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표현하려 동화를 쓴 레지스탕스 이탈로 칼비노와 나무 위의 남작
달팽이 요리 한 접시 때문에 코지모는 나무 위로 도망쳤고, 거기서 평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런 남작의 이야기가 당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소년 시절 자신의 의지로 나무 위로 올라가 24시간 내내 한 발짝도 땅에 딛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또 온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매력적인 남자가 있다.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대문호인 동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나무 위의 남작>을 통해 사람들 속에 없으면서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색다른 방법을 소개한다.
남작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는 밥을 먹을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나무 위, 심지어는 변을 볼 때에도 나무 위다.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물어본다면, 작품의 배경이 된 실제 18세기 이탈리아 리구리아 지역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나무에서 옆 나무로 넘어가는 식으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가능했다고 하니 일단 나무 위에서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 남작, 의외로 자기 품위를 지키는 데에도 꽤 능숙하다. 볼일을 보는 그루터기를 개울의 물줄기와 속이 뚫린 둥근 기둥 모양의 나무로 연결하여 자기 흔적을 지우는 것은 물론이고, 옷을 사 입지는 않아도 계절마다 바뀌는 고양이 가죽 모자로 남다른 패션 감각을 선보이기도 한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큰 나무의 은밀한 옹이도 여럿 알고 있어 마을 처녀들을 꾀기도 하는 그는 그 능력을 갖추고 도대체 왜 나무 위에서 사는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흙 알레르기라도 가지고 있어 땅바닥에 닿으면 죽는다고 한다면 납득이라도 하겠지만, 그가 놀랍게도 나무 위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가 누나가 요리한 '달팽이'들을 강제로 먹이려 했기 때문. 이 사소한 이유로부터 비롯된 코지모의 곤조(이탈리아어로 곤조 gonzo는 바보이기도 하다.)가 어떻게 수십 년간 유지될 수 있었을까? 조금 스포하자면, 극의 초반부에 나무에 올라간 이후 500쪽에 달하는 환상 동화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코지모는 땅 위를 단 한 발자국도 밟지 않는다. 그의 대단한 결심과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못지않게 남작 내면의 여정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 속에 없으면서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코지모의 사회생활 비결을 알아보기 전에, 땅을 한 발자국도 밟을 수 없었던 코지모 생각의 이면이 어땠을지 먼저 추리해 보자.
치기에서 결심으로, 결심이 삶의 주체성의 상징으로 바뀌는 내면의 여정
코지모는 단순히 달팽이 요리가 싫어 나무 위로 도망친다. 하지만 그 우발적인 선택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 단순한 반항이었던 결심이, 점차 그의 삶과 신념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원래 코지모는 아마 저녁때가 되어 아버지가 자신에게 억지도 달팽이를 먹인 것을 사과한다면 땅에 내려갈 속셈이었다. 그러나, 잔가지를 통해 이웃 소녀 비올라의 집에 있는 나무로 넘어가며 상황이 꼬인다. 이 아리따운 소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스스로를 '나무 위의 남작'으로 소개한 소년, 그런데 비올라가 정말 땅에 내려오지 않는 것이냐며 궁금증 반 비웃음 반으로 응대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곧이어 소년의 결심을 시험하는 첫 번째 위기-외부적 원인의 말소가 발생한다. 문을 열고 나타난 비올라의 부모님으로부터 비오바스코 디 론도 가문의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저녁 식사 초대를 받게 된 것이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지 않아 비올라의 가문을 가짜 귀족이라 칭하는 자신의 아버지, 아를레스코 비오바스코 디 론도 남작에게 한 방 먹일 기회인데.
