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회계사시험 준비를 우당탕탕 헐레벌떡 포기하고, 며칠 후 회계사 공부한다고 수업시간 내내 갈구던 교수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다.
아주 자신 있게, 그리고 눈 부릅뜨고 목 꼿꼿이 세우고 결연하면서 뻔뻔하게
“교수님 저 오늘부터 회계사 때려치우고, 무역학과 자존심을 지켜 관세사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 당시만 해도 TV에서 전문직 연간소득에 대해 자주 나왔는데 관세사가 연간 소득이 3억인가 4 억인가로 전문직 중에서 높은 쪽에 속한다고 방송에 많이 나오고 있었다. 회계사는 친구에게 홀려 시작을 했으나, 이번에는 친구가 아닌 방송에 홀려서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나는 그렇게 쉬운 놈이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6개월 이상을 버티기에 뭔가 할 줄 알았는데 아쉽네”
“수업시간에 예의 없이 뒤에 앉아 회계사 공부를 해서 교수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회계사 보단 관세사가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또 바로 위 학번 선배 2명이 관세사 합격하기도 해서 여러 가지로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교수님께 죄송했다는 마음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 마음은 단 1도 없었다. 근데 이게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고 누가 그랬다.
책장을 넘기듯이 불과 며칠 만에 회계사에서 관세사로 마법처럼 뿅 하고 직업이 바뀌면 얼마나 좋겠냐 마는, 공부하는 책이 바뀌었고, 철권을 같이 하던 친구만 주위에 없었지 나머지 일상은 똑같았고, 공부는 여전히 치열하게 해야 했다. 마치 전생에 공부하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처럼.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본격적인 관세사 1차 시험준비를 시작했다. 1차 시험까지 5개월 남짓. 조금 촉박하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미 전공으로 들었던 수업이고, 전반적인 이해가 있으니,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했던 회계사 시험준비보다는 훨씬 쉬웠고, 심지어 재미도 있었고, 더 좋았던 건 교수님들의 배려와 응원. 힘들게 공부한다며 수업시간에 칭찬도 해 주시고, 그 덕분에 잘은 모르겠지만, 사실확인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학점도 넉넉히 잘 받았다. 마치 교수님께서 눈감고 주셨던 것처럼. 그냥 느낌이 그랬다.
관세사 1차 시험을 치르고,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바로 스터디 그룹을 꾸려 몇 달 후의 있을 2차 주관식 논술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2차 시험 준비가 전혀 안되었으니 시험장 분위기를 보고,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1차를 붙으면 1년 휴학계를 내고 본격적으로 2차 시험을 준비하는 것으로 계획을 했다.
드디어 1차 시험 발표날이다. 나름 어려운 시험이라 그런지 대학입시나 편입시험 대자보가 아닌 일간지인 신문에 결과가 나온단다. 결과는
합격이다.
그것도 꽤 우수한 성적으로.
1차 시험 수석한 사람이 평균 92점인데 난 88.7점. 커트라인이 60-70점이었으니 상당히 우수한 성적이었고, 내 인생에 첫 번째 성공이다. 세상의 어떤 방해도 없이 온전히 내 힘으로 해낸. 나의 노력이 가상해서, 기특하다고, 감동했다고 처음으로 세상이 나를 인정해 준 것이다.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제 4명의 형님들과 본격적으로 2차 시험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1년 뒤면 인생역전이다. 인생은 한 방이지.
본격적인 2차 공부의 시작. 2차 시험은 모두 논술로 객관식이었던 1차 시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세율표와 상품학은 가히 관세사 시험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각국에서 수출입을 통하여 거래되는 모든 물품을 국제통일 상품 분류체계에 의하여 모든 품목에 부여하는 각각의 10자리의 HTS 코드 (Harmonized Tariff Schedule) 모두 암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외워야 할 양이 어마어마하다. 책 두께도 조금 과장하여 내 머리통만큼 두껍고....... 문제는 이 과목뿐 아니라 3과목이 더 있다는 것.
학원 수업에, 스터디 그룹에, 또 혼자 공부하는 시간,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2차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너무나도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 1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괜히 2차 시험 통과가 어려운 게 아니다. 공부해야 할 양보다 나를 짓 누르는 건 매일 다를 것 하나 없는 같은 날의 반복 속에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집, 도서관, 집, 도서관, 집 도서관. 그나마 학원을 가는 날은 좋았다. 스터디 그룹이 있었고, 그나마 말을 좀 할 수 있었으니까. 버스를 타며 보게 되는 새로운 사람들, 그것이 유일하게 하루 중 새로움과 만나는 시간이었으니까.
나머지 일상은 모두 똑같다. 똑같아도 너무 똑같다. 그러한 변화 없이 반복되는 일상으로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했다. 이게 마지막 선택지 일 수 있으니까. 다른 옵션은 없으니까. 너무 힘들었다 외로웠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과연 맞는 것인가 라는 끊임없는 의심들. 고통스러웠다. 해야 할 공부의 분량을 생각하면 그 모든 고민과 고뇌가 내가 가질 수 없는 사치임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루하루 지쳐갔다.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해 2년 전에 관세사 시험에 합격한 선배 2명을 만나기로 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이겨 냈는지, 하루하루 살아 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시험 합격 후 어떻게 인생 역전을 이루어 냈는지 너무 궁금했다.
선배 2명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학교 때 보던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알던 선배들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반들반들한 피부. 말끔한 정장 차림. 반짝이는 구두. 단정히 뒤로 넘긴 머리. 화려하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은 넥타이. 누가 보아도 이 사회의 엘리트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운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 내는 아우라.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모습이다. 지난 몇 개월 공부로 찌들었던 마음과 몸이 한순간에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아니 그 순간 나도 관세사 시험을 패스하고, 이미 인생 역전을 이뤄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