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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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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

문장이 정말 아름답다. 꼭 시처럼 낯선 묘사와 비유가 책 전반에 깔려 있지만 그럼에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했을 통찰들을 예리하게 잡아내 문장으로 풀어 놓았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직업 정신이나 모험에 대해 거의 숭배(?)하는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이 지금 보기에는 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책이다. 작가가 세상을 너무나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봄이지만 곧 올 여름밤에 가볍게 읽으면 좋을 책으로 강력히 추천한다.

1.

“스스로를 밀어붙여 한계를 뛰어넘는, 모험하는 삶만이 진정한 삶”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 같은 이 책은 인본주의의 가치관이 진보적인 것을 넘어 당연한 것이 된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도 생각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읽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항상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한 권으로 꼭 이 책을 뽑아왔다.


책의 구성을 나름대로 세 부분으로 구분해 보자면, 문장과 이야기와 주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평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내 멋대로의 기준이다.) 나는 이 책의 이야기와 주제도 물론 사랑하지만, 문장을 가장 각별히 아꼈다. 살면서 낭만에는 그다지 큰 가치를 놓아본 적 없음에도 이 책의 낭만을 담은 모든 문장들은 환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좋았다. 시인의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서인지 작가가 하는 비유와 묘사 하나하나가 탁월하다고 느껴졌다. 진부하지 않으면서 잘 읽히는 문장들이 모여 있고, 그런 문장을 읽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런 문장을 또 쓰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을 쓰겠다, 고 다짐하게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나치게 찬양조로 쓰는 것 아닌가 좀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너그러운 여러분들이 그냥 좀 감내해야 되겠다. 나는 삼십 년 후에도 이 책을 읽으며 모든 문장마다 감탄을 내뱉을 것 같으니까.)

2.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밤에 비행기를 띄우는 일이 아직 인류에게 위험한 도전으로 여겨지던 시절, 야간비행의 열렬한 옹호자 ‘리비에르’는 여느 날의 밤과 같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곧 도착할 비행기 세 대를 기다리고 있다. 무사히 도착한 두 대와 달리 ‘파비앵’이 탄 비행기는 태풍 속에서 길을 잃고 그만 실종되고 만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리비에르는 계속해서 야간비행을 강행한다.

이 간단한 이야기를 작가는 자연에 대한 목가적인 묘사와 인간 심리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만이 뽑아낼 수 있는 낯설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로 감싸 리비에르의 신념과 파비앵의 죽음에 일종의 경이를 더해 준다.

3.

문장에 대해 말을 좀 했으니 이제 이야기 속 인물들과 그들의 가치관에 대해 말해 보겠다. 너무나 평범하고 인간적이어서 (비범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찌질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감독관 로비노를 비롯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상당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리비에르와 파비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리비에르는 비정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를 두고 직접적으로 ‘부당하다’라고 하는 묘사도 여러 차례 나온다. 감정을 내비치는 일은 거의 없고 자비 또한 없다. 펠르랭과 이제 막 친구가 되려는 로비노에게 펠르랭을 이유도 없이 징계하게 하고 수십 년을 일해 온 직원을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해고한다. 그래놓고는 한다는 합리화가 ‘모든 것은 일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직원들로 하여금 한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일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락 없는 꼰대다. 직업이 곧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이 잦았던 시절에는 꽤 고무적인 주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워라밸이 더 이상 신조어가 아닌 시대에,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개인의 정체성의 반 정도만 구성해도 “야, 네 삶을 좀 살아” 소리를 듣는 시대에, 일을 통해 개인이 스스로를 초월해야 한다는 주장은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리비에르의 주장에는 딱히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직업 없는 백수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가 딱히 밉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상관으로 만났더라면 아주 미웠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이익을 위해 그런 부당한 선택들을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기에 옳지 않은 방향일지언정 그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스스로의 감정이 호소하는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런 결정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직원을 해고할 때도, 파비앵의 실종을 직감하면서 파비앵의 부인을 마주했을 때에도 모두 괴로워한다.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가 애정하는 이들을 그저 평화 속에서 늙게 하는 것, 그러다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잊혀지게 하는 것이 더 괴롭고 두려운 일이었다. (추론하기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4.

나도 죽음을 만만찮게 좀 두려워하는 편이다. 어떤 때는 갑자기 길을 가다 위에서 간판이 떨어지지는 않나 뒤에서 차가 갑자기 인도로 돌진하지는 않나 싶어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고자 하는 그 심리가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적 시점으로 그가 비판 받을 수 있는 지점은, 그것을 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했는지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권위에 의해 행해진 폭력일 수도 있을 테니까. 어쨌든 당시에는 리비에르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류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을 것이고 (요즘은 좀 발전 같은 건 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정복하고 극복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를 꼰대라고 욕하면서도 그와 같은 이들의 공으로 편의를 누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념에 동의는 못 해도 감탄은 할 수 있겠다.

물론 지금 누리는 이 발전의 편의가 리비에르 같은 사람들의 공만은 아닐 것이다. 야간비행의 수행에는 감독관이 필요한 만큼 조종사도 필요했다. 이들은 희생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아마 자전격의 인물일) 파비앵의 시선을 빌려 그 위험한 밤과 비행을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보고 판단하는 행위에는 편견이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이 글을 쓴 사람이 그 무서운 세상에 대해 어떤 아름답고 애정 어린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리비에르에게 밤은 그저 정복할 애상이지만, 파비앵에게 밤은 정복의 대상이자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다. 비행을 하며 수없이 보았을 어둠 바다 산 별 그런 것들은 언제나 그에게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경외하는 대상이 우리를 항상 굽어살피지만은 않는다. 파비앵은 밤의 태풍을 만났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종되고 만다. 그러나 그가 그 밤 겪었던 사투는 그의 죽음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 그를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선구자로 만든다. 다른 조종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비행을, 비행에서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순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삶만이 가치 있는 삶이고, 그들을 기다리는 아내들의 삶이나 그들이 비행할 때 아래에서 양을 몰고 다니는 목동들의 삶, 또는 밭을 매는 농부들의 삶은 덜 그렇다는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음은 (겁이 지나치게 많아 면허도 못 따는 나로서는)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5.

평생 어떤 조직에 속하는 것을 싫어해 왔고 또 속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리비에르의 엄격함을 온전히 이해할 날이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험은 커녕 집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파비앵 역시 이해하리라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소명이라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지금, 직업정신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학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존중하게 할 방안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오늘날 인본주의란 정말 ‘사람에게 친절한’ 것이 다인지, 직업이 전부가 아니게 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인지, 리비에르와 파비앵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세상인지, 이런 것들 역시. (그런 주제에 대한 고민 없이 문장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책이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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