그러자 방금 전의 모욕감은 설욕감으로 바뀌었고, 아버지를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던 적들의 초대를 받음으로써 아버지에게 복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중략) 코지모 형은 일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뒤엉켜 있어서 분명히 말할 수는 없어도 이런 생각들과 정반대되는 감정도 맛보았다. 수줍음, 자존심, 외로움, 고집스러움 같은 것이었다.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 중
아버지에게 간접적으로 복수할 수 있으니 시원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할 법도 하지만, 내려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코지모. 본인을 자랑스레 소개한 문장을 예쁜 소녀 앞에서 만남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무르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여기서 변덕이 결심으로 변신한다. 다만 이 결심을 매개하는 동기가 아버지에 대한 반항에서 소녀의 눈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었을 뿐 그 중심이 외부에 있다는 것은 여전하기에, 소년의 결심은 여전히 외부적 요소의 변화에 취약하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좋아하는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만의 숨은 규칙을 지키는 평범한 소년이었던 코지모.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으로서의 성질이 더 강했던 '나무 위 유목민' 타이틀은 시간이 흘러 다시 비올라를 마주하고서야 온전히 본인이 유지하고자 해서 가지는 신념으로 변하게 된다. 자신이 지난번에 선언한 내용을 지금에 이르러서도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는 코지모에게 돌아온 것은 "너 참 대단하구나, 그래서 뭐?" 하는 빈정거림이었지만, 여기서 코지모는 비올라에게 실망해 땅에 내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의 정체성과 나무 위에서 내려가지 않는다는 아집을 연결짓는다. 나무 위에 살아야 하는 외적 동기가 사라짐으로서, 그는 비로소 자유 의지로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땅에 내려오게끔 하는 비올라에게 한 '만약 어떤 사람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진정한 자신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을 멋지게 날릴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즉 이 대목에서 나무 위에 산다는 아집은 남들에게 보여지는 특징에서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남게 하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신념으로 변주된다.
이렇듯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치기가 결심으로, 결심이 삶의 주체성의 상징으로 바뀌어 가는 개인의 심리적 변화 과정을 재치있으면서도 섬세하게 나타낸다. 작가는 코지모의 구체적 심리를 묘사하지 않고, 동생인 비아조를 서술자로 제시하여 겉으로는 기인이라는 말로밖에 나타낼 길이 없는 이 인물이 반 세기가 넘도록 땅을 밟지 않는 이유를 개인의 아집이나 독특함으로 돌리지 않고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다. 독자는 코지모의 삶을 그가 이야기한 대로밖에 믿을 수밖에 없는 비아조의 입장이 되어, 그의 심리를 추정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여정에 공감하게 된다.
강인한 내면에 뿌리를 둔 모험은 틀림없이 소리 없이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중략) 두 번 다시 나무 위에 산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고, 그런 말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다짐했다.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 중
만약 어떤 사람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진정한 자신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거야…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중략)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중략)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장 그르니에, 공(空)의 매혹 중
우리는 흔히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결정적인 사건들 몇 가지를 계시로 말미암아 결정되어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운명적으로 예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운명적이고, 결연하게 보이는 코지모의 삶 역시 그 시작은 돌연한 근거 없는 결정이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삶의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의 방향성을 내적으로 추동하는 신념은 어느 순간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코지모의 경우에 삶의 방향성을 결정지은 계시는 결심과 맞물려 섬광처럼 지나갔지만, 동시에 그것이 참모습을 나타내어 코지모 본인이 결심을 온전히 자신의 삶과 연결짓는 데까지는 나무 위에서의 삶이 내면화되어 일상처럼 적응되기까지, 그리고 계시와 행동을 매개하는 외부적 요소들을 다 떨쳐낼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의 삶의 신념은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며, 그 신념을 강화하고 변화시키는 의미를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것 역시도 본인의 몫이다. 나무에 올라갈 이유를 찾아 나무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이미 올라간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 가는 것이 비유로서 삶의 의미 찾기에 더 가까울 터. 각자만의 나무에 올라가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갈림길이라면, 그 결정을 유지하거나 나무에서 내려올 이유를 찾는 것이 인생의 두 번째 갈림길이다. 어떤 신념이 생의 끝까지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신념을 자신이 직접 찾았기 때문이니.
나무 위에 사는 남작,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
간단히 말하자면 코지모 형은 그렇게 떠들썩하게 나무 위로 도주한 뒤에도 예전처럼 거의 우리 곁에서 살았다. 그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 은자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사람들만이 형의 가슴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민음사, 나무 위의 남작> 113p.
