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타임

part 1

by 이열

“이제 끝인가?” 트렁크에 짐을 싣던 기태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대기업 부장 기태. 회사 프로젝트로 근 두 달간 주말 없이 강행군을 이어왔었다. 마침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며 업무를 종료한 것이 지난주. 쌓인 대휴는 이번 달 안에 소진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았다.

“여보, 나 바쁜 거 이제 끝났는데 혹시 다음 주 수목금 휴가 낼 수 있어? 오랜만에 캠핑 가고 싶은데.”

“오, 축하해! 다음 주 수목금이라… 아, 어쩌지? 나 그날 피부과 예약이랑 동기 모임이 있는데… 혼자라도 다녀올래?”

“혼자? 음… 그러지 뭐.”

“지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 어? 아냐, 그럴 리가.”


기태는 콧노래를 부르며 액셀을 밟았다. 차창 너머 풍경이 점점 초록빛으로 물들어갔다. 5월의 햇살이 맑은 공기를 타고 봄에 생동감을 더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며, 기태는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우골 캠핑장”― 인스타그램 광고를 통해 알게 된 신생 캠핑장으로 호텔급 편의 시설과 전망 좋은 프라이빗 사이트를 보유한 곳이었다. 숙박 전날 신분증 지참 요청 및 다른 팀과 합석 불가 알림을 보내온, 까다로운 곳이기도 했다.

캠핑장에 도착한 기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그러진 화이트 톤으로 마감된 관리동과 편의동 건물, 그리고 구역마다 놓인 조각 예술은 여느 캠핑장과는 다른 기품을 자아냈다. 곳곳에 보이는 아름드리나무조차 계획에 따라 공간에 배치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요한 곳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인.

관리동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호텔 체크인 센터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가 기태를 환대했다. 월넛 색상 나무로 마감된 벽과 바닥이 따뜻한 느낌을 주었고, 흰색 대리석 상판을 얹은 데스크는 주인장의 고상한 취향을 말해 주는 듯했다. 통창으로 스며든 네모난 햇빛이 데스크 뒤편 벽 커다란 십자가의 발밑을 비추고 있었다. 좌측 벽 모서리에는 허리춤쯤에 올 법한 크기의 성모상이 있었다. 기태는 캠핑장이 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일 거라고 예상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데스크 직원이 말했다. 단발머리 중년 여성이었다.

“여기요. 그런데 신분증은 왜 체크하시는 거예요?” 기태가 말했다.

“저희가 사이트 예약 양수·양도는 금지하고 있어서요.”

“어, 그럼 예약자와 온 사람이 다르면 돌려보내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미리 공지드렸으니까요.”

기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입실 가능하죠?”

“저희 입실 시간이 2시부터라서요. 죄송한데 잠시 대기 부탁드립니다.”

“지금 1시 30분인데, 아직 못 들어가는 거예요?”

“네, 고객님. 저희 방침이 그렇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 건 웰컴 드링크 컵이에요. 기다리시는 동안 우측에 보이는 커피 머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기태는 시간을 때울 겸 캠핑장 주위를 산책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여우골은 대부분 사이트에서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 깨끗한 계곡을 끼고 있는 것도 강점. 노키즈 구역이 대부분이라서 그런지 놀이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두 시에 기태는 중년 직원에게 입실 안내를 받았다. 직원은 매너 타임은 8시 30분부터라고 강조하며, 사이트 위치를 안내했다. 전망 좋은 곳에 단독으로 자리 잡은 데크로 텐트 두 동이 들어가도 넉넉할 만큼 넓은 자리였다. 전방 멀찍이 푸른 들판과 산이 내려다보이는 명당. 편의동과 가깝고 주차도 사이트 바로 옆에 할 수 있었다. 차에서 짐을 나르는 기태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피칭을 마친 기태가 물을 사러 매점에 들렀다. 매점 입구, 외국 과자와 소스를 담은 나무 상자 여럿이 유럽의 식료품점을 연상케 했다. 생경한 상품들을 구경하던 기태는 선반 위 구석, 작은 불상 하나를 발견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인가?

왼편엔 와인 코너가 있었다. “어, 부르고뉴 와인도 파네? 가격이… 왜 이렇게 좋아?”

기태는 와인을 들고 잠시 멈칫했다가 무인 결제기로 가져가 바코드를 찍었다. 그래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이 정도는 선물할 수 있지. 그리고 데스크 직원에게 문의했다. “혹시 와인 오프너 빌릴 수 있을까요?”


“기태야!”

“어라?”

기태는 화장실에서 대학 동기 희원을 마주쳤다. 기태의 미간에 잠시 주름이 잡혔다 펴졌다.

“너도 캠핑 다녀?” 기태가 말했다.

“나? 오래됐지. 10년 더 됐나? 네가 캠핑 다니는 게 더 신기하다, 인마. 이게 얼마 만이야? 진짜 반갑다.” 희원이 기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5년 전에 본 게 마지막인가? 그동안 흰머리 많이 늘었구나, 너.”

