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우리 집 아침 식탁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이 시기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10일간의 해외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매일 밥과 국, 반찬이 놓여있던 아침 식탁 위에 양배추, 당근, 사과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전부터 CCA 주스(양배추, 당근, 사과를 넣어 간 주스)가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가족들에게 먹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생으로 먹었으면 먹었지 갈아먹는 건 싫다는 나의 말에 아침 식사가 아예 채소식으로 바뀌었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의 아침식사는 각자의 접시 위에 삶은 달걀 한 알과 양배추 조금, 당근 조금, 사과 조금, 그리고 그때그때 있는 과일을 조금씩 더하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
평소와 같은 아침을 준비하다 문득 사과에 땅콩버터를 곁들여 먹고 싶었다. 얼핏 어울릴까 싶은 조합인데 맛있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궁금하던 차였다. 집에 땅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못할 게 뭐 있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 말고 갑자기 땅콩버터 만드는 법을 찾아봤다. 아니, 그냥 냅다 갈면 되잖아? 심지어 땅콩 외에 필요한 재료도 올리브유와 소금뿐이었다. 땅콩버터 만들어 먹는 얘기를 하다 재료가 이 셋 뿐이라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버터가 안 들어가는 거냐며 놀란다. 나도 만들어 보기 전까지는 땅콩버터의 꾸덕한 질감이 버터를 넣어 만든 건 줄 알았다. (무엇보다 이름부터가 "버터"잖아!) 그러나 그건 갈 때 나오는 땅콩 자체의 기름과 올리브유가 만든 질감이었다. 게다가 설탕 같은 단맛을 내는 재료도 전혀 없다. 오히려 재료도, 만드는 방법도 너무 간단해서 의심스러웠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일단 해보는 거지 뭐.
먼저 볶아놓고 오며 가며 심심풀이 땅콩으로 주워 먹던 그 땅콩으로 시범 삼아 만들었다. 만드는 순간까지도 의심을 걷을 수가 없어서 있는 걸로 조금만 만들어 보자 한 것이다. 갈기 시작하고 나서도 계속 이게 맞나 싶었다. 뻑뻑해서 날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데 이게 버터의 질감이 된다고? 그렇게 의심스러운 순간마다 올리브유를 한 숟가락씩 더하고 계속 갈았더니 어느 순간 다 갈리고 크리미 해졌다. 이게 되나 싶었는데 됐다. 그렇게 다 넣고 갈아서 순식간에 만든 땅콩버터는 들어간 게 없는데도 달고 고소하고 너무 맛있었다. 무엇보다 이게 설탕 하나 안 들어간 땅콩 본연의 단 맛이라니. 만들어 두고도 어리둥절해하며 몇 번이나 찍어 먹어봤다. 더 이상 사과와의 조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후다닥 만든 땅콩버터가 이렇게나 맛있는데 다른 게 뭐 대수겠는가.
마침 그날은 나를 땅콩언니라 부르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원래 가져갈 계획은 없었지만 이 맛있는 걸 모두에게 맛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 작은 병에 덜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더 많이 만들걸 그랬다며 아쉬워하면서. 만들기 전에 했던 의심은 어느새 전부 잊었다.
당장(충남 당진의 농부 시장)이 열리는 날이라 그곳에서 사과 다섯 알을 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사과와 땅콩버터의 조합이 궁금했다던 친구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먹을 준비를 다 하고 나를 깨웠다. 처음에는 사과 한 알만 잘랐는데 먹으면서 모자라서 하나씩 더 가져다 먹다 보니 앉은자리에서 4알을 먹어버렸다. 먹는 친구들마다 정말 단 게 아무것도 안 들어간 거냐며 놀라고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며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묻기도 했다.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얘기하지 않았는데 한참 먹고 나서야 설마 땅콩도 기른 거냐며 물어오는 친구도 있었다.
이 날 같이 나눠 먹었던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준 덕분에 땅콩버터가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직접 만든 땅콩버터를 선물했다. 하나같이 매우 기쁘게 받아주고, 이후로도 종종 먹고 있는 인증숏을 보내왔다. 이게 바로 수확의 기쁨이자 나누는 기쁨이구나.
며칠 전, 엄마가 내년에는 꽈리고추를 더 심어야겠다고 했다. 올해도 충분히 수확해서 먹지 않았냐는 나의 말에 엄마가 답했다.
"주변에 나눠주고 싶으니까."
그 말을 들으며 풀을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밥을 잘 챙겨 먹는 것, 그리고 주변에 직접 키우고 만든 것을 나누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까지 엄마한테 배운 게 참 많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재료 (약 400g)
- 땅콩 400g
- 올리브유 3T
- 소금 1.5t
만들기
1. 땅콩의 껍질이 노릇노릇 해질 때까지 볶는다.
(에어프라이어 이용 시 180도로 9~10분, 에어프라이어 사양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색을 보고 결정한다.)
2. 한 김 식힌 뒤, 믹서기에 넣고 간다.
3. 너무 뻑뻑해서 안 돌아갈 때마다 올리브유를 1T씩 넣어준다.
4. 소금을 넣고 갈다가 원하는 질감이 될 때 멈춘다.
Tip
1. 땅콩을 너무 많이 볶으면 완성된 땅콩버터에서도 텁텁한 맛이 나므로 살짝만 볶는다.
2. 씹히는 맛을 원하면 완전히 갈리기 전에 멈추거나 완전히 간 뒤 따로 땅콩을 다져 넣는다.
3. 다지는 용도의 날을 사용하면 중간에 멈추지 않아도 질감 있는 땅콩버터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