좋다, 코지모는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해 나무 위에 남기를 결정했다. 여기서 자연히 드는 궁금증은 '그럼 나무 밑의 사람들은?'일 것이다. 읽는 우리도 당혹스러운 이 결정을 그의 가족들은 두 팔 벌려 환영했을까? 파국을 예상했겠지만, 놀랍게도 모두는 조금씩의 트러블을 겪지만 결국 그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나무 위의 남작>을 온전히 개인의 자유가 무엇이냐 하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탈로 칼비노는 사회적 책임과 개인의 신념 간의 갈등, 그리고 고립을 통해서 세상과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유토피아적 예시로 코지모를 제시하며, 그리고 그렇게 설득하는 과정을 매혹적이고 소설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월든(1854)부터 TV예능 '나는 자연인이다' 에 이르기까지, 속세를 떠나 안빈낙도하는 삶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러나 스크린을 통해 본 자연인의 삶에 사회 생활은 없다. 정상적으로 사회에 스며들지 않으면서 주변인을 어떻게 설득하여 자신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게 할 것인가 하는 이 어려운 질문에 작가는 외부와 교류하는 은자인 코지모와 사회 속에는 살고 있지만 진정으로 다른 이들과 소통하지는 못하는 내면의 은둔자들인 가족들 간의 대비와 화해로 답한다.
권위적이고 귀족 사회에 들어가는 것-지극히 외부적인 동기-을 평생의 목적으로 삼은 코지모의 아버지 남작은 작위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알고 있지만, 정작 이웃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방법은 모른다. 터키에서 술탄 밑에서 일했던 삼촌은 마을 사람들과는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만의 수력학 공부에 틀어박혀 매일매일 은둔하며 보낸다. 성격이 괴팍한 코지모의 누나는 결혼하기는 글러 수녀 서원을 억지로 받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총체적 난국인 이 집안을 구원한 것은 평생 나무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골칫덩어리 큰아들이었다. 그는 집에 방문한 타지의 백작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호감을 사 누나를 결혼 보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며, 전 유럽의 학자들과 서신 교환을 하며 자신의 철학을 터놓는다.
결국 코지모와 한판 싸우지만 결국에는 자기 가문을 상징하는 칼을 건네며 아들과 화해하는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코지모와 대립각을 처음부터 세우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한 번 살펴보자.
한편 우리 어머니로 말하자면, 그 어떤 감정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변화무쌍한 감정인 모성적 불안감이 점점 굳어져만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전투 중인 장군의 근심 걱정이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고 적절한 장비를 찾음으로써 해결되듯이, 어머니의 불안감 역시 마찬가지로 해소되었다. 어머니는 세 발 달린 키 큰 망원경을 찾아냈다. 그러더니 망원경에다 눈을 갖다 대고 계속 나뭇잎 사이에 있는 아들에게 렌즈의 초점을 맞추면서 저택의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형이 반경 내에 없다고 말해 주어도 어머니는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느 곳을 지켜보든,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면, 우리는 어머니가 그곳에서 형을 발견했고 형이 진자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코지모 형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는 어떤 행동을 하든 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 스스로가 이 사태에 대해 납득해 보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코지모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그럼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어머니와 코지모가 화합할 수 있었던 비결 아니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책을 통해 코지모의 입장에서 가족과 화합하는 방식뿐 아니라, 살면서 여러 코지모들을 만나게 될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들과 화합할 수 있는 방식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다. 내가 다소 미흡하게 소개했지만, 책을 읽으면 충부한 행동과 심리 묘사에 다소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배경임에도 그들의 삶이 나와는 괴리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역사적 배경에 환상적 인물을 던진 동화의 시작
그렇다면 칼비노는 처음부터 이런 효과를 노리고 동화의 양식을 채용해 글을 썼던 것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 궁금한 이들을 위해 칼비노의 문학적 여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다들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현미경의 대물 나사를 돌리며 두 개의 커버 글라스 속 핏빛으로 염색된 세포를 관찰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사를 조금만 덜 돌려도 흐릿해져 재물대의 먼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선명해지는 시야에 렌즈가 유리에 닿는지 살피지 않고 나사를 더 돌리는 순간 들리는 유리가 깨지는 소리. 초점이 너무 가까우면 세밀한 디테일에만 머물러 전체를 잃고, 너무 멀면 구체적 현실을 보지 못해 추상적인 형태만 남는다.
소설 안에 구체적 사실에 대한 입체적인 서술이 부족하다면 추상적인 형태만 남아, 전달하려던 메시지가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단한 사랑을 다룬 이야기더라도 주인공의 이름도 없는 감정 과잉이 느껴지는 책을 계속 붙잡고 있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반면 묘사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소설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서술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주제 의식이 없는 르포를 소설로 읽고 싶은 생각은 썩 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소설 작가는 늘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을 고민하게 된다.
