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천사는 두렵다

part 1

by 이열

신 병장의 편지


Day 1

주희에게,

부대에 돌아온 지 일주일째, 창밖에는 아직 어둠이 가득해. 잠을 설쳐서 일찍 일어났어. 손목시계가 새벽 4시 17분을 가리키고 있네.


너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지 나흘이 되었어. 소포 속 작은 나무 십자가는 늘 목에 걸고 있어. 힘들 때마다 그걸 손에 쥐면 너와 함께 있는 것 같아. 나뭇결 틈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이, 네 손길처럼 느껴져.


어젯밤 꿈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도서관이 나왔어. 네가 책장 사이로 미소 짓던 모습,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네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였던 순간이 너무 선명했어. 그런데 갑자기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어. 네 목소리가 아니었어. 깊고,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어.

지수



주희야,

태국 훈련이 가끔 생각나. 특히 훈련 마지막 날 밤이 선명해. 매복 진지에 엎드려 있는데, 정글의 습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지. 이상하게도, 그때 처음으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


밤하늘엔 별이 없었어. 흙냄새는 유난히 짙었지. 그때, 뭔지 모를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어. 그리고 뭔가가 내 손을 스쳤는데, 가시였는지, 이빨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


아무튼 그곳에서 돌아온 후로, 뭔가 조금씩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 부대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나를 대하는 시선이 낯설게 느껴져. ‘비상’이라는 말이 돌고 있지만, 구체적인 지시나 설명은 없어. 어쩌면 내 귀국과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부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


오늘 아침, 손바닥에 찌르는 통증이 있었는데 상처는 없더라. 태국에서 뭔가에 긁혔던 게 원인인 듯. 별거 아니야. 진통제 하나 먹고 금방 괜찮아졌어.


제대하면 같이 영화 보러 가고 싶다. 너와 함께 봤던 그 영화, 벌써 속편이 나온대.

지수



주희야,

모의 전투 훈련을 마치고 왔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야. 등에 흐르던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져. 그런데 다행히 두통은 가라앉았어.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진 것 같아.


사실 네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내가 군대에 조기 입대한 이유. 단순히 빨리 끝내고 싶어서가 아니었어. 아버지의 술 문제로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결국 입대를 선택했고, 월급의 대부분을 어머니께 보내고 있어. 너한테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날 불쌍하게 생각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왠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 어쩌면... 더 이상 비밀을 간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오늘 저녁, 분대원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 최근 들어 애들이 내 주변에 모여 앉으면 뭉클해. 함께할 날이 얼마 안 남았잖아. 식사 중에 내가 갑자기 물었어. “너희들은 내가 없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다들 웃으면서 “속 시원할 것 같은데요.”라고 농담으로 받아쳤지. 하지만 왠지, 그렇게 말해주니 더 고맙게 느껴졌어.

너를 생각하며, 지수



주희야,

벌써 자정이 넘었지만 잠이 안 와. 아까 씻다가 거울을 보니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더라. 아마 훈련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가 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대학교 1학년 때,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황사가 심했던 날이었어. 학교 도서관 아래 빵집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내가 집었던 마지막 빵을 네게 양보했었지. 너는 그날 점심도 거르고 시험공부 중이었다고 했었어. 네가 배시시 웃으며 그랬지. “이렇게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다니, 성인 같으세요.” 그땐 실소를 터뜨렸지만, 그 말이 아직도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

그 추억이 자꾸 떠올라. 네가 없는 지금, 너와의 기억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 같아.

잘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쓸게. 지수



Day 2

주희야,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 우리가 함께 성당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신부님이 나를 가리키며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책임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더라.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데, 네 표정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어.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가슴이 답답했어.


꿈 때문인지 밤새 잠을 설쳤어. 몸은 좀 피곤하지만 머리는 이상하게 맑아.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아. 지금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예전엔 몰랐던 디테일까지 모두 들리는 기분이야.


처음 성당에 같이 갔던 날 기억나? 내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다녔다고 했었지. 하지만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거의 가지 않았었거든. 네가 “나랑 같이 가 보지 않을래?”라고 했을 때, 솔직히 기뻤어. 그때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며 마음이 참 따뜻해졌던 것 같아.


아까 애들이랑 같이 생활관을 청소했어. 애들은 나보고 그냥 쉬라고 하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해. 뭔가 자꾸 잡생각이 들어. 어제 손바닥에 생겼던 통증이 자꾸 신경 쓰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뭔가 안에서 스멀거리는 기분?


뭐, 걱정은 하지 마. 아마 그냥 내 예민함 때문일 거야. 제대까지 한 달도 안 남았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러는 거겠지?

