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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작, 아내는 날 거절했다

만약 그때 포기했더라면?

by Karel Jo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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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을 거쳐 자포리자 공항에서 북한인 취급을 받으며 억눌린 채 장장 18시간이 지나고서야 처음 만날 수 있는 아내를 봤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자포리자 공항은 굉장히 작은 공항으로, 게이트라고 할 것도 없이 출구를 나오면 바로 공항 밖으로 나오는 구조였다. 그리고 내가 나왔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아내와 삼촌 보바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나를 북한으로 착각할 수 있냐고, 우크라이나 공무원들은 모두 멍청이들이라고 욱하던 당시의 아내를 보며 나는 '공무원 욕하는 건 전 세계를 막론하고 별다를 바 없구만'이라고 속으로 웃으며 괜찮다고, 적어도 나쁜 짓은 안 당하지 않았냐고 토닥이며 어서 집으로 가자고 얘기해 주었다.




사실, 여담이지만 나는 그때 아내와 사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분명 반년 넘게 매일 장문의 카톡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교감했지만, 어쩐지 '오늘부터 1일이야?'같은 말을 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있었다. 아마도, 각자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거리감이 멀기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어쨌든 실제로 만나 보자라고 해서 성사된 이 여행에서, 당연히 나는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장모님은 집에 남는 방이 있는데 왜 호텔에 돈을 쓰냐면서 자기와 아내가 안방에서 잘 테니 나에게 아내 방에서 자면 된다고 호텔을 극구 만류하셨다. 장모님은 당시에 아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에 내가 동양인이라는 건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기뻐하셨다고 한다.




먼 시간을 달려왔지만, K직장인이 으레 그렇듯 휴가를 길게 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4일 정도였다. 자포리자는 큰 도시가 아니고, 관광도시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도시를 둘러보는 데는 채 2일도 걸릴 필요는 없었겠지만 주목적은 관광이 아닌 아내를 보고, 서로의 미래를 얘기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나기 전에 대화로만 나누었던 서로가 원하는 데이트를 4일간 압축적으로 나누었다. 박물관, 코자키 박물관, 카페, 수력발전소의 인공폭포 등 많이 걷고, 많이 먹으며 많이 이야기하면서 하루의 아침부터 저녁에 다시 들어오기까지. 질리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는 이 만남의 신기함에 취해 있었을 뿐.


그렇게 아내와 못다 한 시간을 따라잡아가고 있을 때, 당시의 아내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영어통번역학과를 졸업하고 특별히 괜찮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아내는, 지역의 평범한 회사에서 소셜 마케터 직무를 하다가 적성과 적응 문제로 일을 그만둔 상태였고, 유아를 대상으로 영어교육을 하고 싶어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해외취업을 권장하며 여러 에이전시 같은 게 있듯이, 우크라이나에도 중국에서 유치원 영어강사로 일할 수 있는 해외 일자리가 몇 개 있었고, 아내는 그래서 나에게도 몇 번 이게 좋은 기회일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상담을 해 왔었다.


3일째 되는 날, 김밥을 만들어 보자는 아내와 같이 재료를 사고 김밥을 만들어 먹은 뒤,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어 했으니 중국에서 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나도 예전에 해외에서 4년 정도 일해보니 배운 게 많았다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다. 물론, 중국으로 오면 만나기 더 쉬워질 거란 이유도 있었지만 아내의 미래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아내는 그 길로 장모님과 얘기를 마치고 중국에 도전했고,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렇게 눈 깜짝할 새의 4일이 지나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정식으로 사귀자. 중국으로 오게 되면 더 자주 만날 수도 있고, 서로가 실존하는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잖아. 마음의 불안이 확신이 된 지금,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그 말을 하면서도,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내 또한 나를 만나서 즐거워했고, 4일 동안 압축적으로 교감하던 시간 내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썸 그 이상의 기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갈대라는 그토록 오랜 시간 통용되어 오는 그 말은, 이때에도 여지없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난 아직 마음속에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아내의 말에, 다가오는 비행기 보딩 시간에 어느 쪽도 대응할 수 없던 나는 '또 보자'라는 짧은 말로 나를 안아주고 보내주던 아내를 지켜보며 멀리서 조그마해질 때까지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자포리자 공항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 인천에 입국해서 집으로 오기까지 혼란 속에 눈을 껌뻑이며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결국 우리는 중국에서 연애를 시작하기는 했다. 그리고 그건, 거절당한 그 순간 내가 아내의 그 거절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그때 왜 나를 거절했냐는 말에 쉽게 답해주지 않는다.


만약 내가 그때 아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포기했다면, 나의 삶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겠지. 그날 이후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다는 말을 더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나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어준 아내를 새삼 매일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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