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신 병장의 편지
Day 5
주희야,
어젯밤 꿈속에선 내가 우리 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 박 상병이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우리와 달라요”라고 하더라. 내가 무언가 중요한 말을 전하려 했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어. 깨고 나서는 또 극심한 갈증이 왔고, 목마름이 가시지 않아 고통스러웠어.
요즘 내 주변 세상이 낯설게 느껴져. 색깔이 더 선명하고, 소리는 더 크게 들리고, 냄새는 더 강하게 느껴져. 감각이 과도하게 예민해진 것 같아. 평범한 일상이 점점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느낌이야.
거울을 봤는데 눈이 더 많이 충혈됐어. 손바닥의 희미한 선은 이제 조금 더 뚜렷해졌어. 붉은 선이 손바닥 중앙에서 퍼져나가는 것 같아. 이런 건 처음 겪어보는 증상인데, 의무실에 가 봤자 빨간약이나 발라 줄 것 같네. 아프진 않으니까 이러다 말겠거니 생각하고 있어.
내 변화엔 아무도 딱히 관심이 없어. 분대원들은 평소처럼 나를 대하고, 중대장도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아. 말년 병장 남은 시간 편안히 지내게 두다가 보내 주려는 거겠지.
주희야, 네가 항상 내게 했던 말 있잖아. “너는 너무 착해. 가끔은 자기주장도 해야 해.”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하셨지. “우리 아들은 마음이 너무 여려. 세상이 널 상처 입힐까 걱정이다.” 나는 늘 남을 배려하고, 모든 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화를 내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요즘의 나는... 뭔가 달라. 신경이 곤두서 있어. 쉽게 욱하게 돼.
지수
주희야,
오늘 외출과 면회가 모두 취소됐어. 중대장이 “이건 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고 하더라. 감염병이 국외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며, 가급적 사람들과 접촉을 피해야 한다고 했어. 아직 한국엔 사례가 없는데,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지.
네가 보내 준 “우리가 보낸 여름” 사진집을 다시 펼쳐봤어. 처음 우리가 함께 맞이한 그 여름 ― 한강에서 보트 탔던 날, 북한산에 올라갔던 날, 해운대에서 밤바다를 보았던 날. 그곳에서 네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었지. “지수야,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내 영혼이 네 영혼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때 난 대답하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영혼은 서로를 알아볼 거야. 어떤 형태로든, 어떤 세상에서든.
점심에 화장실 거울을 봤더니 충혈이 더 심해졌더라고. 어머니가 항상 특별하다고 하는 내 눈. “깊고 진한 갈색 눈동자, 네 할아버지를 닮았구나.”라고 종종 말씀하셨지.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사진에서 본 할아버지 눈은 정말 나와 비슷했어. 하지만 지금 내 눈은... 그 짙은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이제 내 몸의 변화가 조금 걱정이 돼. 단순한 감기는 아니겠지. 그저 알레르기 반응이고, 때가 되면 가라앉기만을 기도할 뿐이야. 제대까지 몇 주만 버티면 되잖아. 검사를 받아도 밖에서 받고 싶어. 아무래도 이곳 의료 환경은 열악하니까. 혹시라도 감염병이 아닌지 하는 의심을 받기도 싫고. 그런데 감염원이 뭐라고 했더라? ‘과도한 공격성’이 증상 중 하나라며? 좀 무섭긴 하다.
네가 준 목걸이를 꼭 쥐어본다. 금방 나을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너를 생각하는, 지수
오늘은 별일 없었어.
그래서 더 불안했어.
조용한 밤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주희야,
밤이 깊어가는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손바닥과 발등이 계속 아파.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야.
오늘 저녁 식사 때 일이야. 김 병장이 실수로 내 어깨를 부딪쳤는데, 순간 내 안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더라. 너무 강렬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였어. 평소의 나라면 그냥 웃어넘겼을 일인데... 내가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아 겁이 나.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항상 싸움보다는 평화를, 증오보다는 이해를 선택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릴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던 모습을 보면서, 난 항상 아버지와 달라지겠다고 다짐했었어. 폭력이 아닌 대화로,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된 걸까?