항상 너를 생각하는, 지수



주희야,

오늘 중대장이 전체 소집을 했어. 최근 국외에서 발생한 감염병 관련 주의 사항을 알려 주더라. 아직까지 국내 발병 사례는 없다고 하지만, 해외 훈련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특별 관찰 대상이라고 해.

중대장의 시선이 몇 번 나에게 머물렀어. 마치 내가 대상인 것처럼. 그래도 아직 나를 따로 불러 검사하거나 하진 않았어. 아마 괜찮은 걸 거야.


오늘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갑자기 고기가 역하게 느껴졌어.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를, 오늘은 왠지 냄새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먹을 수가 없었어. 밥과 국, 김치만 조금 먹었지. 박 상병이 “신 병장님, 웬일로 고기 안 드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요즘 위가 안 좋아서”라고 둘러댔어.


네가 요리해 준 음식이 그리워. 특히 네가 만들어준 파스타. 토마토소스에 바질을 넣고, 마지막에 올리브 오일을 살짝 두른 그 파스타. 제대하면 제일 먼저 네가 해준 그 파스타를 먹고 싶어.

잘 자, 내일은 더 긍정적인 소식을 전할게. 지수



Day 3

주희야,

또 꿈을 꿨어. 이번엔 네가 내 머리를 감겨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붉게 변했어. 그리고 너는 “이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하더니 방 밖으로 나갔지. 내가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서 너를 잡을 수 없었어.


식은땀을 흘리며 깼어.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목이 너무 말랐지만, 내 안에 사막이 생긴 것처럼 물을 마셔도 갈증이 풀릴 것 같지 않았어.


손바닥이 가렵고 따가워. 자세히 보니 희미한 붉은 선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나오려는 듯한 느낌이야. 아마 내 상상일 거야. 알레르기 비슷한 거겠지.


네가 보고 싶어.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 통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부대에서 개인 통화가 제한되고 있어. 중대장 말로는 훈련 때문이라는데, 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어.

다시 잠들어야 하는데, 쉽지 않네.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져.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지수



주희야,

오늘 밤은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무슨 말도 쓰기 싫을 정도로, 텅 빈 기분이야.

그저 네 이름만, 한참 불러보다 편지를 덮는다.



Day 4

주희야,

어제는 갑자기 25km 행군 훈련이 잡혀서 더 못 썼네. 발에 물집이 잔뜩 생겼어. 온몸이 아프지만 금방 괜찮아질 거야.


중대장이 나를 따로 불러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 “태국에서 특이사항 없었나? 정글에서 동물에게 상처를 입었다던지.” 감염병을 우려하는 거겠지. 아무 일 없었다고 했어.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보고하라고 하더라.

김 병장이 오늘 아침에 나를 붙잡고 물었어. “지수야, 너 요즘 왜 그렇게 창백하냐? 어디 아픈 거 아냐?” 난 그냥 웃으며 “말년이라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라고 말했어. 하지만 거울을 보니 정말 얼굴이 창백해져 있더라.


감기 기운인 것 같아. 요즘 몸이 좀 이상해. 머리가 무겁고, 목이 따가워. 날씨가 춥다가 덥다가 해서 그럴 거야. 잠도 잘 오지 않아. 네가 준 십자가를 손에 쥐고 자면 좀 나아지긴 해.

네가 보고 싶어. 제대까지 3주. 버틸게.

지수



주희야,

첫 데이트했던 날 기억해? 학교 근처 작은 카페에서 만났었지. 너는 연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작은 꽃 모양 핀을 꽂고 있었어. 내가 늦게 도착했을 때, 넌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지. 내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어. 그 미소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어.


그날 우리가 나눈 첫 대화가 뭐였더라? 아, 네가 읽고 있던 책에 관해서였지. 사르트르의 ‘구토’였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한참을 토론했었지. 넌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의 총합”이라고 했고, 난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난 것도 우리를 완성하고 있는 거네.”라고 대답했었어. 그때 네가 웃으며 “그럼 우린 아주 좋은 사람들이네.”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


지금 그 순간이 너무 그리워. 카페의 따뜻한 조명, 창밖으로 내리던 가벼운 봄비, 그리고 너의 소녀 같은 목소리... 모든 것이.


최 일병이 휴가에서 돌아왔어. 태국발 감염병 때문에 출입국 금지도 검토한다며? 중대장이 나에게 몸 상태를 물어본 이유인가 봐. 우리나라엔 아직 사례가 없다는데, 시간문제 아니겠어? 혹시 모르니 손 잘 씻고, 사람 많은 곳은 피해 다녀. 팬데믹도 이겨냈으니, 큰일은 없겠지.


간밤에 네가 준 십자가를 쥐고 잤더니 잠을 덜 설쳤어. 이상한 꿈은 여전하지만.

잘 자, 항상 사랑해. 지수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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