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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세레나데

내가 직접 부른 축가가 우리 결혼을 완성한 순간

by Karel Jo


정신없는 춤사위 끝에 하늘 위로 날려버린 불꽃놀이의 화려함을 묻어둔 채로, 결혼한 지 하루 뒤에 바로 한국으로 귀국해야 하는 폭력적인 일정을 두고 나와 아내는 곧 다시 만날 것을 알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공항에서 서로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함을 슬퍼했다. 어쩌면, 그 기다림은 우리가 했던 장거리 연애 기간 중 그 어느 순간보다도 가장 오랫동안 기다렸어야 했던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뒤 그 슬픔을 오래 가져갈 여유는 없었다. 결혼비자 신청을 제때 맞추기 위해서는 혼인신고를 먼저 완료해야 했고, 그건 또 다른 서류뭉치를 수십 장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동화에 서류 떼는 게 간편하다 할지라도, 준비해야 되는 양이 각각마다 다르면 그걸 챙기는 것 또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인신고와 비자신청 시의 서류가 조금 미묘하게 다르다.


다행히 극 J인 나는 우크라이나에서부터 미리 혼인신고와 비자신청을 위한 서류준비 계획표를 준비해 두었기에, 이렇게까지 잘 준비해 오신 분은 처음 봤다는 구청 공무원 분의 극찬 끝에 어렵지 않게 혼인신고를 마치고, 비자신청 서류까지 무사히 다시 아내 편으로 보내 결혼 후 두 달 후에 F-6 비자 승인까지 무사히 완료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새긴 결혼의 시간 이후 두 달이 걸려서야 다시 한국에서 완전히 결합했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만난 부부, 응당 신혼의 달콤함에 취해있어야 했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결혼식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결혼식은 정말 나 혼자만 가서 식을 치르고 온 것이었기에, 나는 우리 집 막내자식으로서 부모님께 그동안 보냈던 감사의 마음을 되돌려 받으실 수 있는 집안의 가장 마지막 중대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치러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장은 미리 잡아두었다고 해도, 신부가 골라야 할 수많은 세부사항은 전부 아내를 위해 남겨 두었다. 그렇게, 한 달이 정신없이 또 흘러갔다.


아내가 한복을 고르고, 식장 주변에 뭐를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동안, 나는 식순을 구성하면서 아내에게 말 못 할 고민을 하나 갖고 있었다. 그건 바로 축가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회는 다행히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으니 부탁할 수 있었고, 주례를 봐줄 만큼의 어르신이 딱히 없었기에 아버지께서 흔쾌히 본인이 한 말씀을 하고 싶다고 하셨기에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축가만큼은, 도저히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나의 지독히도 깊고 좁은 대인관계를 탓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당시 회사 동료 중 누군가나 교회 청년부의 친구들 중 하나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다. 아마 누구라도 얘기했더라면 딱히 거절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나눠 줬을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뭔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아내에 대한 감사함이나 감동, 그리고 사랑을 온전히 전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의 농도와 비슷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분에 있어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엄격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핸드폰에 저장된 수십 수백 명의 연락처를 곰곰이 지워나가 봐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결정의 시간을 앞두고 누군가를 지정해 결혼식장에 전달해 주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지막 최종 식순과 축가 MR을 전달해야 하는 디데이가 왔을 때, 나는 누구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순의 축가 인원에 내 이름을 적어내며 식장에 제출했다.


물론, 그 결정에 대해 아내에게 딱히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자기가 유일하게 결정하지 않는 부분이었기에 축가는 누가 부르기로 했냐는 그 말에 나는 대충 지인 중 누군가 해주기로 했다. 노래를 잘하는 친구는 아니니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딱히 아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한국 결혼식이 대강 어떤 형태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아내는 우리나라에서 하는 결혼식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단지 드레스 후에 예쁜 한복을 한번 더 입는다는 사실 정도? 외에는.




시간이 흘러 2019년 1월의 어느 날, 한국에서 우리의 두 번째 결혼식을 하기로 한 날이 왔다. 또다시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결혼식장으로 가서 아내는 메이크업을 받고, 우크라이나에서 사 온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그날엔 나도 간단한 신랑 메이크업을 아주 어색한 태도로 받았다.


아내가 신부 대기실에서 부케를 받을 친구 한 명과 심심하지 않게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낼 무렵, 나는 카운터 근처에서 부모님 친구분들, 멀리서 오신 친척분들, 생각보다 많이 와준 내 지인들까지 포함해 정신없이 허리를 굽히고, 악수를 나누며 눈 코 뜰 새 없이 보내다 식이 시작된다는 진행요원분의 말에 식장 앞에 섰다.


다른 결혼식과 으레 다르지 않게 화촉점화, 아버지 말씀, 성혼선언문 등을 죽 읽어나가며 빠르게 식순을 해치워나가는 과정에,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신부를 향한 축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세레나데의 시간.


누가 나올지 슬쩍 궁금해하는 아내의 앞에 나는 마이크를 받아 섰다. 곧,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내의 눈에 노래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노래는 이적의 '다행이다'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저 그 가사가 나의 아내에 대한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한 장의 티슈처럼 그저 감정을 채워나가기 위해 뽑아 쓰던 과거의 사랑을 묻어 두고,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함을 알게 해 준 그 사람을 위해 나는 담담히 노래를 불렀다. 가수처럼 완벽한 기교를 갖지도 못하고, 멋있는 고음 처리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담담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으로.


보통의 노래방이라면 1절이 끝난 뒤 끝나야 할 노래를 완곡하고 난 뒤, 마이크를 내린 나에게 아내가 달려와 그렇게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언제나 이렇게 자기에게 생각 못할 작은 이벤트로 자기를 놀라고 설레게 해 주어 고맙다고. 우크라이나에서 했던 결혼식만큼이나, 지금 자기는 몹시 감동적이고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라고.




결혼식이 끝난 뒤 피로연장에서, 많은 사람들은 나의 평소 성격을 알고 있기에 내가 그 자리에서 노래할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언제 그런 준비를 했느냐고, 진심 어린 노래에 놀랐다는 여러 반응을 보여 주셨다. 특별히 남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 나였다 보니, 그런 모습도 있느냐는 낯선 반응에 어쩐지 하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이후로 사실 아내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불러 준 적은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졸음을 쫓기 위해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한 적은 있어도, 자리에 마주하고 아내의 눈을 보며 마음을 소리로 전달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이 기억을 글자로 추억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은 언제나 글로 써지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8년에 접어든 지금도, 그날의 조용한 음정들은 나와 아내의 마음 어딘가에서 아직도 울리고 있다. 거창하게 잘 부른 노래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의 사랑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방법은 글이 아닌 소리로, 가장 맨얼굴의 문장으로도 전달할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여전히 나의 마음은 글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 노래는 여전히 우리 사이의 굳건한 기억의 다리로 남아 있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울림이 우리 사이를 단단히 엮어 주는 다리로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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