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기억의 건축학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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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가 1906년부터 1922년까지 집필한 7권의 장편소설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한 회상록이 아니다. 이 작품은 기억과 시간, 그리고 의식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자,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문학적으로 구현한 기념비적 성취다. 프루스트는 이 방대한 작품을 통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1913년부터 세상에 내놓기 시작한 이 소설로 출판사들로부터 수차례 거절을 당했다. 한 출판사는 712쪽의 원고를 읽고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그는 자비로 첫 권을 출판했고, 예상과 달리 극찬이 쏟아졌다. 제2권은 1919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출간된 이 소설의 마지막 세 권은 작가 사후에 출판되었다. 프루스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원고를 수정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이 작품이 그의 삶 자체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1922년 10월 에티엔 드 보몽 백작을 만나러 가던 중 감기에 걸렸고, 그것이 기관지염으로 악화되어 11월 18일 죽음을 맞았다. 죽기 전까지도 그는 작품 수정에 매진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생을 이 소설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 타임스와 르 몽드 등 세계 유력 일간지에서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작품이 탄생했다.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비자발적 기억'이다.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이 과거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자발적 기억에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면인 마들렌 에피소드가 바로 이를 보여준다. 어느 겨울날, 집에 돌아온 화자를 본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홍차를 권한다. 어머니는 조가비 모양의 마들렌 과자를 사오게 했다. 화자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미로운 쾌감이 몰려온다. 그 맛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주던 마들렌의 맛이었다. 그 깨달음과 함께 콩브레 근방의 마을과 정원,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찻잔에서 솟아났다. 이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장벽을 뚫고 과거가 현재 속으로 침투하는 신비로운 경험이며, 프루스트가 말하는 '진정한 시간'의 발견이다.


감각이 화자에게 이전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 비자발적 기억은 의도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과거의 껍데기만을 건져올릴 뿐이다. 하지만 감각적 경험이 우연히 과거와 조우할 때, 우리는 시간의 심연 속에 묻혀 있던 진정한 과거와 만난다. 이것이야말로 프루스트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행위의 핵심이다.


이 소설의 여정은 화자 마르셀의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그는 두 개의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스완네 집 쪽으로 가는 길과 게르망트 쪽으로 가는 길. 이 두 길은 단순한 지리적 방향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사회 계층을 상징한다. 부르주아의 세계와 귀족의 세계. 소설이 진행되면서 이 두 길은 점차 교차하고 뒤엉키며, 마르셀이 생각했던 절대적 구분이 사실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마르셀의 첫 사랑은 스완의 딸 질베르트다. 샹젤리제에서 만난 그녀에 대한 연정은 격렬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의 덧없음, 그리고 사랑이 대상보다는 사랑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프루스트의 통찰이 여기서 처음 드러난다. 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그러나 마르셀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알베르틴이다. 노르망디 해변 마을 발벡에서 만난 이 젊은 여성은 소설의 중반부를 완전히 장악한다. 마르셀은 그녀의 동성애적 성향을 의심하며 집안에 가두고, 감시하고, 질투에 시달린다. 알베르틴은 결국 도망치고, 곧이어 승마 사고로 죽는다. 하지만 그녀의 부재는 현존보다 더 강렬하다. 마르셀은 죽은 알베르틴에 대한 집요한 조사를 통해 그녀를 알려고 애쓰지만, 알면 알수록 더 미궁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 타자는 영원한 수수께끼라는 것, 이것이 프루스트가 알베르틴을 통해 보여주는 진실이다.


한편 소설의 또 다른 중심축은 스완의 이야기다. 화자 마르셀의 이야기 속에 삽입된 스완의 사랑 이야기는 소설 전체의 축소판과도 같다. 예술 감식안을 지닌 세련된 부르주아 스완은 자신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고급 창부 오데트를 사랑한다. 질투와 고통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인생을 낭비했음을 깨닫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스완의 사랑은 마르셀이 겪을 알베르틴과의 관계를 예고하며, 사랑의 본질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관적 견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사랑뿐만 아니라 사회의 세밀한 관찰이기도 하다. 게르망트 가문으로 대표되는 귀족 사회의 화려함과 공허함,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의 상승 욕망과 속물근성,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무너지고 재편되는지를 프루스트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포착한다. 샤를뤼스 남작의 동성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감한 주제였으며, 프루스트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사랑과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깊이 있는 분석은 프루스트의 독특한 방법론을 통해 구현된다. 그는 추상적 논의에 빠지지 않고, 구체적인 감각과 경험을 통해 이러한 주제들에 접근한다. 20세기 초 프랑스 귀족과 상류층 부르주아라는 매우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소한 세부묘사 하나하나까지 묘사하면서도, 그는 보편적인 인간 경험에 도달한다. 가장 개인적이고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가 증명한 문학적 진리다.


전통소설의 발단에서 대단원에 이르는 극적 구성과 달리, 프루스트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필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거기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는 소설 형식에 대한 혁명적 사고다. 프루스트는 플롯의 인위적 구조를 거부하고, 대신 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른다. 17-18세기 소설들이 인간이 자리한 사회의 모습과 대자연의 광대한 힘을 담아내려고 했다면, 프루스트는 오로지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구현하는 의식의 흐름 자체에 생각과 펜을 맡긴 채 유례없이 장엄한 대작을 완성했다. 이는 소설사에서 내면성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이었다.


