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나누는 재미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이지만 가끔은 나누고도 남아서 곤란한 상황이 찾아온다. 오이, 부추,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이 남으면 무조건 김치를 만들어 두는데 남는 가지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물론 말려두었다가 묵나물로 먹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려서 보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최대한 신선한 상태에서 많이 소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게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주변에 농사를 짓는 친구가 우리 집은 가지를 어떻게 먹냐며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이라 한탄을 해왔다. 우리도 무침, 냉국, 덮밥 등등 여러 방법으로 먹고 요즘 유행한다는 피자도 해 먹었다. 심지어 포카치아에도 올려 구웠지만 4~5일이면 10개가 넘게 나오는 가지를 다 소비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니 혼자 사는 친구는 더 힘들었겠지. 초보 농부의 가장 큰 실수가 상추를 많이 심는 거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상추 옆에 가지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주방 한쪽에 쌓여가는 가지를 바라보며 최대한 많이 소비할 수 있는 레시피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가지 카레를 해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검색해서 나오는 가지 카레는 대부분 여러 채소를 넣고 거기에 가지를 조금 더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는 이 많은 가지를 다 못 쓴단 말이야. 결국 그냥 가지를 몽땅 넣고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일단 만들어 보고 맛없으면 하나씩 추가하지 뭐.
처음에는 가지 위주의 레시피를 만들기 위해 다른 채소들을 전부 빼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카레집을 하시던 분이 카레에 양파는 꼭 들어가야 맛이 난다고 하셨다. 갈색빛이 돌 때까지 볶아 감칠맛을 최고치로 올린 양파에 구워 놓으면 누구든 먹지 않겠냐며 먼저 한바탕 구워 놓으신 가지를 잘라 넣었다. 정말 들어가는 채소는 이 둘이 전부였다. 카레에 진짜 감자도 안 넣는 거냐며 옆에서 계속 잔소리하던 엄마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카레의 첫 번째 포인트는 가지를 많이 소진할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가지가 위주인 만큼 깔끔한 맛을 낼 것. 이 두 가지를 염두하며 만들고 있었는데 왜 자꾸 텁텁하게 감자를 넣어야 한다는 거야. 어떤 날은 밑도 끝도 없이 "네가 해." 해서 서운하게 하더니 이럴 땐 또 옆에서 훈수를 엄청 두신다. 아니, 내가 알아서 할게! (모녀의 관계란 무엇일까.)
그렇게 정말 가지와 양파만 넣은 카레가 완성되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릇에 옮기면서도 이게 괜찮을까 걱정스러웠다. 사실 들어간 게 너무 없긴 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한 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가지를 한 번 구워 넣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뭉글한 그 식감을 싫어하는데 한 번 구운 가지는 오히려 쫄깃하고 맛있었다.
그 뒤로는 쌓여 있는 가지를 봐도 한숨짓지 않는다. '가지가 또 많네? 카레 해 먹지, 뭐' 하고 넘기는 여유가 생겼다. 겨우 레시피 하나 생긴 걸로 마음에 여유가 생기다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그래도 이 행복한 걱정을 덜어낼 비법(!)을 찾았으니 친구에게도 알려줘야지.
재료 (2인분)
- 가지 5개 (약 600g)
- 양파 2개 (약 200g)
- 버터 20g
- 고형 카레 3쪽
- 물 3컵
- 식용유
- 달걀 2개
- 후추
- 밥
만들기
1. 가지를 길게 반으로 잘라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팬에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2. 양파를 채 썰고 버터를 넣어 중 약불에서 갈색빛이 돌 때까지 볶는다.
3. 구운 가지를 한 입 크기로 자르고 양파를 볶은 팬에 넣는다.
4. 분량의 물을 붓고 고형 카레를 넣어 한소끔 끓인다.
5. 그릇에 밥과 카레를 담고 달걀프라이를 올린 뒤 후추를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