이 끓어오르는 공격성이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너무 두려워. 혹시 내가 폭력적인 충동에 굴복해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봐 무서워. 꿈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서, 지금도 손이 떨려. 편지를 동안에도 누군가를 물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어. 이게 단순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혹시 나는… 감염된 걸까?
네가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너는 항상 내 안의 선함을 더해줬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당분간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이 들어. 내가 감염된 거라면, 빨리 백신이 나오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이 병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까?
항상 너만 생각하는, 지수
Day 6
주희야,
밤에 잠을 거의 못 잤어. 온몸이 타는 것 같았는데 열은 없는 듯해. 아침에 거울을 보니 충혈이 더 심해졌어. 이상하게도 몸은 피곤하지 않아.
창고 정리를 감독하다가 손바닥에 갑작스러운 통증이 왔어. 이젠 희미한 게 아니라 분명한 상처가 보여. 안에서부터 뭔가가 뚫고 나오려는 것처럼 원형의 흉터가 생기고 있어.
옆에 있던 최 일병이 물었어. “병장님, 손 다치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손을 뒤로 뺐어. “아니, 괜찮아.” 그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 녀석의 목에 이빨을 박는 상상을 했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어.
식당에서 또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어. 모든 게 썩은 냄새가 나. 특히 고기는 더 심해. 단지 고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메스꺼움이 밀려왔어. 밥만 조금 먹고 나왔어. 그런데 배는 고파. 뭔가 다른 것이 당기는 느낌이야. 설명하기 어려운 갈망 같은 거.
애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많이 달라졌어. 예전엔 존경과 친근함이 있었는데, 이젠 걱정 반, 의심 반... 그리고 두려움? 오랫동안 허물없이 지내온 사람들인데, 벽이 생긴 것 같아. 물론 나 자신이 눈에 띄게 이상해졌는데도 불구하고,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점심시간에 박 상병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어. “신 병장님... 태국에서 뭐 특별한 일 없으셨습니까?” 그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아니, 뭐가 있었어야 해?”라고 거칠게 대꾸했어. 그가 “아닙니다.” 하며 물러나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더라. 녀석을 찢… 아니야, 주희야. 아니야.
지수
주희야,
네가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이렇게 헤어져 있을 때마다 항상 그리웠지만, 이번에는 더 강렬해. 네가 내 존재에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져. 이건 단순한 그리움이 아닌 것 같아.
오후에 애들 군화를 하나씩 닦아줬어. 제대를 앞둔 병장이 후임들 군화 광내주는 게 전통이거든. 스물네 짝을 언제 다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짬이 있긴 있는지 생각보다 금방 끝내더라. 애들이 됐다고 그냥 쉬라고 했지만, 해주고 나니까 마음이 개운했어.
PX에서 간식거리 좀 사 와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어. “요즘 외출도 못하고 고생 많지? 말년 병장이 파이팅 하라고 쏘는 거니까 마음껏 먹어라.” 하며 초코우유로 건배를 외쳤지. 그 한마디에 애들 사이에 맴돌던 긴장감이 조금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어.
다들 웃고 떠드는 사이, 박 상병만은 떨떠름한 표정이더라. 그래서 그의 옆자리에 가서 말없이 우유 팩을 들어 “짠” 하고 맞부딪쳤지.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곤조곤 물었어. “신 병장님,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 말입니다. 혹시 감염되신 거 아닙니까?” 깜짝 놀랐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거든.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박 상병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어. 별다른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불편한 감정이 왠지 분노로 번지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어.
취침 전에 네 사진을 봤어. 면회 때 같이 찍은 그 사진, 기억나? 서울타워 앞에서 찍은 거. 네가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진정됐어. 네 미소에는 항상 그런 효과가 있었지. 고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을 전해주는.
아, 그때 우리가 자물쇠를 걸었던 것도 생각나네. 우리 이름과 날짜를 적어서.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이었지.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 어떤 모습으로든, 어떤 상태로든, 우리는 함께 할 거야.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지수
자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소리치는 것 같아.
입을 열진 않지만, 침묵이 더 큰 울음처럼 들려.
주희야, 내 말이 이해돼? 아니면… 무서워?