프루스트의 문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길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프루스트의 문장은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한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인 생시몽 공작의 문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문장들은 마치 건축물처럼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한 문장 안에서도 무수한 층위와 뉘앙스가 공존한다. 독자는 이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서두르는 순간, 프루스트가 공들여 쌓아올린 의미의 탑은 무너지고 만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차원은 예술론이다. 화자가 마지막 권에서 예술과 문학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 소설 내 분산된 모든 요소들이 서로간의 연관을 띄고 있음이 드러난다. 소설 전체는 사실 한 예술가의 탄생 과정을 그린 것이다. 화자는 또한 발베크에서 화가 엘스티르를 만나 예술에 대한 깊은 사유를 시작한다. 엘스티르는 감각한 것에서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떼어내려 애쓰는 화가로, 감각 구성물을 순간 속에 담아내는 예술가다. 그의 예술론은 화자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마르셀은 사교계를 전전하고, 사랑에 빠지고, 질투에 시달리고, 예술가들을 관찰하면서, 서서히 자신이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깨닫는다. 소설의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에서 화자의 여정은 절정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긴 투병 생활을 마친 화자는 게르망트 대공 부인의 오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으로 들어선다. 그때 고르지 않은 포석을 밟으며 예전에 마들렌을 먹을 때와 똑같은 기쁨을 맛본다. 이어 스푼 소리와 뻣뻣한 냅킨을 통해 마들렌과 같은 초시간적 실재를 경험한다. 서재에서 화자는 문득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이런 깨달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자신이 써야 할 책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임을 발견한다. 이는 완벽한 순환 구조이며, 소설이 스스로를 탄생시키는 자기생성적 예술의 극치다. 프루스트는 1909년에 처음 이 책을 구상할 때 '마음의 간헐'이라는 제목 아래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이분법적 구성을 계획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출판이 지연되면서 수많은 교정 작업을 거쳐 당초 두 권에서 일곱 권으로 확장되었다.


엘리엇, 모루아, 발레리, 베케트, 보부아르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리비에르, 벤야민 등의 비평가,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이 소설은 단순히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 생각되고 논의되고 해석되는 작품이다. 각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 소설에서 자신들의 관심사를 발견했다. 들뢰즈는 기호학을, 벤야민은 경험과 기억의 문제를, 사르트르는 시간 의식을 이 소설에서 발견했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또한 하나의 거대한 사회사이기도 하다. 187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부르주아와 귀족 계급의 요동치는 운명을 묘사하면서, 그는 벨 에포크 시대 프랑스 사회의 미묘한 변화들을 포착한다.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에서는 부와 명예를 손에 넣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교양이 부족한 부르주아들의 허풍과 위선, 속물근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들 살롱에서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속물근성을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살롱 내의 소통체계인 일정한 코드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에게 예절이란 상황이나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각각의 상황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가문의 습관으로서 상황과 대상에 관계없이 방사되는 코드다. 화자 마르셀이 그토록 동경하던 포부르생제르맹 귀족 사회는, 실제로 접하는 순간 환멸로 다가온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그들의 입장, 유대인에 대한 관념,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화자에게 깊은 실망을 안긴다. 게르망트 가문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모두 속물주의라 치부하며, 그들의 취향은 모순적이게도 지극히 관습적이고 부르주아적이다. 드레퓌스 사건, 제1차 세계대전, 계급의 몰락과 상승, 성적 욕망의 복잡성 등이 모두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들이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프루스트의 탐구는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적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읽기 어려운 소설로 악명 높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가치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독자에게 느린 독서를, 반복적인 독서를, 명상적인 독서를 요구한다. 그의 문장들은 우리에게 속도를 늦추고, 멈추고, 음미하라고 말한다. 이는 현대 사회의 속도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며, 깊이 있는 경험의 회복을 위한 초대다. E. M. 포스터에 따르면, 작가들마다 소설 속에 시간을 다루는 고유 운용법이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 가까이 또는 멀리 끊임없이 시계의 분침을 뒤로 돌리는 형국이다. 작가가 시간을 뒤로 돌릴 때마다 이야기가 생성되는 회상의 서사이기 때문에 독자는 속독을 자제해야 한다. 이 소설에는 하나의 회상에서 다른 회상으로 넘어가는 사이사이 무수히 많은 시간의 주름이 접혀 있다.


이 소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시간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고, 아름다움은 퇴색하고, 젊음은 늙음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술은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 예술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죽은 자들을 되살리고, 사라진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다. 프루스트가 14년에 걸쳐 이 거대한 대성당을 건축한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의 소설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여전히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일깨운다. E. R. 커티스는 프루스트 이전의 소설들은 모두 여기로 도착하고, 이후의 소설들은 모두가 여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프루스트 자신은 작가의 내적 고향은 동일하며 따라서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한 권의 책밖에 쓰지 못한다고 외쳤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이 하나의 책을 쓰고 또 썼다.


14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성된 이 작품은 한 인간이 자신의 생애를 걸고 이룬 예술적 성취의 극치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소설에 쏟아부었고, 그 대가로 불멸을 얻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히 읽어야 할 고전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할 준거점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순례이며, 그 순례를 마친 독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프루스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9E%83%EC%96%B4%EB%B2%84%EB%A6%B0%20%EC%8B%9C%EA%B0%84%EC%9D%84%20%EC%B0%BE%EC%95%84%EC%84%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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