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했던, 백일의 산책
첫 아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과 중압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와 부모님은 서로의 뜻이 맞아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전까지는 당분간 같이 살면서 한국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아내의 힘듦을 덜어주기로 결정했다. 아내로서 가장 좋은 것은 친정어머니가 오는 것이겠지만, 장모님께서는 아직 하시는 일을 관둘 생각이 없으셨고 우리 부모님은 어느 정도 노년에 이미 접어든 나이셨기에, 서로에게 있어 최선의 결정이었다.
투룸 빌라를 넘어 아파트로 집을 합치게 된 순간, 아이가 조리원을 나와 집으로 들어와 그 작은 무게감으로 온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놓는 순간에도 부모님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를 도와주셨다. 아이를 온전히 보지는 못하더라도, 집을 청소하거나 저녁을 지어 주시며, 또는 우리의 빨래를 같이 해 주시며 착실하게 삼대가 사는 집은 그렇게 피어나는 중이었다.
그즈음, 아이가 조금씩 바깥을 향해 눈을 뜨기 시작하고 창가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하는 무렵, 돌아가는 모빌에 눈을 맞추며 까르르하고 웃어대는 그런 반응이 보이기 시작하자, 집이라는 공간은 다시금 아이에게 전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마음도 밖을 향해 움직이게 되었다. 50일이 넘은, 무더움이 살짝 찾아오는 그 초여름 한 자락에서.
하지만 그 마음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져 밖으로 나가기엔 어려웠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온 부모님에게 ‘백일 전 외출 금지’는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식에 가까웠다. 아이는 아직 약하고, 바람은 차며, 세상은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믿음. 부모님은 그 믿음을 경험으로 증명해 온 사람들이었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 자란 아내에게 그 말은, 조금 과장된 전통처럼 들렸다. 아내는 이미 몇 번이나 말했다. 자기 나라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햇볕과 바람을 쐬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배웠다고.
나는 양쪽의 문화를 모두 접한 사람이어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에 굉장히 난감했다. 물론, 그러나 문제는 누가 맞느냐가 아니었다. 둘 다 나름의 이유와 사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부모님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아내 앞에서는 “당신 말도 맞아”라고 말하게 되는, 어정쩡한 중간지대. 그 중간에서 나는 자주 침묵했다. 마치 박쥐와 같은 시간. 그러나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괜히 데리고 나갔다가 100일도 안된 아이가 병에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지레짐작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체코에서 지낼 때 쿨하게 유모차를 끌고 가며 심지어 담배를 피우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언어도단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엄마들도 숱하게 봐왔던 것도 사실이다. 육아란 문화마다 방식이 다르기에, 누가 맞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시간과 그 시기에 맞는 육아법이 있을 뿐.
다행히 부모님도 직접적으로, 그리고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아니셨다. 대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조금만 더 있다 나가도 되지 않겠니.” 그 말에는 걱정과 경험, 그리고 손주를 향한 애정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아내에게 ‘우리 방식을 믿지 못하는 것’ 같은 뉘앙스로 다가왔고, 그 사이에서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나의 역할을 명확하게 정의했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때부터 나는 번역기를 자처했다. 말의 뜻을 옮기는 게 아니라, 마음의 결을 조금씩 풀어서 전달하는 역할. 부모님에게는 “요즘은 의사들도 너무 막지 말라고 한대요”라고 말했고, 아내에게는 “부모님 세대에서는 정말로 그렇게 지켜왔대”라고 설명했다. 양쪽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끄덕임이 완전한 동의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아이는 어느새 백일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는 몇 번의 작은 시도를 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까지만 나갔다 돌아오기도 했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조금 더 들이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이 어쩐지 의식처럼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연습이자, 서로의 마음을 시험하지 않기 위한 안전한 선.
백일이 다가오자,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그날엔, 나가고 싶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부모님께도 미리 말씀드렸다. 백일 되는 날, 잠깐 산책을 나가보겠다고. 부모님은 잠시 말이 없으셨다가, “그럼 옷 따뜻하게 입히고, 오래 있지는 말고”라고 하셨다. 그 말로 충분했다.
백일 당일, 우리는 아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 생각보다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고,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햇빛은 적당했고, 골목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아이는 낯선 공기에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다시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내는 웃었고,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건, 바람이나 외출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였다는 걸. 부모님의 걱정도, 아내의 확신도, 모두 아이를 향한 같은 방향의 마음이었다는 걸.
우리는 오래 걷지 않았다. 집 앞을 한 바퀴 도는 정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눕히고 나서야, 비로소 그날의 외출이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졌다.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날.
그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우리의 방식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부모님의 말을 무시하지도, 아내의 생각을 밀어내지도 않으면서. 정답을 찾기보다는, 우리에게 맞는 선택을 하나씩 해 나가기로 했다.
육아는 여전히 어렵고, 갈등은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전통과 새로운 방식 사이에서 중요한 건 어느 쪽을 고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선택하느냐라는 것을.
백일의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우리의 육아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