“넌 피부 관리 좀 해야겠다, 인마. 사이트 어디야? 이따 놀러 갈게. 제수씨랑 같이 왔냐?”

“A18이야. 혼자 왔어.”

“좋구먼. 나도 혼자 왔어. 이따 밤에 찐하게 한잔해야겠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적당히 하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나도 예전처럼은 못 마신다. 주량이 줄었어. 소주 세 병 먹으면 힘들어.” 희원이 웃었다.

“그래, 이따 보자.”


숲 속엔 금세 어둠이 내렸다. 희원이 맥주 6캔 묶음을 들고 기태의 텐트를 찾았다.

“올, 헬리녹스냐? 성공했구나, 너?”

“뭘 이런 것 갖고 오바는.” 기태가 손사래를 쳤다.

“여기 사이트 진짜 좋다. B구역은 나무가 빽빽해서 시원하긴 한데 뷰가 좀 아쉬워. 오늘은 사람이 없어서 좀 무섭기도 하고.”

“애냐? 근데 별일 없겠지? 여기 합석 금지라며?”

“야, 다 그냥 하는 말이지. 평일에, 우리 말고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남자 둘 모였다고 뭐라 그러면 그게 말이 되냐? 우리 뭐 고성방가 할 것도 아니잖아? 몰라, 여기. 조용히 있다 가면 어떻게 알아?”

“그렇겠지? 암튼… 반갑다.”

둘은 맥주 두어 캔을 부딪치며 근황을 나눴다.

“어두워지니까 쌀쌀하다, 와인 마시자.” 기태가 말했다.

“역시 우리 기태, 럭셔리하구먼. 품종이 뭐냐, 이거. 피노누아? 난 싱겁던데. 오늘은 친구 취향에 함 맞춰 볼게.”

둘은 난로 앞에 앉아, 와인을 가득 따른 티탄 컵을 옆에 두고 옛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주로 희원이 주도했고, 기태는 짧게 의견을 덧붙이거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대화가 끊길 땐 이따금 이름 모를 산새 소리만이 고요한 숲 속 어디선가 메아리쳤다.

희원이 손짓 발짓하며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밖에서 파쇄석 밟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기태와 희원은 숨을 죽였다.

“고객님, 계신가요?” 중년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와인 오프너 빌려 가신 거 지금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아, 네네” 기태가 오프너를 들고 침착하게 텐트 지퍼를 열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직원이 힐끗 텐트 안을 쳐다봤다. “다른 분이 계시네요…? 혼자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여기서 우연히 만났어요. 잠깐 얘기 중입니다.”

중년 여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희 캠핑장 규칙은 알고 계시죠?”

듣고 있던 희원이 안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평일이고 캠핑장에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기태가 희원을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직원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8시 30분까진 정리해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출입구 지퍼를 내렸다.

“야, 여기 진짜 깐깐하다. 두 사람 모였다고 뭐라고 하냐.” 희원이 말했다.

“괜히 얼굴 붉힐 일 없잖아. 암튼 오늘은 허락받은 거지, 뭐.”

다시 잔을 기울이며 대학 시절 서로의 흑역사까지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갔을 무렵, 잠시 말을 아끼던 희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혹시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 없냐?”

기태가 구부정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 …그런 거 없다.”

“정말 없어? 말이 돼?” 희원이 눈을 부라렸다.

그때 기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희원을 빤히 보다가 이내 통화 버튼을 밀었다.

“네, 여보세요?”

“A18 숙박하는 분이시죠?”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맞는데요.” 기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캠핑장인데요. 지금 다른 팀이랑 함께 계신 거죠? 저희 캠핑장에선 합석 금지라서요. 안내드렸었는데 혹시 잊으신 걸까요?”

“아, 저 그게…”

“두 분이서 어떻게 오신 거예요?”

“네? 뭘 어떻게…?”

“두 분이서 어떻게 오신 거냐구요. 같이 예약하고 오신 거예요?”

“아뇨, 여기 와서 우연히 만났는데…” 기태는 다리를 떨었다.

“저희 다른 팀하고 합석은 금지라서요.”

“아, 네… 이제 파할게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희원이 찡그린 표정으로 기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된대. 합석 금지래.” 기태가 말했다.

“아니 어이가 없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우리가 시끄럽게 떠든 것도 아니고.”

“생긴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영업을 잘 못하네.”

“내가 가서 함 말해 봐?”

“아서라, 여간 완고한 느낌이 아니야. 괜히 싸움만 날 것 같다.”

희원이 혀를 차더니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남은 맥주 캔을 들고 텐트를 나서며 기태에게 물었다. “내일은 뭐 할 거냐?”

기태는 잠깐 텐트 천장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글쎄? 계곡물에 발 담그고 책이라도 읽을까.”

“팔자 좋구먼. 난 영랑호에 낚시하러 간다. 저녁에 또 보자고.” 등을 돌린 희원이 한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캄캄하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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