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보상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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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저녁, 한 남자가 지하철역 계단에서 지갑을 줍는다. 두툼한 지갑이다. 안에는 현금이 꽤 들어 있고, 신용카드가 서너 장, 그리고 신분증도 들어 있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퇴근 인파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CCTV가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만, 분실물 센터에 맡기고 조용히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가 이 지갑을 주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잠시 멈춰 선다. 무언가가 그의 발걸음을 잡아당긴다. 그리고 그는 유실물 센터로 걸어간다. 지갑을 건네고,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그냥 돌아선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 지갑 주인이 나타날지도 불확실하다. 그저 하루가 조용히 지나간다. 이 행동은 가치가 있었는가?


단순해 보이는 이 물음은 사실 철학이 수천 년 동안 정면으로 마주해온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다. 정의는 그 자체로 선한가, 아니면 정의가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선한가? 보상도, 처벌도, 명성도, 타인의 시선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옳은 행동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가? 이것은 단순한 도덕 퀴즈가 아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은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이 물음을 완벽하게 해부했다. 『국가론』 제2권에서 플라톤의 형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내든다. 리디아의 양치기 기게스는 어느 날 지진으로 갈라진 땅속 틈에서 청동으로 만든 말(馬) 조각상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시체가 있고, 시체의 손에는 황금 반지가 끼워져 있다. 기게스는 반지를 가져와 끼는데, 우연히 반지의 보석 부분을 손바닥 쪽으로 돌리자 자신이 투명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반지를 이용해 왕궁에 잠입하고, 왕비를 유혹하고, 왕을 죽이고, 결국 왕국을 차지한다.


글라우콘은 이 이야기를 소크라테스에게 던지며 도전한다. 만약 정의로운 사람도 이런 반지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부정의한 사람과 다르게 행동할 것인가? 글라우콘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다. 어떤 사람도 자발적으로 정의롭게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자제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들킬 것이 두렵고, 처벌이 무서우며, 평판을 잃기 싫기 때문이다. 정의란 약자가 강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고안한 타협의 산물이며, 완벽한 면죄부가 주어진다면 누구도 정의를 선택하지 않는다. 보상도, 처벌도, 관찰도 없는 정의는 환상이다.


글라우콘은 약 2,400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여러 얼굴로 살아 있다. 경제학은 오랫동안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ctor)' 모델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 모델 속 인간은 항상 기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마저도 유전자의 생존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혈연 선택 이론은 우리가 혈육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사실 유전자 차원의 이기심이라고 설명하고, 상호 이타주의 이론은 타인에게 베푸는 행동이 결국 미래의 협력을 기대한 투자라고 분석한다. 이 모든 논리는 결국 같은 결론으로 수렴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보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결정적인 균열이 있다. 인간은 이론이 예측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42년, 폴란드 점령 지역. 얀 카르스키라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바르샤바 게토로 잠입한다. 그는 폴란드 지하 저항군 소속의 연락원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언어로 옮기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굶주린 사람들, 이미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조직적인 학살의 냄새. 카르스키는 그것을 눈으로 담고,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유럽을 가로질러 런던으로,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처칠에게, 루스벨트에게 직접 증언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처칠은 다른 전략적 우선순위가 있었고, 루스벨트는 카르스키를 만난 뒤 홀로코스트가 아닌 전쟁 후 폴란드의 말(馬) 이야기를 더 길게 했다고 전해진다. 카르스키는 실패했다. 그의 증언은 묵살되었고, 학살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카르스키는 수십 년 동안 침묵 속에 살았다. 그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수가 되었고, 자신의 과거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기억이 너무 무거워서,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은 그가 누구였는지를 뒤늦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폴란드 최고 훈장과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이 그의 품에 안겼지만, 그것은 4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가 이중 스파이의 위험을 무릅쓰고, 체포와 고문의 위험을 무릅쓰고, 게토에 잠입하던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명성도, 보상도, 성공의 전망도. 오직 옳다는 확신만이 있었다.


