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크로커스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작고 귀여운 꽃들이 아직 차가운 땅에 붙어있는 것을 보면 귀엽기도 하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생명력도 느껴져 조그마한 녀석들이 참 장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초봄에 잎이 나기도 전에 차가운 대지를 뚫고 제일 먼저 세상에 나와서 꽃부터 피우는 식물 중의 하나여서 그들의 꽃을 피우려는 의지가 다른 꽃들과 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크로커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초봄에 큐가든(Kew Gardens)이나 리치먼드 공원(Richmond Park)에가면 지천으로 피어있는 이 꽃들을 볼 수 있다.
이른 봄에 그런 장소에 가서 색색의 크로커스들이 피어있는 광경과 맞부딪히게 되면 정말 감동이란 말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넓고 길게 늘어진 꽃밭은 드물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러 가지 자연색으로 배합되어 조화가 완벽한 그 광경을 보면 감탄사를 연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리라.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리면서 내 마음이 영롱한 꽃의 빛깔들로 채색되면서 그 꽃들이 피어있는 곳을 눈을 따라가다 지평선을 만나면 마음마저 아련해지는 느낌이랄까? 늦봄이나 초여름에 이런 광경을 눈에 담았다면 이런 충격적인 감동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미 우리 눈이 여러 종류의 화려한 꽃들을 보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감정에 대한 면역이 생겨서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들이라도 그 속에 묻혀서 살다 보면 상대적으로 추한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지언정 조금 더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는 그냥 동화되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또 크로커스는 색도 다양하다. 보라, 노랑, 흰색에다 파랑도 있다. 이 꽃은 다년생이며 아이리스(붓꽃)과에 속하고 주로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들판 같은 곳에서 자생한다고 한다. 'Crocus'라는 말은 그리스어 인 'Krokos'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실크를 뜻한다고 한다. 꽃잎의 색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비단 같은 질감과 고운 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그리고 크로커스는 꽃말도 참으로 다양하다. 여러 가지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말은 희망, 기쁨, 사랑의 시작 이런 것들이다. 그 밖의 꽃말로는 순수한 사랑, 평화, 우정, 행복한 사랑, 열정적인 사랑, 고백, 매혹 등의 좋은 의미만 있다 하니 봄에 누구에게 꽃이나 화분을 선물하고 싶다면 꽃말에 구애받지 않고 선물할 수 있는 꽃이라 하겠다. 사랑에 관한 꽃말이 좀 많은 꽃이긴 하지만 그 사랑이란 것이 모든 종류의 사랑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꽃을 선물하는데 대상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꽃은 예쁘면 그만이고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쁘면 좋은 것이다. 다만 고백이나 매혹, 이런 꽃말들은 그 의미에 대해 좀 생각해 볼만 하기는 하지만 꽃을 선물로 받았을 때 꽃말을 찾아보고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런 꽃을 보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검색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 혹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여 밀당, 나 이 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을 하는 관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도 겨울이 길고 추위도 심한 편인 나라에 속하므로 그 혹한을 견디고 피어나는 첫 번째 꽃인 이 꽃을 선물로 받는다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봄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을 테니 지금 계절에 선물하기에 안성맞춤인 꽃인 것이다. 밸런타인 데이에 '내돈내산'으로 구입한 분홍 장미들과 스타치스, 카모마일들이 이제 완벽한 드리이 플라워가 되어버렸는데 누가 나한테 꽃선물 좀 안 하나? 크로커스가 심어진 화분도 좋고 사실 아무 꽃이라도 괜찮다. 꽃이라면 할미꽃도 호박꽃도 다 특색이 있고 나름의 특유한 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나이다. 세상에 의미 없는 창조물은 없고 더구나 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의미 없는 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은근한 마음으로 기대해 봐서 나쁠 건 없다. 지인들에게 꽃 선물을 받으면 저녁 식사 비용으로 보통 꽃값의 두세 배 지출은 예약되어 있다 해도 꽃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저녁 식사비 지출 같은 건 전혀 아깝지 않다. 내게 꽃을 선물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취향을 잘 아는 지인일 가능성이 많으니 그와의 식사 한 번 하는 일도 기분 좋은 일이고 모처럼의 기분전환이 되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없어도 괜찮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내돈내산'하지 뭐. 원가절감이라는 매리트는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말이다.
지금 동네 꽃집에 가면 크로커스를 구할 수 있을까? 크로커스는 원래 야생화이지만 화분 같은데 넣어서 판매도 한다 하니 꽃집 옆에 있는 슈퍼에도 들러 장도 봐야 하니 겸사겸사 나가 봐야겠다.
이제 나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점점 더 답답해지는 것을 보니 봄이 오고 있기는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