새겨져 있다. 방문객들은 유리 바닥을 통해 수중에 잠긴 전함의 잔해를 볼 수 있다. 여전히 매일 약 9리터의 연료유가 선체에서 새어나와 수면으로 떠오른다. 이것은 "애리조나의 눈물"이라 불린다. 80년이 넘었지만 전함은 여전히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진주만 생존자들은 사후 애리조나호에 유해를 안치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들은 죽어서도 전우들과 함께하기를 원한다. 마지막 생존자가 세상을 떠나면, 애리조나는 영원히 1,177명의 수중 무덤이 될 것이다.
진주만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정보의 중요성이다. 진주만은 정보 실패의 고전적 사례다. 충분한 경고 신호가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연결하고 해석하지 못했다. 현대에도 9/11 테러 이전에 여러 경고가 있었지만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빅데이터 시대에 정보는 넘쳐나지만, 올바른 정보를 선별하고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둘째, 안일함의 위험이다. "여기서는 일어날 리 없다"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진주만은 보여준다. 평화 시기의 사고방식으로는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
셋째, 기술의 변화다. 진주만은 군사 기술의 혁명적 변화가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사이버전, 드론,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이 전쟁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의 승리 방정식에 집착하면 패배한다.
넷째, 외교 실패의 대가다. 진주만으로 가는 길은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사변, 국제연맹 탈퇴, 중일전쟁, 석유 금수 조치 등 일련의 사건들이 축적되면서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각 단계에서 외교적 해결의 기회가 있었지만, 양측 모두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은 군부의 압력과 국내 정치 때문에, 미국은 중국 지원과 도덕적 입장 때문에 타협하지 못했다. 전쟁은 마지막 수단이어야 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엄청난 파괴와 고통을 가져온다.
다섯째, 전쟁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야마모토는 6개월에서 1년은 싸울 수 있다고 했지만, 전쟁은 그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이 한두 번의 패배 후 협상에 나서리라 기대했지만, 정반대가 일어났다. 진주만은 미국을 각성시켰고, 전쟁 의지를 불태웠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끝내는 것은 어렵다. 전쟁의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여섯째, 화해의 가능성이다. 진주만에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끝났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75년이 지난 지금, 일본과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밀한 동맹국 중 하나다. 경제, 안보,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이것은 화해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독일과 프랑스, 베트남과 미국도 비슷한 화해의 길을 걸었다.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과거에 갇혀서도 안 된다. 역사를 기억하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진주만은 또한 전쟁의 비인간성을 상기시킨다. 진주만 공습으로 2,403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숫자가 아니다. 각각은 이름과 얼굴과 이야기를 가진 개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꿈과 희망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일본 조종사들도 인간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일부는 공격을 주저하기도 했다. 후치다 미쓰오는 전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평화 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미국 각지를 다니며 화해와 용서를 설교했다. 전쟁은 국가와 이념 사이의 충돌이지만, 결국 고통받는 것은 개인이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 상공에 나타난 일본 비행기들은 단지 폭탄과 어뢰만 투하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국의 고립주의는 끝났고, 미국은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나섰다. 태평양은 격전지가 되었고, 항공모함이 해전의 주역이 되었다. 원자폭탄이 등장하여 인류는 자멸의 위협 앞에 섰다. 전후 세계 질서가 재편되었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패배에서 재건으로, 군국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아시아의 식민지들은 독립했고,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다. 진주만은 이 모든 변화의 촉매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을 "치욕의 날"이라 불렀다. 그것은 미국에게는 확실히 치욕이었고, 충격이었고,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각성의 날이었다. 진주만은 미국을 잠에서 깨웠고, 거인을 분노케 했다. 야마모토는 "우리는 잠자는 거인을 깨웠고, 그에게 끔찍한 결의를 심어주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의 진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내용은 정확했다. 진주만 이후 미국의 산업력, 인적 자원, 그리고 결의가 총동원되었다. 그 결과 4년도 안 되어 일본은 완전히 패배했다.
오늘날 우리는 진주만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을 맞춘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 북한의 핵 위협, 중동의 불안정,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 등 갈등의 씨앗은 도처에 있다. 경제 제재가 부과되고, 군사력이 증강되고, 외교가 실패하는 모습은 1930년대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주만의 교훈은 명확하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외교적 해결을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 동시에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정보를 경시하지 말고, 안일함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진정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진주만의 수면 아래, 애리조나호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1,177명의 영혼과 함께. 매일 새어나오는 기름 방울은 그날의 비극을 증언한다.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되새기고, 평화의 소중함을 다짐한다. 이것이 진주만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기억하되 증오하지 말라. 경계하되 도발하지 말라. 강하되 교만하지 말라.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그날의 불꽃과 연기 속에서, 현대 세계의 윤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진주만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것이 던지는 질문들—전쟁과 평화, 경계와 방심, 복수와 화해, 정의와 용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다.
