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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 부부는 식탁에서 뭘 먹을까?

서로 다른 요리와 문화가 한 집안의 레시피북이 되기까지

by Karel Jo


나의 어머니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올라오신 분이다. 어쩌다 보니 나는 군산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의 손맛은 전라도 음식을 기준으로 스탠다드가 맞춰졌다. 물론, 위쪽 출신인 아버지 집안의 영향도 없지 않았던 것이, 나는 남쪽에서는 설날에 떡만둣국을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떡국을 먹는다는 사실을 꽤 나중에서야 알고 나서 적잖이 놀랐던 적이 있다. 가정의 맛이란, 그러니 아마 그런 걸 거다. 양 쪽의 다른 맛이 합쳐져 하나의 맛으로 그 가정의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렇다면 나와 아내가 만나 꾸린 식탁은 어떤 맛일까. 사람들은 그 점을 궁금해했다. 한국까지 따라온 아내라면 한식을 좋아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고, 오랜 기간 체코에서 지냈던 나를 보고 “이젠 양식이 더 편하지 않겠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식탁은 어느 한쪽을 따라가지 않았다. 한쪽을 버리거나 다른 쪽에 억지로 맞추는 방향이 아니라, 두 나라의 맛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결과물—그 어딘가, 중간쯤에 있는 맛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우리 부부의 맛이라고 여긴다.




부부의 맛을 말하기 전에, 나의 맛의 뿌리를 찾아 올라간다고 하면 역시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학생일 때는 여전히 가정에서 아버지는 돈을 버는 사람,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는 사람, 특히 요리하는 남자는 그렇게 상상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나의 어머니는 혜안을 갖고 '앞으로는 남자도 집안일을 하는 시대가 온다'라는 생각으로 집안일을 누나들보다 나에게 더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시장도 같이 따라가고, 간을 맞추는 법도 가장 먼저 배운 덕분에, 20대 중후반을 체코에서 홀로 보냈을 때 나는 어렵지 않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싼 한인식당을 전전하지 않고, 재료를 사서 스스로 요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식비를 절감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지식에 경험을 더해, 이 정도면 결혼해도 되겠다는 마음으로 인연을 찾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준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고, 인내도 필요했다. 그리고 결국, 7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이 내 아내가 되었다.


결혼 전에 아내를 만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장모님께서 대접해 주신 보르쉬의 선명한 진홍빛 강렬함은 여전히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똑같은 붉은색이라고 할지라도, 비트가 우러나와 만들어낸 색은 김치찌개의 붉음과는 전혀 다른 깊이였다. 김치찌개는 고춧가루의 매운 붉음이고, 보르쉬는 발효와 사워크림이 만들어낸 산뜻한 붉음이었다.


둘 다 빨갛지만, 그 맛의 결은 완전히 달랐다. 한국의 밥상처럼 주식과 반찬이 늘어선 구조가 아니라, 한 그릇의 수프로도 충분한 우크라이나식 식사는 그때의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꽤 낯설었다. 체코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다시는 양식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결혼 후 처음 마주한 저녁 밥상에서 아내가 정성껏 만든 알리오 올리오를 보았을 때, 나는 맛있게 먹으면서도 묘하게 허전함을 느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익숙한, ‘밥 한 그릇 + 여러 반찬’의 감각이 사라진 탓이었다. 배는 부른데 입이 심심했다. 몇 날 며칠을 적응하지 못해 밤마다 집안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호기롭게 나를 따라 한국에 살겠다고 고향 땅을 떠나왔지만, 적응이 쉽지 않은 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음식을 제대로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매운맛의 경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외국의 한식당에서 간을 꽤 눌러 놓은 것과 달리 한국의 정통 김치찌개는 그녀에게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쏟게 하는 고문에 가까웠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당혹스러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라면도 신라면은 고사하고 진라면 순한 맛도 수프를 반만 넣어야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서로의 음식을, 그리고 밥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부란 결국 서로를 위해 조리법을 바꿀 줄 아는 사람들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타협했다.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밥상을 만들어 보자고.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고춧가루와 마늘의 사용량을 현격하게 줄이는 것이었다. 아예 고춧가루를 배제하고 어린아이들이 먹는 것처럼 모든 요리를 간장을 활용해 간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내는 힘들어하면서도 매운 음식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초등학생이 처음 떡볶이에 익숙해지듯이, 그렇게 나는 천천히 아내를 위해 매운맛의 강도를 조절해 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아내는 나를 위해 단품요리를 만들면서도 옆에 한 가지 정도는 사이드 메뉴를 같이 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치즈와 연어를 넣은 샐러드인 날도 있고, 어느 날에는 중앙아시아 식료품점에서 사 온 햄을 구워 내놓기도 했다. 어떻게든 반찬이 생기자 밤늦게 뭔가를 찾아 나설 일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노력한 것은, 이 모든 행동을 기록한 우리 집만의 레시피북을 정리해 나간 것이다.


우리가 만든 이 새로운 맛이 자리를 잡자, 요리에 대한 분담도 달라졌다. 예전엔 한국 음식이 먹고 싶으면 내가, 우크라이나 음식이 먹고 싶으면 아내가 요리했다. 하지만 이제는 요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면, 그 레시피는 이미 ‘우리 집 레시피’에 맞춰 그때그때 요리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니까. 물론 한식은 여전히 내가 좀 더 잘하고, 우크라이나 요리는 당연히 아내가 더 잘한다. 그러나 이렇게 태어난 '가정의 맛'이기에, 누구나 즐겁게 요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입맛이라는 것이란 그 사람이 지나온 삶의 모양을 닮아 있다. 남원의 국물 맛과 군산의 손맛이 뒤섞여 내 입맛을 만든 것처럼, 아내 역시 우크라이나의 바람과 자포리쟈의 드니프로 강 냄새가 배어 있는 사람이다. 전혀 다른 두 나라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식탁 앞에 마주 앉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충돌을 예상하게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충돌이야말로 우리가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 가는 힘이 되었다.


서로 다른 맛 사이에서 서로의 한계를 가늠해 보고, 다시 한 걸음 양보하며 새로운 맛을 찾아 나가던 시간들은 단순히 요리의 조정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조율이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양념을 배워가다 보니, 어느 순간 우리 식탁 위에는 어느 나라의 정통이라 부르기 애매한, 그러나 분명 우리 둘만의 맛이 남았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한쪽이 다른 쪽에 완전히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의 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그릇에 담길 수 있는 균형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안다. 우리가 만든 이 맛은, 그저 음식의 향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의 모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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