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선입견

by 레옹
Survivorship-bias.jpg

1943년 여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 상공에서는 매일 수백 대의 연합군 폭격기가 적진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항공기들에는 어김없이 탄흔이 가득했다. 미군은 이 데이터를 꼼꼼히 분석했다. 날개에 가장 많은 구멍이 뚫렸고, 동체 중앙부도 심하게 피격되어 있었다. 결론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저 부분에 장갑을 보강하면 생존율이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헝가리 출신의 수학자 아브라함 발트는 이 논리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돌아온 비행기가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비행기입니다."


발트의 통찰은 단순하지만 충격적이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비행기들은 저 부위에 총을 맞고도 살아 돌아왔다. 반면 엔진에 총을 맞은 비행기들은 기지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분석 대상에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총탄 자국이 없는 곳이야말로 치명적인 부위였던 것이다. 군은 즉시 결론을 뒤집었다. 가장 멀쩡해 보이는 부위에 장갑을 보강했고, 수많은 조종사의 목숨을 구했다.


이것이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이다. 우리는 살아남은 것만 본다. 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 맹점이 개인의 판단을 왜곡하고, 역사를 오해하게 만들고, 때로는 사회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세상을 한번 들여다보자. 서점의 자기계발 코너에는 언제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의 이름이 놓여 있다. 그들은 대학을 중퇴하거나 파격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일궜고, 결국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이야기를 이어붙인다. "그래, 학벌보다 열정이다." "관습을 깨는 자가 성공한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대학을 중퇴하고 실패한 수십만 명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서점에 없다. 인터뷰도 없고 강연도 없다. 그들은 조용히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 바깥에 존재한다.


이 패턴은 놀랍도록 광범위하다. 록스타가 되기 위해 10대 시절부터 기타를 잡은 수천 명 중에서 우리는 오직 무대 위의 몇 사람만 기억한다. 나머지는 어디 있는가? 그들은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간다. 주식 투자로 10억을 번 사람의 비결을 들으러 강연장에 줄을 선다. 그러나 같은 전략으로 전 재산을 잃은 사람은 강연장에 서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빚을 갚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존자 편향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잘못된 패턴을 학습시킨다는 점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수백 번 들으면, 우리는 그것이 성공의 원인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하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나고도 실패한 사람들, 혹은 늦잠을 자고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선택된 표본은 진실의 일부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전체로 오해한다.


이 편향은 역사 해석에서도 치명적인 오류를 낳는다. 19세기 탐험가들이 남긴 항해 기록을 읽으면 그 시대의 항해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기록을 남긴 자들은 누구인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항해 중 침몰한 수많은 배, 폭풍에 사라진 선원들, 무명의 실패한 탐험들은 역사의 책에 단 한 줄도 없다. 우리는 살아남은 기록으로 역사를 쓰고, 그 역사가 마치 당시의 전체 현실인 양 받아들인다. 고대 건축물을 보며 "옛사람들이 참 튼튼하게 지었다"고 감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전에 지어진 수만 개의 건물 중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가장 튼튼하게 지어져 살아남은 것들뿐이다. 형편없이 지어진 건물들은 이미 무너져 사라졌다.


이 편향의 교묘함은 그것이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와 함께 온다는 데 있다. 인간의 뇌는 패턴을 사랑한다. 일관된 서사를 욕망한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이 성공의 비결처럼 보일 때 우리의 뇌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불완전한 데이터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읽는 성공 스토리는 편집된 세계다. 출판사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출판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팔리지만,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팔리지 않는다. 시장의 논리 자체가 생존자 편향을 증폭시킨다.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매년 시장 수익률을 앞지르는 펀드는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그 매니저는 인터뷰를 하고,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닌다. "나는 남들과 다른 안목이 있다." 그의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수십 년에 걸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냉혹했다. 시장 수익률을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이긴 펀드매니저는 통계적 기댓값 이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즉, 충분히 많은 사람이 시장에서 도박을 하면, 그중 몇 명은 순전한 운으로도 10년 연속 수익을 낼 수 있다. 동전을 1,000명이 동시에 던지면, 그중 한 명은 10번 연속 앞면을 낼 가능성이 있다. 그 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동전 던지기의 천재"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더 밀고 나가면, 우리가 숭배하는 성공 신화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물론 노력이 전혀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더 잘 잡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한 노력과 재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빌 게이츠가 되고 누가 되지 않느냐는 상당 부분 시대, 장소, 운의 문제다. 게이츠 본인도 자신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 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에, 그 기술을 일찍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의 행운을 인정한 바 있다. 우리가 그의 성공에서 "끈기"와 "비전"만을 추출해 교훈으로 삼을 때, 우리는 절반의 진실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생존자 편향은 개인의 삶에서도 조용히 작동한다. 우리는 10년 전 사귄 연인과 헤어진 것을 후회하며 "그때 다르게 행동했다면 지금쯤 행복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상상하는 대안적 현실은 실제로 살아보지 않은 것이기에, 그 상상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아름다운 결말만을 그린다. 실제로 그 길을 걸었다면 마주쳤을 고통, 실망, 권태는 상상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걸어보지 않은 길의 생존자만을 상상한다.


더 위험한 것은 이 편향이 정책과 제도에 침투할 때다. 어떤 지역의 범죄율이 낮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책 입안자들은 그 지역의 치안 정책을 모범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낮은 범죄율은 그 정책 덕분일 수도 있고, 단순히 그 지역의 경제적 여건이나 인구 구성 때문일 수도 있다. 성공적으로 보이는 사례만 연구하면, 우리는 성공의 진짜 원인이 아닌 성공한 사례들의 공통 속성을 성공 요인으로 착각하게 된다. 경영학의 많은 베스트셀러 이론들이 이 함정에 빠졌다. 1990년대 최고의 기업들을 분석해 '성공 공식'을 도출한 책들은, 그로부터 10년 뒤 그 기업들 중 상당수가 몰락하자 조용히 절판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발트의 해결책은 우아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추론했다. 탄흔이 없는 곳이 실은 가장 취약한 곳이라는 역발상. 이것이 생존자 편향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전체의 일부임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것.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같은 방법을 쓰고 실패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어떤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증거를 볼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전략을 쓰고 사라진 케이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종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를 부숴버리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된다는 믿음, 나만의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믿음, 내가 고른 전략이 옳다는 믿음. 이것들은 삶을 버티게 해주는 서사이기도 하다. 생존자 편향을 의식한다는 것은 이 서사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그 균열 사이로 우리는 비로소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세상을 본다.


결국 생존자의 선입견이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에 내재된 구조적 오류다. 우리의 눈은 존재하는 것만 볼 수 있고, 우리의 귀는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 사라진 것들, 실패한 것들, 침묵하는 것들은 우리의 인식 체계 밖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성하는 세계관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우리가 믿는 교훈은 언제나 불완전한 샘플 위에 서 있다.


이것을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기록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돌아온 비행기의 탄흔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비행기의 침묵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 침묵 속에야말로 진짜 이야기가 있다.


발트는 그 침묵을 수학으로 계산했다. 우리는 수학자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침묵의 존재를 기억할 수는 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멋진 건물을 감탄할 때, 어떤 시대를 아름답게 회고할 때, 우리는 잠시 멈추고 물어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사라진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그 질문 하나가, 우리를 절반의 진실에서 조금 더 온전한 세계로 데려간다.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braham_Wald)

일요일 연재
이전 12화정의의 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