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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의 채소, 땅콩

by 헤아림



백로

양력 9월 7일쯤, 일교차가 커지면서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때

포도 수확하기, 땅콩 수확하기, 가을배추 아주심기, 가을무 솎아주기




원래 땅콩을 수확하고 그에 대해 쓰려던 시기는 "한로"였다. 한로는 양력 10월 8일쯤. 즉, 원래는 땅콩을 한 달 뒤쯤 수확할 거라 예상했다는 이야기이다. 일찍 잘 여물어서 이른 수확을 한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올해 땅콩 농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여름 내 크고 풍성하고 싱싱하게 자라주어야 하는 잎이 오히려 시든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잎을 통해 광합성을 하고 식물체 내 필요한 영양분을 만든다. 따라서 잎이 튼튼하게 자라지 못하면 그 열매도 잘 자랄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잎에 검은 반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찾아보니 갈색무늬병(갈반병)이었다. 땅콩 재배 시 흔하게 볼 수 있는 병이라고 한다. 내 기억만으로도 7년 이상 땅콩을 심어 왔는데 올해 들어서야 처음 겪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가 병이 든 땅콩 밭을 바라보며 몇 년 간 한 자리에 심은 게 문제인 건가 했다. 이 병을 방제하는 방법으로 이어짓기(연작, 한 곳에 매년 같은 작물을 심는 것)를 피하라고 하는 걸 보니 엄마 말이 맞는 듯하다. 봄부터 이어온 농사의 끝이 좋지 않아서 아쉽지만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조금이라도 수확물을 건지고, 병이 다른 밭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땅콩을 일찍 수확하고 밭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땅콩 농사는 봄부터 시작된다. 작년에 수확해서 냉장고에 보관해 둔 땅콩 중에 몇 개 건강하고 실한 것들을 골라 물에 불린다. 이것이 씨앗 역할을 한다. 콩과 작물들은 대부분 이렇게 알차게 잘 여문 지난해 농사의 수확물을 씨앗으로 삼는다. 물에 불려 싹이 나오기 시작한 땅콩을 한 구멍에 2개 정도씩 심는다. 이때, 뾰족하게 올라온 부분은 사실 줄기가 아니라 뿌리기 때문에 이 부분이 땅 속에 박히도록 심는다. 다만 이게 불안하고 헷갈린다면 그냥 사진처럼 눕혀 심으면 된다. (그래서 나는 위아래가 있는 씨앗은 그냥 다 눕혀 심는 편이다.) 이렇게 심어 두고 기다리면 안에서 꼬물꼬물 싹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때 나오는 어린잎들이 동글동글 엄청나게 귀엽다.



물에 불린 땅콩에서 싹이 나오고 있다.
수확할 때, 이미 땅 속에서 싹을 틔운 땅콩들도 있었다. 이를 보면 먼저 나오는 부위는 확실하게 뿌리이다.



이쯤에서 뜬금없이 나의 숨겨둔 정체를 고백하자면 몇몇 친구들에게 나는 "땅콩"으로 불린다. 한 모임의 첫 만남 자리에서 각자 자신이 어떻게 불렸으면 하는지 얘기하는 순서가 있었다. 스스로 지은 별명으로 나를 불러달라 하는 게 예명을 쓰는 연예인 같은 기분도 들고 괜히 쑥스러웠다. 그렇지만 다들 본명보다는 별명을 말할 거 같아서 나도 망설이다 어느 한 단어를 적었는데 소개할 때가 되니 어쩐지 대부분 본명을 얘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본명을 쓸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쳐 쓸 새도 없이 이미 내 소개 차례가 다가왔다. 그렇게 등 떠밀려 공개한, 내가 아껴뒀던 나의 별명이 바로 “땅콩”이었다. 내가 식물에 빠지게 만들었던, 내 손으로 키운 나의 첫 식물이 바로 땅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비닐하우스도 있고, 매일 같이 밭에 가시니까 딱히 집에서까지 농사를 지으실 일이 없지만 부모님이 직장 생활을 하시며 주말에만 가끔씩 밭에 가실 때에는 작물을 파종하고 키워서 모종으로 만드는 일을 집에서 하셨었다. 씨앗이 흙 속에서 썩어 없어진 건 아닌지, 새 순이 흙은 잘 뚫고 나오는지, 물은 마르지 않았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필요한 것을 챙겨준다. 약하고 어린 새싹들은 유독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 가서는 심어둔 땅콩을 새가 홀랑 꺼내 먹어도 다 도둑맞은 후에나 알 수 있다. (실제로 심어 둔 땅콩을 새가 파먹어서 다시 심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래서 그 해에도 집에서 땅콩을 파종하셨다. 지금은 물에 불린 땅콩을 바로 땅에 심지만 그때는 종이컵에 하나씩 심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땅콩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에서 새싹이 나온다. 그 새싹이 조금씩 커가며 잎을 내어주는데 바로 이 순간, 내가 땅콩에 반해버렸다. 잎을 반으로 접고 올라와서 그 잎을 펼치는데 마치 네 잎클로버처럼 한 번에 네 개의 잎을 동시에 펼쳤다. 심지어 그 잎이 동글동글하고 종이접기 한 것처럼 엄청 귀엽게 보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수시로 밖을 내다봤다. 햇빛을 잘 받고 튼튼하게 크도록 베란다에 내놓은 그 땅콩 잎을 보겠다고. 이 귀여운 것을 나만 볼 수 없다며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공유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이렇게 집에서 키운 모종을 밭으로 옮겼고, 그 해 가을 땅콩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거실에 앉아 수확해 온 땅콩을 까고 계신 부모님 옆에서 나는 계속 땅콩 잎이 엄청 귀여웠다며 재잘거렸다. 그러자 그렇게 귀여우면 한 알 심어보라는 엄마의 말에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며 바로 집에 있던 빈 화분에 땅콩 한 알을 심었다.


