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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과의 한달살이를 시작하다

'사위 사랑은 장모', 한국에 잘 오셨습니다

by Karel Jo Mar 19. 2025


비록 아직도 러시아의 '특별 군사 작전'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처가인 자포리자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사일 공습이 떨어지는 날을 벌써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겪고 있지만, 다행히도 장모님과 처가 일가는 이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신 분은 없었다. 자포리자 주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점령 하에 놓였지만, 주도 자포리자는 단 하루도 치하에 놓이지 않은,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항상 밀리게 되면 어떡하나,라는 불안을 안고 살게 하는 곳이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어느덧 첫 돌이 다 되어갈 지난 겨울날, 장모님께서는 봄이 오면 한국에 한 번쯤 오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셨다. 여전히 현역 간호사로 일하고 계신 장모님은 계엄령 아래 놓여 있는 전시 우크라이나에서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신분이었지만, 고령의 나이를 감안하여 해외 출국이 가능할 것 같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 결정하셨다.


나와 아내는 서로 역할을 나누어, 아내는 장모님의 일정을 확정하였고 나는 그에 따라 한국 입국에 필요한 모든 제반서류를 준비했다. 단기입국비자, 비자신청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준비된 서류를 들고 장모님은 키이우 대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했고, 며칠 후 관광비자 승인을 받아 모든 준비를 끝마치셨다.


그리고 바로 오늘,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장모님께서는 굉장히 험난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비행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먼저 장모님은 키이우까지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야간기차로 이동해야만 했고, 키이우에서 바르샤바까지 운행하는 열차로 갈아타셔야만 했다. 그리고 폴란드행 기차는 매일 우크라이나를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예약이 무척이나 어려운 열차여서, 이게 아니면 24시간 완행버스를 탔어야 했기 때문에 조마조마하게 매일 새로고침하며 다행히 예약에 성공했다.


그렇게 폴란드에 가시고 나서도, 바르샤바 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장장 11시간의 비행을 통해 장모님께서는 오늘 아침 8시, 한국에 입국하셨다. 입국장에 들어오는 모습을 뵐 때부터 왠지 모를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울컥 올라올 뻔했지만, 힘들었어도 아내와 딸들, 그리고 나를 보며 웃어주시는 장모님의 모습을 보니, 차마 그 눈물을 속으로 머금고 그저 안아드리며 반길 수밖에 없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옛말은 예전부터 굉장히 오랫동안 구전되어 온 말이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입버릇처럼 '넌 나중에 결혼하면 처가에 신경 많이 쓰고, 우리 쪽은 생각도 하지 말아라'라며 조기교육을 들어왔었고, 물론 그때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당연히 공평하게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냐는 말대꾸를 하긴 했지만서도, 결혼을 하고 나니까 어쩐지 왜 그런 말이 내려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아내와 어머니와의 갈등은 내가 중재해야 어려운 문제지만 아내와 장모님의 갈등은 자기가 자기 어머니와 싸우는 거니까 누구의 편을 들어도 딱히 나에게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장모님께서 계시는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온전히 가족에게 집중하며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Finance팀장이라는 위치는 참으로 안타까운 위치다. 9월 법인인 외국계 회사라서 곧 여전히 연초 분위기에 남은 기간 힘을 내자는 다른 회사와 달리, 내년도 사업계획을 고민하게 될 시기를 앞둔 회사의 팀장으로서는 더더욱이나. 물론, 그래도 주중에 짬을 내서 없는 휴가라도 짜내고, 주말마다 가족들과의 추억을 안고 돌아가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때로는 덜 바쁜 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언제나 갖고 있다.


사실, 결혼하기 전에 부모님과 누나들, 즉 우리 가족만 놓고 봤을 때에는 그렇게 가족이라는 게 소중한 존재인지 때로 그렇게 잊고 살았기 때문에 소중함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결혼을 해서 나 스스로가 나만의 가족을 꾸리게 되고, 또 남의 가족을 나의 가족으로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가족이란 왜 화목해야 하는가, 왜 가족에게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어야 하는가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본다.


비록 한동안 쓰지 않은 우크라이나어라 오늘 하루는 꽤 어색하게 장모님과 대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또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게 되겠지. 언어라는 건 잠시 동안의 기억에서 멀어질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머릿속을 떠나는 존재는 아니니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부디, 장모님이 돌아가시는 그날에 우리 모두가 이 시간이 더없이 귀중한 시간으로 남아 또 남은 세월 동안에 추억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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