진주만 공습의 유산은 군사적·정치적 차원을 넘어 문화와 기억의 영역으로도 확장되었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진주만은 끊임없이 재현되고 재해석되어 왔다. 1970년 영화 "도라! 도라! 도라!"는 일본과 미국 합작으로 제작되어 양측의 관점을 균형있게 보여주려 했다. 2001년 마이클 베이 감독의 "펄 하버"는 로맨스와 액션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대에게 그날의 사건을 전달했다. 수많은 다큐멘터리, 책, 회고록들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이러한 문화적 재현은 진주만을 역사책의 페이지에서 끄내내어 살아있는 기억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전도 생겼다. 생존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2021년 진주만 공습 80주년 당시 생존자는 약 80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90대 후반이었다. 마지막 생존자가 세상을 떠나면, 진주만은 직접적 기억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완전히 전환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그리고 다른 20세기 비극들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있는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할 것인가? 어떻게 사건의 감정적 무게와 도덕적 교훈을 보존할 것인가? 진주만에서는 여러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하여 방문객들이 그날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보존한다.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가르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주만을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질문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예방할 수 있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진주만은 또한 전쟁 기념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누구를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애리조나 기념관은 미국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그러나 일본 조종사들은? 그들도 명령에 따른 군인들이었고, 많은 이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다가 후에 전사한 일본 조종사들의 유족들도 아픔을 안고 산다. 전쟁의 양쪽 모두에 인간적 비극이 있다. 2000년대 들어 애리조나 기념관 방문객 센터는 일본어 안내를 추가했고, 일본인 방문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것은 적대에서 이해로, 분노에서 애도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부 진주만 생존자들과 유족들은 일본에 대한 어떠한 화해의 제스처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상처는 여전히 깊었다.
진주만 공습은 미국 내 일본계 미국인들의 운명에도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습 직후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의심과 적대감이 급증했다. 1942년 2월 19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다. 이것은 서부 해안 지역의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을 강제 수용소에 격리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 중 3분의 2는 미국 시민권자였고, 많은 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였다. 그들은 단지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황량한 내륙 지역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의 환경은 열악했다. 타르 페이퍼로 지은 막사, 철조망, 감시탑이 있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원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싸웠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제442연대전투단은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는 돌아갈 나라가 없다. 여기가 우리 조국이다"라며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계 미국인들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그들이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 많은 이들은 자신의 집과 사업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지역사회의 편견도 여전했다.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는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재조명되었다.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시민자유법(Civil Liberties Act)에 서명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생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적 실수를 인정합니다"라고 레이건은 말했다. 이것은 늦었지만 중요한 정의의 실현이었다. 오늘날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는 국립역사유적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만자나르, 툴레 레이크 같은 수용소 터에는 방문객 센터가 세워졌다. 이것은 진주만이 촉발한 또 다른 비극의 현장이며, 공포와 편견이 어떻게 기본적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진주만 공습의 전략적 유산은 미국의 군사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다시는 진주만 같은 기습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미국의 국방 정책을 형성했다. 전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정보 기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CIA, NSA, DIA 등 수많은 기관들이 창설되었고, 전 세계에 정보 수집 시설을 배치했다. 조기경보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레이더 네트워크가 확장되었다. 냉전 시대 내내 미국은 소련의 기습 핵공격 가능성에 대비했다. 전략공군사령부(SAC)의 폭격기들은 24시간 공중 대기 체제를 유지했다.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는 산속 깊은 곳에 건설되어 핵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진주만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진주만은 또한 미국의 전진 배치 전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협을 조기에 탐지하고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전 세계에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 오늘날 미국은 약 800개의 해외 군사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국가의 해외 기지를 합친 것보다 많다. 일본, 한국,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에 주둔하는 미군은 "다시는 본토가 공격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진 방어선이다. 이러한 전략은 막대한 비용을 수반하지만, 미국의 안보 사상에서 진주만의 교훈은 여전히 강력하다. 선제적으로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본토 방어보다 낫다는 논리다.
21세기 들어 진주만은 새로운 맥락에서 인용되기 시작했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이후, 많은 논평가들이 이것을 "새로운 진주만"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두 사건은 유사점이 있다. 둘 다 미국 본토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고,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규모 군사 행동을 촉발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이후 대테러 전쟁을 선포했고, 이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처럼, 9/11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진주만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었지만, 9/11은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공격이었다. 대응 방식도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은 명확한 승리와 함께 끝났지만, 대테러 전쟁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한 종결점이 없다.