주희야,
밤이 깊어가는데 손바닥과 발등의 통증이 심해져. 이제는 분명한 동그란 상처가 보여.
내 생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져. 가끔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 같아.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해. “받아들여라”는 속삭임 같은 거.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는데, 점점 그 소리가 또렷해져.
네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 내가 철학과 수업에서 니체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 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말하는 동안 네 눈빛은 따뜻했어. 내 논리가 아니라 내 순수함에 끌렸다고 나중에 고백했었지.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좋았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내 안의 어떤 부분이 변하고 있어. 더 어둡고, 더 강렬하고, 더 본능적인 무언가로.
주희야, 내가 어떻게 되든, 널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해 줘. 그리고 혹시... 내가 예전과 다른 모습이 된다고 하더라도, 네 마음속에 있는 진짜 나를 기억해 줘.
항상 너를 생각하는, 지수
주희의 편지
지수야,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요즘 네 소식이 뜸해서 조금 걱정돼. 이미 귀국했을 것 같은데, 아직 편지 못하는 사정이 있겠지?
얼마 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도서관 근처를 지났어. 그날 생각이 나더라. 웃고 있던 네 얼굴, 책장 너머 네가 내민 책.
나 요즘 계속 기도해. 네가 무탈하길, 마음이 괜찮길. 그러다 문득 너에게 한 번이라도 “고맙다”라고 말한 적 있었나 싶었어.
고마워, 항상.
너의 제대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우리가 다시 함께할 날들이 무척 기대돼.
요즘 외국 감염병 때문에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데, 나는 너와 함께라면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부가 빠르게 출입국을 봉쇄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워낙 무서운 병이니까.
그리고 있잖아… 혹시라도 네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어디로든 잠시 떠나도 괜찮아.
다만, 사라지지만 말아줘. 내가 널 찾을 수 있게.
항상 기다릴게.
주희
Day 7
주희에게,
간밤의 꿈이 선명해. 내가 뒷산에 올라 홀로 기도하는 꿈이었어. 분대원들이 주변에 잠들어 있었고, 나는 땀을 흘리며 괴로워했지. “저에게서 이 병을 거두어 주세요.”라고 중얼거렸어.
그런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어. “넌 선택받은 거야.”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어.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했어. “나를 받아들여.”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강해진 느낌이었어. 내 몸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처럼. 피를 향한 본능도 훨씬 강해졌지.
나, 그 감염병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봤어. 상처, 거식증, 피에 대한 이상 충동, 끝내 잠식당하는 이성은… 그동안 모른 척하고 싶었나 봐.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해. 벌써 남미의 작은 국가들은 차례로 전복되었다지. 하느님의 심판일까?
방금 잠시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지수야, 어디 있어?” 너무 생생해서 창밖을 내다봤어. 하지만 아무도 없었지. 그저 바람 소리였나 봐.
내가 더 이상 나인 존재가 아니게 된다면, 그때도 살아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결심했어.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끝내기로. 내가 완전히 통제력을 잃기 전에, 내가 사람을 해치기 전에 끝내야 해. 뒷산으로 올라가서... 모든 걸 마무리할 거야.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네가 좋아하던 시인 릴케의 시 한 구절이 떠올라. ‘모든 천사는 두렵다.’ 그 말이 이제야 내 피부로 느껴져. 변화는 항상 두려운 거야, 주희야.
이제 나도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인간도, 괴물도 아닌 무언가. 경계에 선 존재.
왜 나를 선택하셨는지 알 것 같아. 나 하나로 사람들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다면, 내가 가겠어.
주희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네 사랑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넌 모를 거야. 네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부디 이해해 줘. 이건 내 선택이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특히 너를 위한 선택이야. 내가 괴물이 되어 결국 너도 해치게 될까 봐 두려워. 너는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 줬어. 나에게 진실한 감정을, 기도를,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 그런 너를 내 손으로 다치게 할 바엔... 그전에 끝내야 해. 네가 날 기억해 줄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든,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해.
네가 준 십자가를 손에 쥐고, 꿋꿋이 가야 할 길을 갈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영원히 너를 사랑하는, 지수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