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 중요치 않았던 공간의 크기
회사에 입사 관련 서류를 제출하거나, 은행에 대출심사를 하거나 할 때, 또는 여러 의미로 관공서에 개인 관련 서류준비를 하다 보면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은, 주민등록등본이 아닌 주민등록초본을 요구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나는, 초본을 떼 보면 어른이 된 이후부터는 항상 네 장을 넘기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보통, 세대 간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이기에 초본이 등본보다 장수가 많은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초본의 장수가 많다는 말은 매우 간단한 이유다. 그 사람이 살면서 이사를 많이 했다는 말이라고 보면 거의 맞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록이기 때문에, 초본은 거주지가 바뀌면 한 줄이 늘어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사를 참 많이 했었다. 7년 동안 살았던 군산에서조차 세 번 정도는 했었고, 안산으로 올라온 후에도 족히 일곱 번은 넘었을 것이다. 심지어, 혼자 체코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지내던 순간에도 나는 집을 두 번 옮겼다. 살면서 이사한 횟수를 년수로 나누면, 족히 2-3년에 한 번은 이사한 셈이다.
특별히 좋아서 이사했다기보다는, 그만큼 삶의 굴곡이 많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진관이 잘 될 때는 좋은 아파트에 살다가, 어느 순간에는 빌라로, 월세로, 제각기 다른 시간의 다양한 이유들은 언제나 우리 가족의 짐을 싸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물욕이 사라졌다. 이사할 때 번거로웠기도 하고, 당근마켓이 없던 그 시절엔 버리는 물건도 결국엔 많았으니까.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살면서 이사를 그렇게 많이 해보지는 않았다. 일단, 외동이었고 생전의 장인어른께서 발전소 엔지니어로 일하셨고, 장모님은 지금도 간호사로 일하고 계시니 특별히 부족할 것은 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어쨌든 소련이었고 말이다.
넓진 않아도 세 가족이 살기엔 적당한 크기의 오래된 아파트와, 그리고 시골에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집 한 채가 아내에겐 전부였다. 달리 말해, 아내는 집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반드시 한 채는 갖고 있어야 한다거나, 꼭 신축 아파트여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이사를 많이 다녔으니 어디라도 상관없다는 나와, 집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아내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신혼집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그리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게 만들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절대적으로 거리였다. 아내가 한양대학교 안산의 어학당에 다닐 거였으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에 살자가 우리의 합의였다.
결혼식을 하기 전, 우리는 그렇게 영상통화로 지도와 부동산 앱을 둘러보며 괜찮은 매물을 같이 찾아봤다. 비록 아내가 함께 볼 수는 없었지만, 집을 실제로 볼 수 있는 때에는 페이스톡을 켜며 간접적으로나마 아내의 마음에 드는지, 괜찮은지를 같이 나누었다. 운이 좋게도, 적절한 가격대에 리모델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구축 빌라를 찾을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많이 알겠지만, 안산은 다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을 끼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장 노동자들도 많지만, 예전 정부에서 사할린 동포들에 대한 귀국정책을 쓰면서 노동자들 외에 고려인 동포들 또한 아마 광주와 더불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곳은 한양대학교 캠퍼스 바로 앞에 위치한 주택가 중 하나였다. 그곳은 당시 내 직장과도 차로 5분 정도로 가까웠지만, 무엇보다 아내가 어학당으로 바로 걸어갈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주변에 고려인 마트가 있다는 점이 오히려 플러스였다. 사람이 해외에서 가장 먼저 향수병을 느끼는 게 음식인데, 아내에겐 다행히 고향 음식을 바로 옆에서 느낄 밥집이 있었다.
계약 당시 집주인 분께서는 인상이 좋으신 노부부셨다. 아내가 우크라이나 결혼식 후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우연찮게 만나 뵐 일이 있었는데, 자주는 오지 않지만 필요한 건 언제나 이야기하라는 따스한 말씀과 한국에 빨리 적응하라는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다.
그 신혼집에서 결국은 첫째 아이도 생기고, 아이를 생각해 아파트로 나오게 된 시점까지 특별한 사고 없이 무사히, 그리고 계약기간보다 좀 더 빨리 나오게 되었는데도 별문제 없이 전세금까지 잘 돌려주신 덕에 우리는 지금도 가끔 안산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처음 우리가 부부생활을 시작했던 그곳에 가끔 방문해 추억에 잠기곤 한다.
지금의 집에 비교하면 확실히 좁기도 좁았고, 풀옵션이었기에 내가 갖고 들어간 광파오븐과 티비 하나 말고는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던 집이다. 재활용이나 음식물쓰레기는 언제나 치우기 불편한 것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이다 보니 장을 보고 올라올 때도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불편함보다는 그저 행복한 추억이었다. 저녁 무렵 1층 호프집에서 가끔 시끄럽게 울리는 대학생들의 젊음이랄지, 내가 돌아오는 발소리를 듣고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는 아내랄지, 조촐한 식탁 위의 나란히 앉아 먹던 저녁이랄지. 많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필요한 건 모두 갖고 있었다.
아무것도 완벽하지 못해 더 많은 것을 함께 같이 해야만 했기에 아마도 그 집은 우리에게 더 풍성하게 남아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리고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더 단단하지 않을까. 첫 집에서 기꺼이 함께 즐거워하며 불편했기에. 우리의 첫 집은 여전히 그렇게 강렬한 시작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