사실 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작물이기에 새로운 땅콩을 심을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냥 실내에서 잎이나 보면서 키워보자 하는 마음으로 심었던 거였다. 원래 그것만 보면서 기다리면 그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지듯이 매일 아무 변화도 없는 흙 위만 지켜는 날들이 이어졌다. 새싹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대만 여행을 다녀왔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갑자기 장성해 있는 (실제로는 작은 새싹이었지만 당시 내 기분 상으로는 엄청나게 자라난) 땅콩을 만났다. 겨우 3박 4일 다녀왔을 뿐인데 그사이 엄청 자라 있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더니 옆에서 아빠가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알고 보니 싹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실망할까 봐 밭에 새로 난 싹을 캐다가 옮겨 심어주셨던 거였다.


내 방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땅콩은 봄이 되어 옥상의 큰 화분으로 옮겨졌다. 사실 이 이후부터는 나보다는 엄마의 몫이 되어 옥상의 다른 작물들과 함께 엄마 손에서 자라났다. 나는 그저 종종 올라가서 물을 주기만 할 뿐이었지만 가을이 되어 땅콩을 수확할 때가 되자 마치 내내 내가 키워온 양 장갑을 끼고 하나씩 수확하는 영상까지 찍었다. 이렇게 땅콩을 심고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무언가에 정성을 쏟고 돌보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의 맛을 알아버렸다. 그 뒤로 엄마가 밭에서 식물(작물)을 키우듯이 나는 실내에서 열대 관엽 식물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에 하나둘씩 식물을 들이다 보니 어느새 300개가 넘는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몸속 깊이 저장되어 있던 식덕 유전자를 발현시킨 것이 바로 땅콩이었던 것이다.



동글동글 귀여운 땅콩의 잎. 정말 내 눈에만 귀여운가?



그동안 내 손으로 무엇을 키워본 적이 한 번도 없던 내가 땅콩을 가까이 두고 키운 덕에 땅콩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선 충분히 자라고 나면 다른 콩들처럼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꽃이 떨어진 자리에 자방병이라는 땅콩만의 독특한 기관이 생긴다. 자방병은 이쑤시개처럼 뾰족한 끝을 길게 늘어뜨려 땅속으로 파고들고 그 자리에서 땅콩 열매를 만든다. 그래서 꽃이 피기 시작하면 덮어준 비닐을 찢어 흙 속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자방병이 흙 속으로 많이 파고들어 많은 열매를 만들도록 흙을 더 두툼하게 덮어주는데 이를 북주기라고 한다. 나도 이 독특한 성장 과정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내 주변에도 이를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 지금도 내가 땅콩이 어떻게 자라고 수확하는지 보여주면 "와, 나 땅콩 꽃 처음 봐!", "땅콩이 정말 땅 속에서 자라는 거야?"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보통의 작물들과 다른 형태로 자라나는데 그 과정이 또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모두가 신기해한다.



땅콩의 꽃과 땅을 뚫고 들어가지 못해 흙 위에 생긴 아기 땅콩
비를 흠뻑 맞은 후 땅콩 잎이 싱그럽다.



보통 땅 속에 심겨 있는 작물을 수확할 때는 이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땅을 파야하기 때문에 땅을 파는 수고로움에 예민함까지 더해져 더욱 수고스러운 작업이 된다. 그러나 땅콩은 땅과 가까운 줄기를 잘 모아 양손으로 꼭 잡고, 양발을 야무지게 디딘 뒤 배에 힘을 줘서 잡아 올리면 뿌리부터 열매(땅콩)까지 쑥 딸려 올라온다. 평소보다 일찍 수확한 탓에 캐기 전에는 잘 여문 게 얼마 없을까 걱정이 많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줄기를 뽑아보니 그래도 잘 들어찼다. 물론 잘 컸을 때보다야 덜하지만 올해는 이만한 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뽑아낸 줄기는 사이에 낀 흙을 충분히 털어주고 한쪽에 모아두었다가 수레에 실어 한번에 그늘로 옮긴다. 그때부터는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아 땅콩을 하나씩 따고, 그러는 동안 심어져 있던 자리를 뒤적여 혹여 남아 있을 수 있는 땅콩들을 구출해 내면 땅콩 수확이 완료된다. 이렇게 딴 땅콩을 물에 씻고 넓은 곳에 잘 펴서 말리고 나면 집으로 가져간다.





지금부터는 집에서의 작업이 시작된다. 텔레비전을 보며 거실에 모여 앉아 장갑 낀 손으로 딱딱한 겉껍질을 전부 깐다. 이것도 손이 아프고 은근히 힘든 일이지만 '놀면 뭐 하니?' 하는 엄마의 눈빛을 몇 번 받으면 끝까지 버티고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알맹이만 지퍼백에 모아 냉장 보관하면 다음 해 수확하기 전까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이제 우리 집에는 땅콩 전용 용기까지 생겨서 딱 그 용기에 들어가는 양만큼만 볶아두면(빈 용기로 땅콩을 가득 뜨면 정확하게 그만큼의 양만 덜어 볶을 수 있다.) 오며 가며 심심풀이 땅콩으로 주워 먹는다. 그렇게 땅콩으로 가벼운 간식을 하기도 하고, 공심채 볶음의 킥으로 쓰기도 하고, 최근에는 수시로 땅콩버터를 만들어 주변에 선물하니 다들 매우 신기해하고 좋아해 줬다.


그래서 직접 키우고 수확해서 만든 무첨가 땅콩버터를 선물 받고 싶으시다고요? 나한테 땅콩버터를 선물 받는 사람은 이 일대기를 다 들어야 하는 벌칙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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