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분"의 채소, 가지

by 헤아림




추분

양력 9월 22일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때

벼 수확하기, 콩 수확하기, 가을 감자 수확하기, 난지형 마늘 파종하기




요즘 밭에서 가장 큰 일은 참깨를 수확하고 들깨를 돌보는 일이다. 좋은 참기름과 들기름은 알음알음해야지만 살 수 있어서 참기름 카르텔 안에 속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그 안에 속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직접 길러서 기름을 짜는 것. ("이런 밭수저!" 하던 친구의 질책이 들려온다.) 맛있는 기름을 얻을 수 있는 것 외에도 평소에 보지 못하던 참깨꽃과 들깨꽃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직접 키우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참깨 꽃이 이렇게 청순하다니! 들깨 꽃이 이렇게 앙증맞다니!



참깨의 꽃(왼쪽)과 들깨의 꽃(오른쪽)



참깨와 들깨를 제외하고 지금 밭에서 가장 많이 나는 작물은 바로 가지이다. 늘 짝꿍처럼 붙어 다니는 토마토와 함께 가지도 어린이날이 지나면 모종을 사다 심는다. 벌써 몇 년째 가지 심는 모습을 지켜봐 왔지만 매번 모종으로 사서 심기 때문에 씨앗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크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데 모종을 심을 땐 그걸 볼 수 없다는 게 괜히 서운하다. 워낙 여기저기 손이 가는 게 많은 농사일이니 이렇게라도 일을 하나씩 더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올해는 토마토와 함께 언제 심었는지도 모르게 후딱 모종을 사다 심어 놓으셔서 모종의 모습 못 봤다. 씨앗이 자라서 떡잎이 나오는 모습을 못 본 것도 아쉬운데 모종 구경마저 못하다니 아쉬움에 또 아쉬움이 더해진다. (내가 이걸 아쉬워한다는 걸 알면 엄마는 속 편한 소리 한다고 하겠지.)


심지어 가지는 심어만 두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크는 작물이다. 여름 내내 잘 먹고도 찬바람이 불면 더 단맛이 돈다. 엄마 지인 중에는 가지를 너무 좋아해서 엄마가 재배해 나눠드린 가지를 그 자리에서 생으로 다 드셨다고 한다. '가지를 생으로 먹는다고?' 잘 상상이 안 돼서 찾아봤는데 생 가지에는 독성이 있을 수 있다니 것으로 먹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처음 가지를 키울 때 가장 신기했던 건 바로 가지의 꽃이었다. 토마토와 고추 같은 가지과 식물들은 모두 별모양의 꽃을 보여준다. 색은 다 다르다. 토마토는 노란색, 고추는 흰색, 가지는 보라색. 그러고 보니 다들 열매와 꽃색이 다른데 가지만 그 색이 같다.


세상에 엄청 다양한 형태의 예쁜 꽃이 많지만 어렸을 때 종이접기 하면서도 제일 좋아했던 꽃이 도라지꽃이었던 걸 보면 내 취향은 딱 보라색 별 모양 꽃인 듯하다. 실제로 야생화 판매장에서 별 모양의 예쁜 꽃에 반해 골랐는데 알고 보니 가지과의 배풍등이었다. 내가 저 꽃이 예쁘다며 골랐을 때 엄마가 "가지 꽃 같은데?"라고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이름을 검색해서 알았다. 그날 사 왔던 배풍등이 한동안 우리 꽃밭을 예쁘게 물들이기도 했었다.



5~6개로 갈라진 별 모양의 가지 꽃들
가지과의 배풍등



채소를 직접 키우면서 가장 좋은 점은 역시 크는 과정을 전부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 만들어지는 과정 보는 걸 좋아해서 평소에도 공장에서 제품 만드는 과정, 베이킹하는 과정,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 등을 찾아보는 내게 식물의 크는 모습을 직관하는 건 그야말로 눈앞에 펼쳐지는 유튜브와 같다. (물론 엄청난 시간 압축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볼 때마다 예쁘고 반가워서 사진을 찍어두던 보라색 별 모양의 가지 꽃이 떨어지면 꽃받침 역할을 하던 부분이 가지의 꼭지가 된다. 그렇게 꼭지가 먼저 리를 잡고 그 아래로 열매가 생긴 뒤 점점 굵고 길어지며 자란다.



이제 막 자라고 있는 가지들



어렸을 때 나에게 야생화와 가로수의 이름 맞추기 퀴즈를 내던 엄마는 이제 농사 퀴즈를 내신다. 짙은 보라색의 가지와 그보다 옅은 보라색의 가지 중에 더 연하고 먹기 좋은 건 어느 쪽일까? 얼핏 색이 연하면 식감도 더 연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옅은 색의 가지는 가장 맛있는 시기를 지나 색이 빠진 것이다. 그러니 짙은 색의 가지가 더 연하고 맛있다 한다. 가지를 수확하는 시기를 놓치면 껍질이 두껍고 질겨지고, 과육 안에 씨앗도 단단하게 여물어서 입안에서 거슬리는 식감이 많아진다.



수확한 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의 명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지는 7월부터 수확해서 먹기 시작해 오히려 지금이 제일 맛있을 시기니 엄청 오랜 기간 수확해서 먹는 작물이다. 게다가 자라기도 잘 자라서 잠깐만 먹고 나누는 것을 게을리하면 집에 한가득 쌓이고 만다. 그러다 어느 날, 밭에서 나오는 여러 채소를 포카치아 위에 올려 구워봐야겠다 싶었다. 맛없는 토마토를 해결하기 위해 포카치아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이제는 쌓인 가지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전한 가지 포카치아. 빵 반죽은 토마토 포카치아와 똑같이 하고(토마토 포카치아 레시피) 가지를 동그랗게 잘라 약간의 소금을 뿌려 둔다. 빵이 잘 발효되고 난 뒤에 소금 간 한 가지와 채 썬 양파를 함께 얹어 구웠다. 처음 만들어 보는 요리는 늘 떨리기에 두근두근하며 맛봤는데 결과는 성공적! 좀 더 건강하고 신선한 맛의 포카치아가 완성되었다.



가지 포카치아



약 5개월을 자라온 가지는 이제 내 키를 훌쩍 넘어 나무처럼 큰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지의 제철은 끝나지 않았다. 사실 오래 먹고 싶어서 이모작을 시도한 토마토는 맥을 못 추리고 있다. 그에 반해 아무것도 안 해줘도 여전히 건강한 열매를 계속 내어주는 가지가 정한 1등 효자 작물 아닐까. 예전에는 짧고 굵게 사는 게 무조건 멋진 건 줄 알았는데 가지를 보니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꽤 멋진 일이다. 무엇이든 꾸준 것이 더 어려우니까. 어느새 가지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 슬며시 생겨났다.




keyword
이전 06화"백로"의 맛, 땅콩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