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도 인정할 수밖에 없던 그 한 통의 전화
2018년의 가을날, 추석연휴를 맞아 남들은 멀리 시골을 찾아 부모님이나 가족을 방문하고 있을 무렵, 나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혼자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결혼하기 위해 우크라이나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아내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부모님께 드렸을 때에 부모님은 그다지 놀라지 않으셨다. 사실, 이미 내가 국제연애를 하고 있다고 밝힌 시점에서 놀랄 건 다 놀라셨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실제로 여름에 아내를 직접 만나보기도 하신 부모님은, 막상 보고 나니 또 그저 아들의 며느리로만 보이셨는지 어서 결혼을 하고 돌아오라는 말 외에 별 말이 없으셨다. 아마도, 아내가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하는 편이기 때문에 겉모습만 외국인이지 속의 그것은 한국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쌍가마 아들이 아무리 결혼을 두 번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첫 결혼식이니 같이 가시겠냐고 도의적으로 물어는 보았지만, 부모님은 어차피 한국에서도 결혼할 테니 너만 잘하고 오라며 나를 그렇게 보내셨다.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번째 결혼식을 위해 터키의 이스탄불을 거쳐 아내가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에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이스탄불을 거쳐 자포리자 국제공항까지 가는 길은, 환승 운이 잘 맞으면 16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그렇게까지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다. 물론 가끔 운이 나쁘면 환승 시간만 열 시간이 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터키항공에서는 긴 환승시간이면 호텔에서 쉴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니 얼마가 걸리든 그 여정은 그다지 힘든 여정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아마도 그 여정의 끝에 만날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조금의 불편은 언제고 견딜 수 있다는 점이 더 컸겠지만 말이다.
터키항공에서 제공하는 입맛 돋는 기내식을 먹고 이런저런 공상도 하고, 비행기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성향 탓에 게임도 하고 책도 읽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도착한 우크라이나의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아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아니, 한국에 오기 전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미세먼지라는 것을 뉴스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접하고 나서는 필수적으로 마스크를 끼고 다니곤 했다.
으레 나에게 자포리자는 공업지역이기 때문에 공기가 좋지 않다ㅡ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한국에 와 보면, 지금의 그 말을 다시 넣고 싶어질거라 할 때마다 짐짓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던 아내였음을 생각하면, 역시 사람이란 겪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공항의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작은 입국장 문 앞에 아내와 삼촌 보바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처음 우크라이나에 들어올 때는 한국 여권을 처음 본 출입국 공무원이 나를 북한 사람으로 착각해 몇 시간이고 잡혀 있던 기억도 있던 때에 비하면, 아무 트집도 잡히지 않고 나온 것에 그저 기뻐해야 될 것이다. 눈부시게 나를 향해 웃어주는 아내와 수고했다며 팔을 툭툭 치며 격려해 주는 삼촌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우크라이나에서의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결혼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에서의 혼인신고서를 받아두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한국의 혼인신고는 해외에서 혼인신고를 한 경우라도, 국내에서 미혼임이 이미 밝혀져 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한국의 혼인신고된 상태를 미혼을 입증할 수 없는 상태로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나의 성향과 전혀 맞지 않았기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먼저 혼인신고를 마치고 그 서류를 내가 들고 와서 먼저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한 후, 결혼비자를 받고 아내를 입국시켜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마무리 짓는 계획을 세워 두었다.
결혼식을 두 번 해야 했던 우리는, 그래서 각자의 나라 일은 각자에게 맡겼다. 나는 한국 결혼식장의 예약과 결혼비자를 받기 위한 모든 서류준비를 정리하여 하나씩 처리해 나가고 있었고, 아내는 우크라이나 결혼청에 신고날을 예약하고, 피로연과 일체 행사에 대한 예약을 맡았다. 복잡한 예물이나 예단 같은 절차는 처가에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점에서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게 결혼준비를 했다.
그래도 공통적으로 신경 쓴 단 한 가지라고 하면 결혼반지였다. 특별히 예물용 반지나 시계, 또는 프로포즈용 반지 같은 것들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결혼반지는 결혼식에서 서로 끼워주고 앞으로도 평생을 벗지 않을 단 하나의 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마저도 아내에게 전부 일임했다. 보석의 모양새라든지, 반지 디자인 같은 건 내가 봐도 잘 알 수 없으니, 나는 그저 결제만 할 테니 너의 취향에 맞는 걸 알아서 고르라는 뜻이었다.