카르스키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들을 이스라엘은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기리는데, 현재까지 27,000명 이상이 이 칭호를 받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당시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발각되면 가족 전체가 처형될 위험을 감수했다. 폴란드인 이레나 센들러는 2,500명에 달하는 어린이를 게토 밖으로 밀반출했다. 그녀는 결국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두 다리가 부러졌다. 나치는 그녀를 총살하기로 했지만, 뇌물을 받은 경비원 덕분에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의 이름은 수십 년 동안 잊혀졌다. 그녀는 1999년에야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녀가 아이들을 구한 이유가 훗날 받을 노벨상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례들이 과연 예외적인 영웅들의 이야기일 뿐인가? 데이터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피터슨과 마틴 셀리그만이 주도한 VIA(Values in Action) 프로젝트는 54개국, 수십만 명의 응답을 분석해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성격 강점을 분류했다. 공정성, 정직, 친절, 용기는 문화권을 가로질러 공통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덕목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단순한 설문 결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류가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맥락에서 독립적으로 비슷한 도덕적 직관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사회적 학습이나 처벌 회피의 결과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페르와 사이먼 게흐터가 2002년 『네이처』에 발표한 실험은 더 충격적이다. 그들은 참가자들에게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의 변형인 공공재 게임을 진행했다. 규칙은 단순했다. 참가자들이 공동의 기금에 일정 금액을 기여하고, 누군가 기여하지 않는 무임승차자가 나타나면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의 돈을 써서 그 무임승차자를 처벌할 수 있게 했다. 결정적인 것은, 이 게임이 단 한 번만 진행되고, 참가자들은 이후 서로 다시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처벌을 해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미래의 이익이 전혀 없었다. 합리적 행위자라면 처벌에 돈을 쓰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기꺼이 불공정한 행동을 처벌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이타적 처벌(altruistic punishment)"이라고 명명했다. 이기심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동이다.


신경과학은 여기서 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2006년 조르지오 리치아르디 등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이타적 처벌을 실행할 때 뇌의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 즉 보상과 관련된 영역이 활성화된다. 다시 말해, 정의를 구현하는 행동 자체가 뇌에 내재된 보상 시스템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진화는 인간이 불의를 목격하고 이를 교정하려 할 때 쾌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설계했을 수 있다. 이것은 정의 본능이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경 구조에 깊이 새겨져 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기서 영리한 반론이 등장한다. "결국 그것도 보상 아닌가?" 정의로운 행동을 할 때 느끼는 심리적 만족감, 자기 존중감의 상승, 뇌의 쾌감 회로 활성화, 이 모든 것이 결국 내면적 보상의 한 형태라면, 우리는 여전히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 아닌가? 처벌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글라우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이 반론은 표면적으로 날카롭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만약 "행동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 긍정적인 감정이 따른다면 그것은 이기적 행동"이라는 정의를 채택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이타심이라는 개념 자체를 언어에서 지워야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식사를 포기할 때 느끼는 사랑, 낯선 사람을 위해 헌혈하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 이 모든 것이 "보상을 위한 행동"이 되어버린다. 개념을 이렇게 무한히 팽창시키면,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의 범위가 모든 것을 포함할 때, 그 설명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내면의 만족이 따른다는 사실이, 그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가? 칸트는 이에 대해 매우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도덕적 행동의 진정한 가치는 오직 의무(Pflicht)에서 비롯될 때만 완전하다고 주장했다. 어떤 행동이 결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해진다면, 그 행동은 최고의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은 이를 검증하는 도구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지갑을 돌려주는 행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다면, 즉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세계가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면,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행해야 한다. 여기서 보상은 기준이 아니다. 보상은 부산물일 수는 있지만,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칸트의 논리는 얼핏 냉혹하고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감정과 공감을 배제하고 오직 의무만을 강조한다는 비판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논리의 해방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칸트가 말하는 것은, 정의의 가치는 외부의 인정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옳은 일을 했을 때, 그것의 가치는 누군가 알아주어야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는 이미 그 행위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강하게 수호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결과의 노예가 아니라 이성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현실도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정의로운 행동들이 세상을 실질적으로 바꾸는가? 한 개인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거대한 구조적 불의가 흔들리는가?


