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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균형 위에 선 한 나라의 길

by 엠에스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 균형 위에 선 한 나라의 길


세계는 지금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총과 대포가 아닌, 관세와 공급망을 무기로 한 전쟁이다. 한때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세계 경제를 떠받쳤던 중국의 부상은 이제 미국과 유럽 제조업의 쇠퇴를 불러온 원흉처럼 지목되고 있다. 미국은 잊힌 제조업 도시의 분노와 일자리를 등에 업고, 다시 공장을 부르기 위해 관세의 벽을 높인다. 유럽 역시 기술 유출과 일자리 잠식을 우려하며 보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WTO는 한때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잇는 규범의 첨병이었지만, 지금은 주요국의 ‘각자도생’ 앞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깊은 고민에 빠진 나라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이다.


한국이 선 자리는 균형의 가장 좁은 봉우리


한국은 자유무역으로 성장한 나라다. 부품과 소재를 들여와 가공하고, 세계로 수출하며 부를 축적해 왔다. 그러나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되고, 유럽까지 보호주의로 선회하는 지금 한국은 딜레마를 마주한다.


미국은 안보동맹과 기술동맹을 강화하라 요구하고, 중국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제적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한국에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다.


한쪽의 요구를 온전히 따르는 순간 다른 쪽의 불편이 도마 위에 오른다. 한국이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이든 경제적·외교적 비용이 따른다. 이것이 한국이 처한 ‘협소한 균형의 봉우리’다.


실제로 최근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전략적 메시지가 흔들린 단면도 이미 목격되고 있다. G20에서의 질문 회피나 전략적 모호성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외교의 현재 좌표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한국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혹은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인지 묻고 있다.


공급망,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반도체 하나에 수십 개국의 부품과 공정이 들어가는 시대, 공급망은 곧 안 보이고 정치이며 권력이다.


● 미국은 반도체·배터리·AI 기술을 전략 물자로 규정하고 동맹국과의 규범 정렬을 요구하고,


● 중국은 희토류·배터리 소재·중간재를 무기처럼 다루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다.


● 유럽은 핵심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중국 의존을 줄이기 위해 규제·보조금을 동원한다.


이 속에서 한국은 어떤 기술과 어떤 원자재를 누구에게서 어떻게 공급받을지를 섬세하게 조정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업이라도, 원자재가 막히면 공장은 선다. 그리고 공장이 서면 국가는 무너진다.


지금의 길을 그대로 갈 수 없는 이유


이 세계적 재편 속에서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경제 모델의 오작동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고비용 구조와 인구 감소, 기술 패러다임 전환(전기차·AI·로봇 등)에 맞춰 산업이 충분히 재편되지 못하고 있다. 제조업이 흔들리면 고용과 지역경제가 동시에 위태로워진다.


둘째, 외교적 선택의 비용 증가

한국은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 외교 할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이제 기술·에너지·안보가 한 덩어리로 결합되며 더 이상 ‘두 마리 토끼’를 쉽게 잡을 수 없다.


셋째, WTO 약화의 직격탄

다자 규범이 약화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중견·중간 규모의 무역국이다. 한국이 바로 그 대표 사례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1) ‘선택’이 아니라 ‘설계’가 필요하다

한국의 전략은 단순히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선택문제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국의 산업·경제·안보 구조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2) 산업정책: 전략적 자립과 고도화

반도체, 배터리, 첨단소재 등 핵심 산업을 단순 생산이 아닌 부가가치의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공급망은 국산화와 다변화를 병행해 ‘한 나라 의존’을 탈피해야 한다. 제조업을 디지털·AI 기반의 서비스 산업과 결합하여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 때다.


(3) 무역정책: 시장 다변화와 규범 리더십

중국·미국·유럽에 편중된 시장을 벗어나, 동남아·인도·중남미 등 신흥국과의 FTA와 공급망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디지털 무역, 기술표준, 보조금 규범 등 WTO 이후의 새로운 규범 설계에 한국이 참여해야 한다.


(4) 외교전략: 다층·다축 외교

안보 동맹은 유지하되, 경제적 협력은 다자적·실 pragmatic 하게 설계하는 ‘전략적 헤징’이 필요하다. 경제안보 컨트롤타워를 일원화하여 기업이 리스크를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5) 국민적 기반: 사회적 합의와 인재전환

산업 구조조정의 충격을 흡수하는 안전망, 디지털·AI 시대에 맞는 재교육, 지역 제조업 기반의 재배치와 산업전환 등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준비가 없다면 어떤 전략도 성공할 수 없다.


한국의 미래를 위한 결론 – 균형이 아니라 ‘능동적 주체성’


한국은 오랫동안 ‘균형’이라는 말을 내세웠다. 하지만 균형은 스스로의 힘이 약할 때는 수동적 방어전략이 되기 쉽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균형이 아니라 능동적 주체성이다.

● 공급망은 스스로 구축하고,

● 무역 규범은 스스로 제안하며,

● 산업 경쟁력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외교는 흔들리는 세계 질서 속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길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다. 세계 10위권 경제, 민주주의, 기술 기반, 교육 수준을 모두 갖춘 나라다. 문제는 그 힘을 세계 재편기 속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은 어느 특정 강대국의 그림자도 아닌 자국의 산업·기술·가치에 기반한 자주적 · 실용적 · 창조적 경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기다. 그리고 한국은 이 전환의 한가운데서 다시 한번 ‘국가 전략’의 의미를 새롭게 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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