이성적이고 논리를 중시하는 나에 비해 아내는 그런 나보다는 좀 더 감성적이고, 사람 간의 따스함을 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내가 고양이라면 아내는 전적으로 강아지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우리도 잘 맞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소비에 대한 태도였다. 별로 자랑할 일은 아니겠지만, 나나 아내나 지금까지도 별다른 명품이 집에 있지 않다. 가끔 내가 그래도 기념일 같은 때에 명품 지갑이라도 하나 사 줄까 하고 물으면, 그 돈으로 차라리 다른 가방을 열 개를 사는 그런 사람이 우리다.
그러다 보니 결혼반지 또한, 우크라이나에도 티파니 같은 유명 브랜드는 있었지만 아내가 나의 손을 잡고 데려간 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종로의 이름 모를 금은방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알아듣지 못할 빠른 우크라이나 방언으로 서로 뭐라 뭐라 말하면서 나에게 한번 끼워보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뭔가 세심하게 반지를 돌려 가며 이것저것 따지는 아내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때에, 마침내 아내가 나에게 이제 결제하면 된다는 말을 하며 가격을 말해 주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11,000 흐리브냐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당시 환율로 아마 3백 달러 정도 했을 것이다. 금반지 두 개 값으로 적당한 가격이었지만, 분명 우크라이나에서는 제법 값나가는 가격을 지불한 것이었다. 어쨌든 결혼반지를 맞추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준비해야 할 대략적인 준비는 모두 맞춘 우리는, 근처에 자주 가던 디저트 카페에 가서 잠시 쉬기로 결정한 뒤 손을 잡고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2주간의 휴가를 쓰고 온 것이라고는 하나 급한 업무가 생길 수도 있을 일이니 현지 유심을 사용하지 않고 미리 로밍을 준비해 놓고 간 나에게 걸려온 전화는 어디에서 걸려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일단 혹시 회사일지도 모르니 전화를 받고, 습관적으로 내 이름을 밝히며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통화의 내용은 지금 생각해도 예측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Karel Jo고객님 되시죠? 삼성카드입니다. “
-아 네… 안녕하세요, 본인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고액결제가 이루어져서요. 혹시 카드분실이나 도난을 당하신 적이 있으실까요? “
-에…에?? 아, 제가 지금 우크라이나에 있습니다. 방금 제가 결제했어요. 결혼하러 와서요.
“아!! 그러시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결제가 흔히 이루어지지 않을 곳에서 결제가 되어, 의심 가는 사례로 추정되어 혹시나 하고 전화드렸습니다^^“
-아…이런 서비스도 있군요. 감사합니다. 그, 며칠 정도 있을 예정이라서요. 앞으로도 몇 번 있을 건데 다 정상 결제 건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결제되실 때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그 전화는, 내가 우크라이나에서 오후 3시 정도였으니 한국에서는 이미 밤 9시였나 그랬을 시간이었다. 아내는 옆에서 무슨 전화냐고 궁금해했고, 상황을 설명해 주니 한국에선 그런 서비스도 있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가장 놀라웠던 건 나였다. 보이스피싱이나 카드결제에 오류가 있었을 때 카드사들이 발뺌하는 뉴스는 많이 봤어도, 이렇게 이상결제를 감지하고 24시간 동안 결제내역을 보고 있단 말인가? 사실여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객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안심이 가는 일이었다. 그때 내 카드가 딱히 VIP카드 같은 연회비가 비싼 카드가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이나 말이다.
그 에피소드 이후로 무사히 결혼식도 마치고, 우크라이나 혼인신고서도 받아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나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삼성카드 전도사가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크라이나에서 겪은 이 놀라운 모니터링의 에피소드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나의 놀라움을 전했고, 그렇게 지금까지도 매년 삼성카드를 주 카드로 애용하며 나의 신용카드 소득공제액을 채워줄 주 카드로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진짜로 삼성카드에서 모든 결제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며 이상결제에 대해 선제 조치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알 길은 없다. 다만 나로서는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카드사에 대한 깊은 믿음이 생겼고, 그 이후로도 해외결제가 필요할 때는 자연스럽게 삼성카드를 내미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서로의 평생을 맹세하기 위해 결혼반지를 사러 간 그 길에, 나는 그렇게 아내 말고 카드와도 평생을 기약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