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커플 댄스신

댄서, 안무가, 가수, 영화감독 그리고 마술사였던 Fred Astaire

by Bellbo

나는 옛날 영화를 사랑한다. 내가 살아 온 세상과는 다르지만 옛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 보면 왠지 모를 향수에 빠진다. 옛 할리우드 영화들은 오늘날의 영화들이 기본적인 미덕으로 여기는 논리적 개연성에 대해 느슨한 태도를 보여준다. 빈 틈 없이 짜여서 한 씬(scene) 한 씬 구축되었다기보다는 감독의 스타일과 배경 음악의 호흡이 어쩌다 보니 이리되었소 하는 느낌이 좋다. 영화 속 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긴장감이 조성되다가 어이없게도 키스 한 방에 또는 커플 댄스 한방에 분위기가 바뀌는 구조의 허술함이 좋다. 아니 거기서 갑자기 키스야? 하는데 그게 또 마법과도 같다.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에서 키스신은 마약과도 같다. 언제 키스신이 나오나 하는 기대감으로 보게 만든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신부님이 키스신만 도려낸 이야기는 영화에서 남녀상열지사를 도려낸 것이 아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기대하고 고대했던 그 달콤한 과육 자체를 앗아간 거니까. 인생은 달콤하지 않아! 하는 지엄한 교훈과도 같다고나 할까.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의 전통이 1970년대 까지 이어진다고 볼 때, 가장 아름다운 할리우드 클래식 무비의 키스 신이 무엇이었나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아름다운 커플 댄스 씬이 무엇인가는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평론가들과 MGM영화사와 나의 의견이 다행히도 일치한다. 누군가 내 의견에 반박을 한다면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 하면서 빠저나 갈 명분도 생겼다. 내가 DVD를 구입해서 수십 번 돌려보았던 그 장면은 1953년도 뮤지컬 영화 밴드 웨건(Band Wagon)에서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 1899~1987)와 시드 쉐리스(Cyd Charisse 1922~2008)의 커플 댄스 장면이다.

이 두 사람은 극 중에서 무대 위에 올려지는 뮤지컬의 남, 여 주인공인데 프레드 아스테어는 대중적인 춤 스타일을 고집하는 전정기가 지난 스타 배우역이고, 시드 쉐리스는 발레를 추구하는 스타일로 서로 무대의 해석 차이로 대립하게 된다. 함께 뮤지컬을 올려야 하는 준비 과정이 난항을 겪자 답답한 두 사람은 센트럴 파크를 걷게 된다. 이때 야외무대의 오케스트라와 커플 댄스를 추는 사람들로 인해서 이 둘은 '그럼 우리도 어색함을 좀 춤으로 전환시켜 볼까나.' 하는 장면이다.


어색함을 커플 댄스로 풀 수 있다니. 마법이 통하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아직은 어색한 사이의 긴장감이 춤에서 절묘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아직 사랑은 아닌데 사랑에 빠질 거 같은 예감 같은 느낌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배어있다. 춤으로 이것을 표현할 수 있다니!


이쯤에서 설명을 뒤로 남겨둔 채 우선 프레드 아스테어와 시드 쉐리스의 댄스신을 감상 해 보자. 이 장면의 음악은 이 영화가 개봉된 이 후 스탠다드 재즈 넘버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아서 슈왈츠(Arthur Schwartz)의 곡, Dancing in the Dark이다.

https://youtu.be/wDHwJrbrp0Y?si=irPhM4TBjcMRwGuO



프레드 아스테어의 춤은 진 캘리(Gene Kelly 1922-1996)와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진 캘리의 동작은 탭 댄스의 바탕 위에 발레와 모던 댄스를 조합하여 과장되지만 절묘한 균형감을 보여준다. 프레드 아스테어는 보다 전통적인 탭 댄스와 찰스턴에 모던 댄스를 한 방울 섞어 넣은 스타일이다. 프레드 아스테어의 춤 동작은 진 캘리처럼 과장되거나 아크로바틱 하지 않다. 특히 커플 댄스에 있어서 그의 춤은 본인을 앞에 내세우기 않고 상대방을 가볍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프레드 아스테어와 커플을 이뤘던 배우들을 살펴보자면, 세기의 미녀 리타 헤이워스(Rita Hayworth 1918-1987), 그리고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스탠더드 넘버가 된 Cheek to Cheek, Smoke gets in your eyes, Pick Yourself Up 그리고 Let's call the whole thing off 등의 명곡 위에서 함께 춤을 췄던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 1911-1995)가 있다.