지나치게 사실적이면 기록처럼 느껴지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면 철학적 사색이 되는 문학의 딜레마, 이 구체성과 보편성 사이의 줄타기에서 이탈로 칼비노는 첫 작품의 사조로 당시 이탈리아 문학의 주류였던 네오-리얼리즘 사조를 선택한다.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 문학이다. 19세기에 주를 이뤘던 것은 유부녀를 짝사랑하는 마음을 수백 쪽에 걸쳐 간드러진 어휘로 완곡하고 절절하게 표현하는 문학-어려운 말로 낭만주의-이었는데, 20세기 소설 독자층은 더 이상 아침 드라마 중독 귀부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개인의 감정과 자연을 찬양 일색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급격히 산업화되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표현하는 데에 부적합했다.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사회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리얼리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빈곤과 혼란이 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터, 문학과 예술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적 사실성과 감정적 강렬함을 결합해 더욱 강렬한 사실주의-네오리얼리즘-로 넘어온다.
네오리얼리즘이 사실성과 감수성을 둘 다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느낀 칼비노는 그렇게 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첫 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집필한다. 그러나 사실적 변형으로서의 문학을 통해 사건의 원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재현하려 하던 그는 오히려 네오리얼리즘만으로는 현대를 반영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할수록, 사건이 실제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다층성과 모순성은 축소되었고 오히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시점을 덧칠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구체성에 매몰되어 글의 방향이 이데올로기적 주관성으로 흐르게 된 것이다. 사실적으로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매달릴수록 세계를 받아들이는 개인 속에 온전하게 존재하는 현실과는 오히려 멀어졌다.
칼비노는 문학을 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찾는 일련의 실험이라고 불렀다. 한 개인의 눈에서 세계를 묘사하며 역사적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모순임을 알게 된 그는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전쟁 당사자가 아닌 어린 소년을 서술자로 등장시켜 소재와 서술자 간의 거리를 두었듯, 앞으로의 소설에서 객관성을 주장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며, 객관적 현실 묘사를 포기하면서도 현실에 영향을 줄 글들을 쓰기 위해 고민한다.
나의 개인적 이야기는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여,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이고 익명의 이야기를 적을수록 이야기는 나에게 만족을 주었다.
-이탈로 칼비노
이러한 변화의 대표작으로 위에서 소개한 나무 위의 남작 (Il barone rampante, 1957)을 포함, 반쪼가리 자작 (Il visconte dimezzato, 1952), 존재하지 않은 기사 (Il cavaliere inesistente, 1959)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꼽는다. 현실의 도덕적, 정치적 문제를 뚜렷한 과거 시간적 배경, 가공의 공간적 배경에서 기발한 설정과 우화적인 서사를 통해 풀어낸 것이다.
역사적인 현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긴장은 곧 풀리게 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죽은 물 위에서 항해를 하고 있다. 우리들이 맨 처음 현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신뢰성이나 그 현실의 표정, 책임감, 에너지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점점 더 힘을 잃어 가기만 했다. 환상적인 소설을 통해 나는 현실의 표정, 에너지, 곧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에 활기를 주고 싶었다.
-이탈로 칼비노
문학은 현실과 추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독자와의 연결성을 만들어야 한다. 두 가지 극단—현실에서 분리된 추상적 보편성과 특정한 사건 및 인물에 치우친 구체성—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면 문학의 본질적인 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칼비노는 의미적 다층성이라는 동화가 가진 장르적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알맹이 없는 추상으로 넘어가 소설적 긴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17세기, 18세기, 중세 유럽 등 구체적 시간적 배경과 역사적으로 존재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현실성을 구현했다. 그렇기에 독자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온전히 즐기며,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구체성을 눈으로 꼼꼼히 추적할 수 있다. 그의 세계 속 독특한 성격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구체적 묘사가 실제 세상 사람들과는 동덜어졌다고 느끼지 않고, 이입해서 읽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세계: 상상력과 철학의 융합
3부작을 쓴 1960년대 이후에도 칼비노는 새로운 문학적 형식을 탐구하며 결코 작가로서 안주하지 않는다. 문학의 형식과 서사 자체를 실험하는 작품-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 만약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1979), 팔로마르(Mr. Palomar, 1983) 등이 있다-을 통해 전통적 서사 구조를 해체하며,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즉 독자들은 그의 작품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탈로 칼비노는 단순히 이야기꾼이 아니라,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확장한 선구자였다. 인간의 삶과 존재를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의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한 그의 작품은 단순히 읽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스스로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제안한다. 우리가 문학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가 좋은 작가라고 믿는다면, 칼비노를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