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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의 춤사위, 천 번의 키스, 그리고 결혼

그토록이나 뜨거웠던 우크라이나의 결혼식

by Karel Jo


나의 소중한 보안을 지켜 준 삼성카드와의 인연에 대한 달콤함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내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주 목적인 결혼식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어느덧 다가와 버리고 말았다. 추석 연휴에 오긴 했지만 그 뒤의 일정을 길게 뺄 수 없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결혼식을 마치면 나는 곧이어 한국으로 돌아가 혼인신고와, 세 달 뒤로 예정된 한국에서의 결혼식 전에 아내를 초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로 또 정신없는 숙제를 가득 안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맞은 결혼식 첫날 아침, 새벽같이 눈을 뜬 우리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실감하지 못했다. 오늘, 우리가 결혼하는 날이구나라고 입 밖으로 내어 봐도, 웃음은 가실 줄 모르나 전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말이었다. 아내의 메이크업을 위해 사람이 왔을 때도, 이 날을 위해 꼭 맞춘 드레스를 입고 같이 손을 잡고 아파트 현관을 나와 웨딩카를 타는 순간에도, 그날은 시작부터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통 비현실 투성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 대신 Органи реєстрації актів цивільного стану, 통칭 РАЦС, 구 소련권에서는 '작스'라고 통용되었던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자면 '호적등기소'라는, 가족관계등록부를 관장하는 관청에서 혼인신고 겸 결혼식을 하게 된다. 우리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다른 커플이 결혼식을 마치고 관청 앞에서 사람들의 축하를 연신 받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아내가, 도저히 자포리자 시내에서 볼 수 없는 토종 동양인이 정통 우크라이나 여자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꽂혀 웅성웅성대곤 했다.


혼인신고라고는 하지만, 나름 결혼식장을 겸임하는 곳이기 때문에 식순도 정해져 있다. 공무원 앞에서 선언도 해야 하고, 반지도 교환하고 마지막엔 혼인증명서에 각자의 서명까지 마치면, 엄숙한 분위기 아래 우크라이나의 법 아래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한다는 그 말과 동시에 공식적인 '결혼식'절차는 모두 끝이 난다. 여담으로, 생각 외로 진지한 분위기에 긴장한 나머지 나는 반지를 교환할 때 반지를 땅에 떨어뜨려 버렸는데, 새하얀 천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하마터면 무심결에 어길 뻔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제목과 걸맞지 않게, 우크라이나 결혼식도 한국 결혼식과 별반 차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결혼식장이 아닌 등기소에서 결혼을 같이 한다는 것 빼고는 걸리는 시간이나 절차나 한국의 결혼식과 크게 다를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 끝나고 나온 뒤 관청 앞에서 살아 있는 비둘기 두 마리를 같이 날렸다는 것 정도가 조금 특이한 점일까? 그마저도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독특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은 피로연이다. 우크라이나의 결혼식은, 식장에서 끝나고부터가 시작이다.


부모와 자기 지인, 친척들까지 통상 100~200여 명을 하객으로 초대하는 것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결혼식에는 정말로 친한 친구와 지인 정도만 결혼식에 초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편인 내가 데려올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 쪽만 피로연 인원을 준비했는데 20명이 조금 넘는, 그마저도 30% 정도는 친척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아내와 장모님의 정말 친한 친구 한두 명 말고는 아무도 초대되지 않는 셈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랑 신부가 간단한 웨딩촬영을 한 뒤 본격적으로 '2부'가 시작된다. 피로연의 시작은 구 동구권 나라의 관습 중 하나인 '소금과 빵'이라는 것으로, 커다랗게 구운 빵 위에 뿌려진 소금을 양껏 찍어, 부부가 서로 나눠 먹으며 오랜 미래를 약속하는 관습이다. 진짜 소금이기 때문에 당연히 많이 찍으면 짜다. 하지만 나와 아내는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마치 빵 위의 아이싱인 양 서로 소금을 입에 가득 먹여주며 피로연장으로 들어갔다.


