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침묵은 금이 아니게 된 세상 한 자락에서
침묵은 금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아마 이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자랐을 것이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든지, 대부분의 격언은 정제되고, 절제된 표현으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라는, 즉 다시 말해 말 한마디 한마디는 스스로의 표상과 같으니 격을 지키기 위해 말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2025년이 된 지금, 사실 더 이상은 절대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 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위 사이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주류로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표현에는 거침이 없다. 직설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을 아껴야 한다는 그간의 북받침을 토해내라기도 하듯 그들에게 열광한다.
그런 걸 보면, 반드시 침묵을 하는 것이 확실히 능사는 아닌 모양이다. 세상은 점점 소통을 강조해 오는 시대로 발전하고 있고, 소통의 채널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각종 SNS로 연결된 세계 사회는,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표현으로 조용했던 일상을 일깨우기 시작했고, 이제 소리 내지 않는 군중은 그 존재조차도 잊혀지고 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25년부터다. 당시의 나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갈 곳 잃은 채로 우울이란 오랜 친구를 품고 있었고, 매일의 하루를 그 친구가 날 찾아오지 않게 만드는 데 주력해야 했다. 필요 이상으로 일에 매달렸고, 몸을 가만히 두지 않게 이것저것 하다가 더 이상의 기력이 없어 또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누워있는 날이 반복되는 그런 일상이었다.
Finance, 재무회계라는 일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숫자를 참으로 많이 본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 숫자가 빠질 수 없어 대화는 어떤 식으로든 수치화된 형태로 풀어지게 된다. 사실상 대화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이번 분기에 총이익이 나오려면 판매량이 얼마가 늘어야 되지?
이거 프로모션 하면 이익이 없는데 수량만 채우겠다는 말이야?
제조원가에서 못 맞춰 주는 거 판관비 좀 줄여야겠다.
저기에 'xxx원'이라는 숫자만 들어가면, 평범한 Finance팀의 일상적 대화다. 굉장히 목적의식이 뚜렷한 주제고, 방법론적이나 이상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블록 쌓기와 같은 직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말수가 줄어들었다.
성격적으로는 도식화하여 짜 맞추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일 자체는 굉장히 적성에도 맞는다고 생각하고 잘한다고 평가받지만, 그리 수다스러운 사람도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나는 말을 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꽤나 병들어 있던 모양이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전공도 체코슬로바키아어를 택하고 러시아어까지 부전공을 하며 졸업 전까지 나 자신을 언어로 완성했고, 문학과 언어 속에 파묻혀 졸업 후에는 연구 주제까지 삼았던 그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쓰지 못한 말들을 그대로 삭히며 그 말을 숫자로 대치해 결과론적인 표현을 습관적으로 써 왔다.
그렇게 내 안을 방치한 결과, 나는 쌓아온 방어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는 걸 지켜봐야 했고 혼자서 수습할 수 없어 정신과 문을 두드려 긴급조치는 어떻게든 해내긴 했다. 근원적으로는 그러나 생업을 Finance로 택한 이상, 내 안의 나와 바깥의 나를 일치시킬 수 없어 매일을 싸우고 있던 때,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사실 이제는 펜이 아니라, 키보드와 손가락으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 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생각보다 내 안에 더 꽉꽉 들어차 있었다는 거였다. 내게 부족한 건 시간과 체력이었지 쏟아낼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과, 말보다는 숫자로 증명해야 하는 시간들 속에 갈 곳 잃은 내 말들이, 장소를 열어주기만 하면 앞다투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요즘의 일상.
정제되지 않아 때로는 부끄러운 표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새 들어 '글쓰기' 라는 이 행위 자체가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가능하다면, 이 기쁨이 나에게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