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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과 레이저 사이

로망과 실리. 두 갈레 길 앞에서.

by 이일삼


아는 형에게 '미녹시딜'을 받았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얼굴에 바르면 수염이 자라나는 약(?)이다. 형은 수염이 전혀 나질 않는 체질인데, 한 번 길러보고 싶은 마음에 몇 달 시도해 봤다가, 효과가 미미하다며 나에게 남은 미녹시딜을 두 박스나 주었다.(아마도 버렸다.) 수염을 기르면 잘 어울릴 관상이라나.


남자라면 턱수염에 대한 로망이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나도 그 로망을 가지고 있다. 만일 자연적으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연결되어 자랐다면 아마도 진작에 길렀을 테지만, 유전자의 한계로 인해 전형적 동양인의 이방 수염밖에 자라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한바였다.


하지만 미녹시딜이 생긴 지금은 어떨까? 놀랍게도 마음속에서 갈등이 자란다. 로망이었다면, 고민할 것 없이 길러보면 될 것을. 지금! 나는! 왜! 갈등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얼마 전까지 레이저 제모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매일 아침 면도를 한다는 게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니다. 면도 때마다 생기는 작은 생채기들은 안 그래도 힘든 아침에 짜증을 더한다. 달마다 갈아주어야 하는 면도날은 어떤가? 그 외에도 면도로 인해 발생하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다 보니 차라리 제모를 하는 편이 이득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현재, 내 앞에는 두 갈레 길이 생겼다. 로망을 이뤄보는 길과 실리를 취하는 길. 두 가지 모두 나를 위하는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절대로 걸어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갈등이 심해진다.


최악은 두 가지 모두 선택하지 않은 상태로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고민으로 머리만 무거워지고, 로망과 실리 둘 중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하는 상태.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슬픈 예감이 든다. 아마도 나는 둘 중 그 무엇도 고르지 못한 상태로 오랫동안.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고민만 하며 살아가게 되리란 것을. 그러다 더 이상 미루지 못할 정도로 사안이 심각해졌을 때야 마지못해 결단을 내리리란 것을.


미래의 나는 '차라리 미녹시딜을 받지 않았더라면.'이라며 형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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