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번갈아 잠들며 부모가 되었다

첫 50일은 이해가 아니라 유지였다

by Karel Jo


아내와 함께 병실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우리는 면회 시간이 올 때마다 면회실로 내려가 희망이 얼굴을 연신 바라보면서 신기해했다. 사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희망이는 그저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여주며, 가끔은 입을 벌리다가 셋째 날이 되어서야 눈을 뜨고 어딘가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별 것 아닌 광경이 우리에겐 매 순간의 신기함이었다. 우리 아이다. 나와 아내가 만든,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


그러나 2020년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조리원에서는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퇴원 후 약 2주간은 집에서 그저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며, 조리원에서 돌아올 그날을 위해 아기 침대를 조립하고, 가끔 불안감을 털어내기 위해 친구와 한두 잔의 술을 기울이기도 했다. 아내 또한 조리원에 있는 동안은 자기가 온전히 아이를 보는 건 아니었기에, 환경이 주는 편안함 속에 불안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결국 그날은 왔다. 조리원에서 아내와 아이가 퇴소하는 날. 우리 집과 병원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앞이었지만 그 500미터 남짓 되는 거리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험난한 가시밭길 같은 느낌이었다. 포대기에 잘 싸인 아이를 조심조심 안고 집에 와 내가 조립한 아기 침대 위에 눕히고도 여전히 숨 쉬며 잠든 아이를 보니, 더욱이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우리는 이제,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첫째 딸이 마침내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온 날 이후의 시간은, 더 이상 우리에게 행복한 신혼생활의 방식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전히 하루는 아침과 점심, 밤으로 나누어져 열심히 24시간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의 경계는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갔다.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라기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잠들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물건으로 변질되어 갔다.


지금은 두 딸 모두가 신생아에서 벗어난 지 오래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아기는 갓난아기일 때가 차라리 가장 쉬운 거라고. 그러나 그때에는 그저 드높은 벽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단순하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 감당할 수 없는 깊이가 가득한 것이 육아였다. 그저 자고, 울고, 먹고, 다시 잠들기만 하는 건데도 우리는 왜 또 자는지, 먹었는데 왜 우는지, 자고 있으면 지금 내려놔도 되는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아이는 그저 아이답게 있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틀린 선택에서 배우고 있었다.


모성애와 부성애의 차이가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것을 감각의 차이라고 깨달았다. 확실히 나보다는 아내가 아이의 작은 변화를 빠르게 캐치하는 편이었다. 울음소리 톤의 높낮이 차이, 얼굴이 붉어지는 속도, 표정에서 오는 작은 차이들을 아내는 엄마의 감각으로 잡아냈다. 나는 그 차이를 설명해 달라는 쪽에 가까웠다. “아까랑 다른 거야?”라고 묻고, 아내는 “응, 지금은 다르게 울어”라고 답했다. 그 대화는 대개 거기서 끝났다. 설명은 늘 부족했고, 그러나 그 부족함은 틀리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전통적인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에 내가 밖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할 수 없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힘든 만큼 아내도 힘들 것이기에, 일단 직장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 나는 밤에 아내를 좀 더 재우기로 하고 우리의 밤을 그렇게 나누었다. 초반 밤에는 내가 좀 더 깨어 있다가 애를 재우고, 아침까지는 아내가 보는 걸로 하기로.


마지막 수유를 하고 나면,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가 깨어날 시간을 가늠했다. 그 시간은 점점 예측 가능해졌고, 그 예측 가능함은 묘하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한두 시간 뒤 아이가 다시 젖병을 물고 엄마의 품에 잠드는 걸 보면서 나는 아이의 호흡과 아내의 호흡이 맞춰지는 걸 보며, 이 역할 분담이 공평한지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다. 계산해 보려 했지만, 어느 쪽이 더 힘든지는 끝내 정리되지 않았다.


육아란 물론 그렇게 딱 계산에 맞게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나는 매일 조용히 거실을 오가며, 아이가 다시 잠들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팔은 저려 왔고, 허리는 점점 굳어 갔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에는 잡생각이 줄어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흔들고, 기다리고, 내려놓는 것.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나는 내가 아버지로서의 역할보다는, 그저 지금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아내의 힘듦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50일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몇 번의 작은 충돌을 겪었다. 대부분은 말투에서 시작되었다. “왜 이렇게 안 자?”라는 말이 “왜 이렇게 재우질 못해?”로 들리고, “내가 할게”라는 말이 “네가 못하니까”로 받아들여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고, 아이의 울음이 그 공백을 대신 채웠다.


아이 앞에서 다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투기 전에 이미 지쳐 있었고, 다투고 나면 감당해야 할 하루가 더 길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짧게 사과했고,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해보다는 유지가 더 중요해진 시기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아이가 30일을 넘기면서 조금씩 다른 표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조심스러웠지만, 우리는 그 표정을 웃음이라고 불렀다. 아내는 그 웃음을 믿었고, 나는 그 웃음이 우리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믿음의 방식은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무엇을 알겠다는 건지는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지 조금 분명해졌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50일째 되는 날,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는 울었고, 우리는 번갈아 잠들었으며, 하루는 조용히 끝났다. 다만 그날은, 아이를 내려놓고 잠든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시선이라기보다는, 그냥 익숙해진 얼굴을 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그 50일 동안 배웠다. 대신, 매일 조금씩 어제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선택의 대부분은, 여전히 확신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이와 함께한 첫 50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는 아직 서툴렀고, 여전히 피곤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았다. 이 생활이 특별한 비상사태가 아니라, 당분간 계속될 일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다음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의 육아가, 나의 부모님에게도 존중받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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