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10월 23일쯤, 서리가 내리고 가을걷이를 마무리하는 때.
콩과 팥 수확하기, 마늘과 양파 등 월동 작물 심기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호박에 대해서도 쓸 거야?"
내 브런치를 구독해 주는 친구가 물었다. 본인의 알고리즘에 호박 요리가 떠서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제야 번뜩 떠올랐다.
'어? 맞아! 이른 봄에 파종할 때 호박도 있었는데?'
이 질문을 받았던 게 7월 말이었으니 4월 초에 파종한 호박이 자랐어도 한참을 자랐을 시기였다. 그럼 이게 다 어디 갔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위 쪽 밭에 심고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같이 파종했던 오이나 옥수수, 양배추, 브로콜리 등은 이미 다 수확해 먹은 지 오랜데 호박은 이제야 수확을 한다. 아마 우리 밭에서 심고 수확하는 데까지 가장 오래 걸리는 작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눈에 잘 안 띄는 윗 밭에 심어두신 건가? 아무래도 눈에 계속 보이면 언제 꽃이 피는지, 언제 열매 맺는지, 언제 수확해도 될는지 계속 신경 쓰이고 마음 졸이게 될 테니까. 정말 이런 이유에서 안 보이는 곳에 심으신 거라면 너무나 성공적이다. 물론 부모님은 모종을 심어 두고 잘 자리 잡았는지 종종 확인하셨겠지만 나는 꽃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오이에 대해 얘기할 때 썼듯이 애호박도 늙도록 두면 늙은 호박이 된다. 그러나 애호박으로 먹을 때 맛있는 품종이 있고, 늙은 호박으로 먹을 때 맛있는 품종이 있다. 그래서 애호박용으로는 조선호박을, 늙은 호박용으로는 맷돌 호박을 따로 심는다. 조선호박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심어 두고 지나다니며 하나씩 수확해 먹었지만 노랗게 익다 못해 하얀 분이 날 때까지 늙혀야 하는 맷돌 호박은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심고 오래오래 충분히 늙혀서 수확한다.
언젠가부터 내 알고리즘에도 호박꽃만두가 뜨기 시작했다. 약간 시골 살이 하는 사람들의 로망 같은 음식이 몇 개 있는데 주변에서 많이 회자되는 메뉴로는 진달래 화전, 아카시아 꽃송이 튀김, 들깨송이 튀김, 그리고 이 호박꽃 만두가 있다. 나열하고 보니 평소 식용보다는 관상용으로 생각하던 "꽃"을 먹는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구나 싶다. 이미 오랜 기간 농사를 지어오신 부모님 덕에 앞서 말한 음식들을 전부 맛보았으나 유일하게 먹어보지 못한 게 바로 호박꽃 만두였다. 나 역시 농사를 시작했으면 호박꽃 만두쯤은 먹어봐야지 싶었는데 말을 꺼내자마자 반려당했다. 엄마가 호박 특유의 냄새를 싫어하신다고 했다. 이제 처음 알았다. 엄마가 싫다고 해서 못할 이유는 없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가족들이 모두 맛있게 먹을 게 아니라면 굳이 그 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대충 때우고 마는 엄마도 이런 마음이겠지.
9월 중순에 들어선 어느 날은 아빠가 노랗게 익으려면 한참 남은, 초록빛의 맷돌호박을 따 오셨다.
'어라? 이건 늙도록 뒀다가 먹는 종류 아닌가? 왜 벌써 따셨지?'
알고 보니 가을에 들어서고 나서야 뒤늦게 열매 맺은 맷돌 호박은 충분히 늙을 때까지 기다리면 그 전에 얼어 죽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애호박으로 먹기도, 늙은 호박으로 먹기도 애매한 시기에 수확해야 할 수 있으므로 애초에 애호박인 상태에서 따 먹는 것이다. 이렇게 농사를 짓다 보면 작물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서 아주 작은 것도 쉽게 버리지 못하게 된다. 맛이 좀 덜하더라도 어떻게든 야무지게 다 챙겨 먹는다.
올해는 평소 보던 것과 다른 신기한 호박도 만났다. 우리 밭을 기준으로 윗 밭, 옆 밭으로 부르는 이웃들이 있는데 종종 이 분들과 씨앗을 주고받기도 한다. 이것도 옆 밭에서 주신 씨앗을 심어 기른 것이라고 했다. 크는 동안 길쭉한 모양도 특별하다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마어마하게 크게 자라났다. 이 호박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소인국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큰 호박이 있을 수 있구나 하며 이름을 물었더니 토종 호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애호박 상태로 먹으려고 조선호박을 심고, 늙은 호박 상태로 먹으려 맷돌 호박을 심잖아. 그럼 토종 호박은 뭐에 쓰려고 심는 거야?"
내 질문에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토종 호박이 조선호박이야."
그랬다. 여태 애호박 상태로만 먹어오던 조선호박이 늙으면 이렇게 크고 무거운 자이언트 호박이 되는 것이었다. 조선호박, 맷돌 호박, 토종 호박 3종을 심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조선호박과 맷돌 호박 2종을 애호박으로도, 늙은 호박으로도 요리조리 시기에 따라 수확해 먹고 있던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들 변화무쌍한 지. 그리고 어쩜 엄마도 이렇게 야무지게 길러 먹어온 건지. 농사를 짓고 수확해서 먹는 작은 방법들을 하나하나 배워갈수록 현명한 엄마의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스승님을 잘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