2부에는 보통 하객들의 명수에 맞춰 식당 하나를 통째로 대관하고, 전문 MC를 불러 2부 행사를 주도할 역할을 맡기는 게 일반적이다. 아내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MC는 안경을 쓴 나이 든 맷 스미스를 닮은 분으로, 굉장히 유쾌한 분이었고 내가 러시아어를 알아듣는다는 점에 몹시 고무되어 이것저것 나를 추켜세우며 '이게 우크라이나야!'라는 듯한 느낌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기억은 몇 년이 지났음에도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즐거웠기 때문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굉장히 힘들었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피로연장에 들어가서부터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은 술과 춤, 그리고 키스였기 때문이다. 도저히 연결될 것 같으면서도 연결되지 않는 3개의 단어겠지만, 설명을 들어 보면 왜 그런지 납득이 될 것이다.


맨 먼저,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일단 신랑 신부를 위하여!라는 축사로 연결되게 된다. 다행히 아내가 술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와인을 마시긴 했지만, 와인이라고 입이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 하객들은 Горько! (쓰다!)라고 외치면서 쓴맛을 지우기 위해 신혼부부가 키스할 때까지 외침을 멈추지 않는다. 신혼부부가 키스를 하고 환호를 지르고 나면, 그때부턴 모두가 춤판을 벌인다. 그리고 이걸 밤이 될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떤 이유여도 좋은 상태로.


물론 사이사이에 우크라이나 전통에 맞는 몇 가지 의식들이 행해지기도 했다. 결혼을 해서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아내에게 면사포를 머리에 접어 성인 여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준다든지, 당연히 케이크도 자르고 했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그저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아내와 입을 맞춘 뒤 셔츠가 젖어버릴 때까지 춤을 추었던 기억뿐이다. 피로연을 찍은 동영상을 보면, 분명 제대로 갖춰 입고 들어간 옷은 피로연장을 나올 때 풀어헤쳐진 셔츠와 온데간데없는 타이만 남아버렸다.




아마 내가 한국에서도 결혼식을 했음에도 그보다 우크라이나에서 한 결혼식이 언제나 더 기억에 남고, 우리 부부가 챙기는 결혼기념일도 한국보다는 우크라이나인 것은 우리 둘 모두의 마음에 더 깊숙이 남아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도 한국에서 하객으로 친구나 회사 동료들의 결혼식에 많이 참여해 봤지만, 솔직한 말로 기억에 남는 결혼식이 그다지 없다. 아무리 신랑 신부가 주인공인 날이라고는 해도, 솔직하게 하객들은 축의금을 내고 잘 차려진 밥을 먹고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나와 아내는, 하객들의 끊임없는 외침 속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그들 속에 섞여 엉터리 춤사위로 온몸을 흠뻑 적시며 그들과 함께 진심을 나누었다. 춤을 잘 추든 잘 추지 못하든, 그 사람이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그런 건 그 순간 그 공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그 훌륭한 날을 모두가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축하하기 위해 그야말로 '즐긴다'라는 생각으로 새하얗게 불태우고, 그렇게 우리는 자정이 되어서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날의 밤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줄 알았던 장면들은 오히려 또렷해져,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보던 사진 한 장처럼 마음의 가장 단단한 자리에 남아 있다. 그때의 우리는, 무엇을 다짐했는지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했지만 한순간도 거짓되지 않았고, 서로의 손을 잡는 힘만으로도 앞으로의 길을 함께 건너가겠다는 뜻을 충분히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삶의 방향이 복잡하게 흔들릴 때면 나는 늘 그 밤의 소리와 빛을 다시 꺼내 들곤 한다. 와인 잔이 부딪히던 소리, 하객들의 웃음이 겹겹이 쌓이던 공기, 그리고 우리가 끝내 놓지 않았던 손의 감촉.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우리를 기어이 이 자리까지 데려온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꽤 괜찮게, 어쩌면 그날의 마음가짐 그대로 잘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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