진저 로저스와의 전설적인 장면들을 남긴 프레드 아스테어는 중년에 이르러 무명에 가까운 시드 쉐리스(Cyd Charisse 1922-2008)를 그의 파트너로 맞이한다. 이미 전설적인 배우가 되어있는 프레드 아스테어의 상대역이라니. 시드 쉐리스의 부담감은 상당했을것 같다. 사람들은 영화의 포스터와 예고편을 보자마자 신인 배우 시드 쉐리스진저 로저스와 비교하게 될 것이 뻔했다. 신인 시드 쉐리스를 리드하면서 영화를 이끌어가야 했던 프레드 아스테어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큰 키에 시원한 동작이 장점이었던 시드 쉐리스의 키가 너무 커서 춤의 균형감이 깨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드 아스테어는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에 여러 차례 시드 쉐리스가 연습하는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그녀의 옆을 빙빙 돌면서 자신과 시드 쉐리스의 키를 비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야 제작사에 OK 의사를 밝혔다.


다시 밴드 웨곤에서 Dancing in the dark 신으로 돌아오자. 프레드 아스테어시드 쉐리스는 이 날 하얀색으로 의상을 통일했다. 시드 쉐리스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하얀색 스커트를 입고 블랙 벨트로 포인트를 주었다. 오프 화이트 블레이저에 노란색 셔츠를 입은 프레드 아스테어는 블랙과 화이트의 배색이 눈에 띄는 스펙테이터 더비 슈즈(spectator derby shoes)로 포인트를 주었다. 스펙테이터는 배색이 너무 튀는 거 아냐 싶지만, 블랙과 화이트 배식의 더비와 로퍼는 192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기까지 탭댄스와 찰스턴을 사랑하는 춤꾼들의 상징이 되어버린 구두이다. 오늘날에도 소수의 멋쟁이들이 스펙테이터 구두를 착용하는데, 클래식한 패션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도전하기에는 닭살 돋도록 과감한 면이 있다. 어쩌면 20세기 초반의 멋쟁이들이 좀 더 전위적인 멋을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이 춤에서 좋아하는 장면은 둘이 마주 보고 리듬을 느끼면서 춤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둘은 아직 손을 잡지 않았고 그 둘 사이의 공기는 "내가 춤을 청해도 될까요? 우리가 춤을 맞출 수 있을까요?"라고 공손히 말하기보다 "어...... 음...... 저기......" 하는 느낌에 가깝다. 그런 느낌이 춤으로 표현이 되니 시작부터 묘한 긴장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이들의 춤은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프레드 아스테어의 잰틀 한 리드는 오로지 시드 쉐리스를 깃털처럼 가볍게 보이도록 의도되었다. 당신은 깃털, 나는 당신을 실어 나르는 바람일 뿐이다 하는 안무랄까.


유튜브를 통해 영상을 보다 보면, 사람들의 댓글들에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다. 옛날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튜브 영상에 단 댓글들을 보면, 이런 오래된 영화를 좋아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 둘의 춤 장면은 완벽하다.'라는 댓글을 읽다 보면 그래 당신 취향이 좋구먼 하면서 뿌듯해한다. 내가 이 영화의 제작자도 아닌데 말이다.


마무리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프레드 아스테어에 대해 조금만 더 적어야겠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이라는 짧은 영화 이후에 영화는 사실을 기록하는 기록물로서의 입장과, 조르주 멜리에스가 1902년에 만든 영화 달세계 여행(A Trip to the Moon)처럼 상상력의 세계를 현실처럼 보여주는 마술과 추상의 두 극단적인 스타일로 발전했다. 이것은 영화학자 루이스 자네티의 의견이고 나도 이 의견에 매우 공감한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 두 스타일을 적절히 섞어서 거짓말을 사실처럼 보여주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프레드 아스테어는 안무가로서 뿐 아니라 영화사에 남을만한 세트 트릭을 개발했다. 마술사가 관객을 속이듯 프레드 아스테어는 다람쥐 챗바퀴처럼 회전하는 방을 만들고, 그 방에 카메라를 고정해서 관객의 공간감에 혼동을 주었다. 1951년 개봉 한 Royale Wedding의 창의적인 장면은 이후 스탠리 큐브릭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라이오넬 리치 뮤직 비디오 등 여러 장면에서 오마쥬 하기에 이른다.

https://youtu.be/t6KqFK2E7zE?si=uyHS_LR_Rm6pt931


가수로서 프레드 아스테어는 그의 댄스 스타일처럼 가급적 힘과 과장을 뺀 심심한 창법을 구사한다.

프레드 아스테어의 CD를 듣다 보면 그의 목소리는 적당히 노이즈가 섞인 LP로 들어야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Swing Time(1936)에서 프레드는 The Way You Look Tonight을 불렀는데, 이 노래는 이후 9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결혼식 축가로 널리 불리고 있고 앞으로도 100년 동안은 계속 사랑받을 듯싶다.


필자의 결혼식을 잠깐 소환해 보자면, 필자는 결혼식 축가로 라이오넬 리치의 Endless Love, 바브라 스트라이젠드의 Guilty, 그리고 The way you look tonight 이렇게 몇 곡의 후보곡을 생각해두고 있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의 선택은 The way you look tonight이었다. 마이클 부블레의 음반을 위해 살랑살랑 보사노바풍으로 편곡된 버전이 결혼식에서 사용되었는데 신부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