이 질문에 섣불리 낙관적으로 답하는 것은 오히려 성실하지 못하다. 카르스키의 증언은 묵살되었고, 학살은 계속되었다. 수많은 의인들의 행동은 홀로코스트를 막지 못했다.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 구조적 악을 상대로 무력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냉혹한 교훈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존속한 수십 년 동안, 백인 사회 안에서 조용히 흑인을 도왔던 수많은 개인들의 행동은 그 체제의 붕괴를 앞당기지 못했다. 불의한 구조는 개인의 선의로 교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적 변혁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무보상 정의를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찾으라는 요청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행하는 정의로운 행동은 구조를 당장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도덕적 토양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토양이 충분히 비옥해졌을 때, 구조는 변화한다.


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가 몽고메리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녀의 행동은 하루아침에 민권 운동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흑인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고, 비밀리에 서로를 지원하고,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역사가 클로뎃 콜빈이라는 열다섯 살 소녀가 파크스보다 9개월 먼저 같은 버스에서 같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콜빈은 임신한 미혼모였기 때문에 운동의 상징으로 내세워지지 못했고, 역사의 각주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무수한 행동들과 함께 퇴적되어, 결국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 역사를 움직인 파도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이 조지 엘리엇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메리 앤 에번스는 남성 필명 조지 엘리엇으로 활동했으며, 그녀의 최후 걸작 『미들마치』는 1871년에서 1872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영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세상에서 점점 커져가는 선함은 부분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동들에 기인한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삶이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은, 이름 없이 충실하게 살다 간 사람들 덕분이다. 조지 엘리엇은 이 문장을 통해 단순한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도덕의 역사는 영웅들의 서사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선택들의 집합이라는 통찰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그 사람의 진짜 성격을 만들고, 그 성격은 결국 보이는 순간에 발현된다. 이것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지지하는 사실이다. 습관은 성격이 된다. 성격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arete)을 단 한 번의 영웅적 행동이 아닌, 반복된 행동을 통해 형성된 안정적인 성향(hexis)으로 정의했다. 용감한 사람은 갑자기 용감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작은 순간들에서 공포를 극복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는 연습을 통해 용감해진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자기통제(self-regulation) 연구와도 일치한다.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통제는 근육과 같아서, 사용할수록 강해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모두가 지켜보는 순간에도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습관적으로 작은 부정직함을 용인하는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정직해지기 어렵다. 2000년대 초 엔론(Enron)의 붕괴는 거대한 회계 사기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조직 내에서 수년에 걸쳐 "작은 거짓말"들이 묵인되고 정상화되면서 쌓인 결과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의 도덕적 선택들이 쌓여 제도가 되고, 문화가 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정의로운 행동의 가치는, 개인의 성격 형성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아니다. 사회적 신뢰(social trust)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에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붕괴가 공동체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사람들이 서로를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수천 번의 순간에 사람들이 정직하게, 공정하게 행동하는 선택들의 총합으로 만들어진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 사회적 신뢰 지수가 높은 국가들이 일관되게 높은 삶의 질과 낮은 부패 지수를 기록한다는 사실은, 무보상의 정의로운 행동들이 축적될 때 그것이 사회 전체의 인프라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지갑을 돌려준 남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없다. 지갑 주인이 나타나도 감사 인사 한마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록되지 않는다. 역사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유실물 센터에서 나오면서 느꼈을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거창하거나 황홀한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용하고 단단한 무언가,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이 일치하는 순간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진실성(authenticity) 또는 통합성(integrity)이라고 부른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같은 원칙으로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이 통합성이 쌓일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도 지갑을 돌려주는 사람. 글라우콘은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얀 카르스키가 있었고, 이레나 센들러가 있었고, 클로뎃 콜빈이 있었고, 역사가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은 수만 명이 있었다. 이들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인간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워지지 않는 증거들이다.


보상이 없는 정의는 가치가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가장 순도 높은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두려움이나 기대 때문이 아니라, 선(善)을 향한 내면의 중력 때문에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명은, 인간이 여전히 신뢰할 만하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다.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누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댄 신뢰다. 그 행동들 하나하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도덕적 기반을 쌓는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30258628743096239/)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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