진주만과 9/11의 비교는 역사적 유추의 함정도 보여준다. 역사는 교훈을 제공하지만, 단순한 반복은 아니다. 각 상황은 고유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진주만의 교훈을 21세기에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진주만 이후 일본계 미국인 수용은 오늘날 명백한 실수로 인정된다. 그러나 9/11 이후 무슬림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증가했을 때, 역사의 교훈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공포는 이성을 압도하고, 집단적 처벌의 유혹은 여전히 강하다. 역사를 아는 것과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진주만은 또한 선제공격의 윤리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공격했고, 이것은 비난받았다. 그러나 전후 미국도 여러 차례 선제공격을 실시했다. 1981년 이스라엘의 이라크 원자로 폭격을 묵인했고, 2003년 이라크 침공은 사실상 선제 전쟁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부시 독트린"을 통해 선제공격을 정당화했다. 위협이 임박했을 때 공격받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비판자들은 이것이 위험한 선례를 만든다고 우려했다. 모든 국가가 선제공격을 정당화한다면, 국제법과 질서는 무너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진주만을 정당화할 때 사용한 논리—미국의 경제 제재가 생존에 대한 위협이므로 선제적 자위권을 행사했다—와 유사한 주장이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은 1930년대와 놀라운 유사점을 보인다. 중국의 부상은 일본의 부상과 비교된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 기술 패권 경쟁, 대만 문제를 둘러싼 긴장은 1930년대 미일 관계를 연상시킨다. 일부 학자들은 "투키디데스의 함정"—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국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경고한다. 그들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30-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이러한 패턴의 예라고 지적한다. 미국과 중국이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남중국해에서의 군사적 긴장, 대만 해협에서의 충돌 위험, 경제 제재와 보복의 악순환은 모두 우려스러운 신호다.
그러나 역사가 운명은 아니다. 1930년대와 다른 점도 많다. 핵무기의 존재는 대규모 전쟁의 계산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며, 이것을 양국 지도부도 잘 안다. 경제적 상호의존도 훨씬 깊다. 중국은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고, 미국 기업들은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한다.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경제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 국제기구와 규범도 1930년대보다 훨씬 강하다. UN, WTO, 국제법은 완벽하지 않지만, 갈등을 관리하는 틀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1930-40년대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다. 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수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안다.
진주만의 궁극적 교훈은 아마도 전쟁의 예방 가능성과 불가피성 사이의 긴장일 것이다. 한편으로 진주만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선택과 실수의 결과였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사회가 더 강력하게 대응했다면, 일본 내 온건파가 더 힘을 가졌다면, 미일 협상이 더 유연했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진주만은 필연이 아니라 일련의 실패의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구조적 요인들—일본의 자원 부족과 팽창 욕구, 미국의 중국 지지와 도덕적 입장, 양국의 국내 정치—은 타협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진주만은 어쩌면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긴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외교를 강화하고, 오해를 줄이고, 신뢰를 구축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을 심화해야 한다. 동시에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 강력한 억지력을 유지하고,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적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보완적이다. 강력한 방어력은 전쟁을 억지하고, 이것이 외교를 위한 공간을 만든다. 반대로 성공적인 외교는 군비 경쟁을 완화하고, 자원을 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진주만의 교훈은 어느 한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2021년 진주만 공습 80주년 기념식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축소되어 진행되었다.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참석했다. 그들은 이제 100세에 가까운 나이였다. 한 생존자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곧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들은 애리조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8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당부했다. "역사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세요." 이것이 진주만 생존자들이 남기는 메시지다.
진주만은 종료되지 않은 이야기다. 물리적으로 공격은 1941년 12월 7일에 끝났지만, 그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하는 매년 150만 명의 사람들, 학교에서 진주만을 배우는 학생들,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정치인들, 비슷한 위기에 직면한 군사 전략가들—그들 모두에게 진주만은 살아있는 역사다. 침몰한 전함에서 여전히 새어나오는 기름방울처럼, 진주만은 계속해서 과거를 현재로 가져온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섬에서 일어난 사건은 세계를 바꿨다. 2시간도 안 되는 공격이 3년 8개월의 전쟁을 촉발했고,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세계 질서를 재편했다. 그날 아침 진주만의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과 어뢰는 단지 강철과 화약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역사의 전환점이었고, 한 시대의 종말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 일본의 평화헌법, 동아시아의 안보 체제, 핵무기의 그림자—이 모든 것의 뿌리에 진주만이 있다.
애리조나 기념관의 추모 벽에 새겨진 1,177개의 이름은 단순한 명단이 아니다. 각각은 잃어버린 미래, 이루지 못한 꿈, 끝나지 못한 이야기다. 그들은 전쟁의 진정한 대가를 증언한다. 숫자와 통계가 아니라, 개개인의 인간이 치르는 대가. 진주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책임.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을 책임. 증오를 넘어 이해로, 복수를 넘어 화해로 나아갈 책임.
진주만의 물속 깊은 곳에서, 애리조나호는 침묵 속에 누워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웅변적이다. 그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평화의 소중함을,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 가진 엄청난 무게를 말한다. 태양이 진주만의 수면에 반사될 때, 우리는 80년 전 그날 아침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 교훈을 배웠는가?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가? 진주만은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A7%84%EC%A3%BC%EB%A7%8C%20%EA%B3%B5%EC%8A%B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